전현구 목사의 목회단상

한국 교회가 오해한 바울 신학 10가지
필자는한국 교회에서 자주 나타나는 바울 이해의 오해를 10가지로 정리하고, 이를 현대 바울 연구의 대표 성서학자들인 1.James D. G. Dunn, 2. N. T. Wright, 3 E. P. Sanders, 4. Norman Perrin의 연구 흐름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1. 구원을 “개인 영혼의 천국행”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성서 본문은 로마서8:21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리라.”
N. T. Wright는 바울의 구원을 우주적 새 창조 사건으로 해석한다.
구원은 단지 개인 영혼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의 회복이다.
James D. G. Dunn 역시 바울 신학의 중심을 종말론적 공동체로 본다.
정리하면, 구원은 영혼이 하늘로 도망치는 길이 아니라 창조가 다시 숨 쉬는 순간이다.
인간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 즉 별들과 바람과 흙까지 함께 회복되는 하나님의 우주적 교향곡과 같다.
2. “율법 = 행위구원”이라는 단순한 이해이다
성서 본문은 로마서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E. P. Sanders는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 (covenantal nomism)라고 설명한다.
즉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이미 언약 안에 들어온 백성의 삶의 방식이다.
정리하며 율법은 구원의 사다리가 아니라 언약의 집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리듬이다.
3. “육 = 몸”이라는 오해이다
성서 본문은 로마서 8:6
“육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James D. G. Dunn는 “육”(sarx)을 물질적 몸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인간 상태로 해석한다.
즉 육은 자기 중심적 존재 방식이다
정리하면 육은 몸이 아니라 닫힌 존재의 방향이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자기 안에 갇힐 때 존재는 스스로의 그림자가 된다.
4. 바울을 헬라 철학적 이원론자로 보는 것이다
성서 본문은 고린도전서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N. T. Wright는 바울의 “영적 몸”을 비물질적 존재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 변화된 몸으로 해석한다.
정리하면, 바울의 부활은 몸을 버리는 사건이 아니라 몸이 죽음의 권력에서 해방되는 사건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고백에도 “몸의 부활”을 믿으며…
5. 믿음을 단순한 “심리적 확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서 본문은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Norman Perrin은 믿음을 존재론적 참여(participation)로 해석한다.
정리하면, 믿음은 생각이 아니라 새 존재 방식이다.
믿음은 생각의 결론이 아니라, 존재의 전환이다.
인간이 자기 삶의 중심에서 내려와 그리스도의 숨결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순간이다.
6. 칭의를 “법적 선언”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어거스틴/루터/칼벵)
성서 본문은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N. T. Wright는 칭의를 언약 공동체에 속함을 선언하는 사건으로 해석한다.
정리하면, 칭의는 법정의 판결이기 전에 관계의 회복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끊어진 이야기가 언약과 십자가 사건으로 다시 이어지는 순간이다.
여기서 믿음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말한다. 이 믿음으로 주님 안에 (in Christ / 공간개념이 아니라 관계개념)있을 때 의롭게 되는 (이신칭의)되는 것이다
7. 바울을 여성 억압 신학자로 보는 것이다.
성서 본문은 갈라디아서 3:28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James D. G. Dunn는 이것을 초기 기독교의 급진적 평등 선언으로 본다.
정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든 경계는 무너진다.
민족/계급/성별/모두 새 창조 앞에서 새로운 관계로 다시 태어난다.
8. 바울을 로마 제국 옹호자로 보는 것이다
성서 본문은 빌립보서 2:10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하셨다.”
N. T. Wright는 이것을 로마 황제 숭배에 대한 신학적 저항으로 해석한다.
정리하면, 바울의 복음은 제국의 언어 속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반역 선언이다.
9. 바울 신학을 개인 윤리로 축소했다.
(어거스틴/루터/칼벵)
성서 본문은 고린도후서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Norman Perrin은 바울 공동체를 새 인류의 상징적 공동체로 해석한다.
정리하면, 교회는 종교 모임이 아니라, 종말론적 새 창조의 공동체다.
10. 바울을 도덕주의 신학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성서 본문은 로마서 7:24–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E. P. Sanders는 바울 신학의 중심을 은혜 사건으로 본다.
정리하면, 바울의 신학은 도덕의 체계가 아니라 은혜의 폭발이다.
그래서 바울신학을 십자가신학이라고 한다
루터와 칼벵은 이 십자가 사건이 희미하다.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바울 신학은 영혼 구원 교리가 아니라, 새 창조 인간론이다.
인간은 율법 아래서 분열된 존재이지만, 성령 안에서 새로운 세계의 시민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바울의 신학은 단순한 교리 (루터, 칼벵)가 아니고 영혼불멸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빛 속에서 하나님의 부활 능력으로 부활하는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세계가 다시 새롭게 창조되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겨울의 모습에서 봄에 새로운 모습처럼…
P/S
필자는 위 바울서신을 해석한 현대 성서학자들의 견해를 지지하며, 특히 Norman Perrin의 견해를 적극 지지한다.
왜냐하면 Norman Perrin은 필자의 신학교 스승의 스승이시다.
분명 약점도 분명 있다. 그러나 최근 바울신학의 선두 주자로 후학들이 더 새로운 해석의 패러다임을 넓혀가고 있어 성서 본문에서 바울의 뜻과 의도에 더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개인적인 사건이지만 필자의 스승(박익수 교수)은 신학교 입학과 함께 부임하여 7년 동안 함께 배웠고, 졸업 후에도 성서 공부 교재를 새로운 패러다임(역사비평/문학비평/사회학 비평/심리학 비평)을 통적으로 적용하여)으로 발간한 적이 있다. 부임한 지 10년 만에 기독교 대한감리회 교단에서 쫓겨났다.
지금 한국 교단 신학교는 너도나도. 여기 시드니 일부 신학교에서도 간간이 소개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격세지감을 느낀다.
시드니 성시화는 식객(食客)인가 아니면 식주인(食主人)인가?
필자는 인문학 모임에서 만난 한 지인은 개인적으로 만날 때마다 한국교회와 목사의 문제점을 가감 없이 비판한다. 그럴 때마다 솔직히 피곤함을 넘어 자괴감마저 들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현실적인 공동체 문제이고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자. 필자는 개인적으로 어느 한 개인의 비난을 넘어 거의 비방을 해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존엄과 평등과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한 공동체의 리더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래서 당연히 비판과 비평은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진난해 12월 지인과 뜨겁게 아규를 하는 동안 이런 질문을 받았다. (로마서16:2~4;23) “당신은 기독교의 교회와 목사로서 식객(食客)인가 아니면 식주인(食主人)인가?”잠시 죽비(竹扉)가 등짝을 치는 느낌을 받았다. 왜 나는 망서리는가? 변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의견을 에세이로 보내겠다는 약속을 하고 아직까지 답변을 보내지 못했다.
시드니 성시화 모임이 20주년을 맞이하여 큰 행사를 준비한 모양이다. 늘 그래왔듯이 알게 모르게 전해지는 분위기는 고구마 서너 개를 먹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도 필자는 지인의 질문을 통하여 몇 자 의견을 개진하고 싶었다. 그래서 로마서 16:2~4; 23절을 중심으로 묻고 싶다. “시드니 성시화는 식객(食客)인가 아니면 식주인(食主人)인가?”
한국은 70~80년대 이후에 한국 개신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성시화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해 왔다. “도시를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비전 아래 복음운동, 공직자 기도운동, 공공정책 참여, 사회윤리 캠페인 등을 추진한 것들이다. 성시화 모임의 기본 취지는 ‘한 도시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 도시 전체가 변화된다’이 운동은 개인 구원 중심의 신앙을 넘어 도시 구조 자체의 변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공공신학적 성격을 가진다.
성서적 근거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예29:7)이다. 시드니 성시화 모임도 보통 4가지 특징을 가지는 것 같다 1 영적 각성 운동 강조, 2 도시 단위 연합기도, 3 공직자 정치 영역과의 접촉, 4 보수적 윤리 의제에 대한 적극적 발언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들은 단순 전도운동을 넘어 공적 영역 개입을 지향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두려움 속에서 흔들려 왔다. 세상은 점점 세속화되고, 교회의 영향력은 약해진다고 느낀다. 그 불안 속에서 어떤 공동체는 “성시화”를 외치고, 어떤 공동체는 “거룩한 통치”를 꿈꾼다. 그러나 이 열망은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성시화는 도시를 섬기려는 선교적 비전이 될 수 있고, 성시주의는 도시를 점령하려는 종교적 권력욕이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속화(世俗化)는 인간의 책임적 성숙을 뜻한다면, 세속주의는 초월을 부정하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하비 콕스는 [The Secular City]에서 아 구분을 분명히 했다. 콕스는 세속주의를 비판했지만 세속화는 적극적으로 긍정했다. 왜냐하면 세속화는 종교를 파과히는 힘이 아니라 종교 권력의 우상화를 해체하는 역사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1. 성시화와 성시주의(거룩의 선교인가? 거룩의 제국인가?)
1) 성시화는 빛으로 존재하는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그랬다(마5:14) “너는 세상의 빛이라” 빛은 장악하지 않고 빛은 침투한다. 빛은 통치하지 않고 드러낸다. 참된 성시화는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 도시 한복판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예레미야 29:7은 선포한다.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포로 된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은 점령이 아니라 평화의 추구였다. 이것이 성시화의 복음적 방향이다.
2) 성시주의(거룩의 정치화다)
그러나 성시화가 성시주의로 변질될 때, 거룩은 선교가 아니라 전략이 된다.하나님의 이름이 공적 권력확보의 수단이 되고, 공동체의 언어가 정치적 영향력 확대의 도구로 변질된다. 이때 요한복음18:36절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의 나라는 세상 밖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세상의 지배 논리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나라다. 성시주의는 이 차이를 지운다. 하나님 나라를 국가 권력과 동일시한다. 그 순간 기독교 공동체는 예언자가 아니라 제국의 제사장이 된다.
2. 세속화와 세속주의(해체인가?, 배제인가?)
1) 콕스는 세속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세속화는 인간이 종교적 통제에서 벗어나 책임적으로 성숙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세속화는 왕권신수설의 붕과, 교회의 절대 권위 해체, 정치와 신학의 분리를 의미한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복음을 권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사건으로 본다.
2) 그러나 세속주의는 다르다. 그것은 초월 자체를 불필요하게 여긴다. 신을 제거함으로 인간 이성을 절대화한다. 사무엘상 8장에서 백성은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왕을 요구한다. 이것은 세속주의적 충동이다. 신을 밀어내고 인간 권력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3. 한국기독교 공동체의 권위주의는 두 공포의 결합이다
한국기독교 공통체의 권위주의는 세속주의에 대한 공포와 성시주의적 열망이 결합한 결과이다. 세상이 기독교 공동체를 무시한다고 느낄수록, 공동체는 더 강한 권위를 요구한다. 목회자의 말은 곧 하나님의 뜻이 되고, 비판은 불순종으로 낙인찍인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권위주의는 복음의 왜곡이다. 그것은 섬김의 권위를 통치의 권위로 바꾼다.
4. 십자가는 죽는 자리다
빌립보서2:6~8절에서 “그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기 비움(Kenosis)’이다. 성시주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력을 확대하려 하지만 십자가는 권력을 비운다. 세속화는 교회를 약화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십자가로 되돌린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을 때(마27:51) 거룩은 독점에서 해방되었다. 그 순간 권위는 재정의되었다. 권위는 더 이상 군림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랑이 되었다.
거룩은 점령이 아니라. 거룩은 타자의 고통에 참여하는 행동이다. 성시주의는 공간을 신성화하지만 복음(예수 그리스도)은 관계를 변혁한다. 세속주의는 초월을 제거하려 하지만 세속화는 초월을 우상으로부터 구출한다. 하비 콕스는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종교 체제를 지키는 분이 아니라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는 분이다.”
한국 교회 공통체의 위기는 세속화 때문이 아니다. 거룩을 권력으로 오해한데 있다. 성시화는 도시를 섬기는 선교가 되어야 한다. 성시주의는 버려야 한다. 세속화는 받아들려여야 한다. 세속주의는 경계해야 한다. 복음은 권위를 정화한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지배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세상에 의해 밀려났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참된 권위가 탄생했다. 그 권위는 명령하지 않고 초대한다. 그 권워는 지배하지 않고 사랑한다.
5. 여기서 이런 기준으로 문제 제기는 시드니 성시화 공동체다!!
1)성시화 모임은 가졌으나 특정 이념으로 전락했다(고전1:12~13)
2)성시화 모임은 기도는 했으나 책임을 지지 않았다(마23:2~3)
3)성시화 모임은 예배는 드렸으나 거룩함을 독점했다(레10 장; 마27:51)
4)성시화 모임은 전도는 했으나 사랑으로 섬기지 않았다(빌2:5~11)
5)성시화 모임은 친교는 했으나 줄 세워 갈라섰다.(롬14:2~4)
6)성시화 모임은 운동은 했으나 지배의 주체가 되었다(벧전5:2~3).
6. 시드니 성시화모임이 로마서 16:2–4; 23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뵈뵈를 이렇게 추천한다. “주 안에서 성도답게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요긴한 바를 도와주라. 그는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prostatis)가 되었음이라.”(로마사16:2)
이어지는 3–4절에서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가리켜 말한다.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특징을 목격한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개인적 도움을 결코 사적으로 소유하지 않고 ‘여러 사람’, ‘모든 교회’라는 언어로 확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다. 이는 교회의 명예 구조를 재편하는 의도적 수사다. 바울은 사도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지탱해 준 사람들을 교회의 중심으로 세운다. 이 지점에서 바울은 식객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신학 행위를 수행한다.
‘식주인으로 모시는 교회 공동체’라는 바울의 정치성을 로마서 16장은 종종 “개인적 인사 목록”으로 한국교회는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로마서 16장은 교회의 구조, 권위의 방향, 공동체의 정치성을 드러내는 결정적 장이다.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교회 공동체는 사도가 소유하지 않는다. 교회는 직분자가 지배하지 않는다. 교회는 집을 열고, 생명을 내어주고, 공동체를 감당한 사람들 위에 서 있다. 이때‘식주인’은 권력자가 아니라 자리를 내어주는 사람이며,‘보호자(prostatis)’는 지배자가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는 돌봄의 주체다.
7. 바울 vs 오늘의 한국교회 목회자상은 무엇일까?
바울은 이렇게 행동한다. 자신의 사도적 명성을 → 타인의 헌신을 드러내는 데 사용했고, 자신의 생존을 가능케 한 이들을 → 교회의 공적 기억 속에 새겼다.
반면 오늘의 한국교회는 종종 성도의 헌신을 개인의 충성도로 축소했고 교회의 성과를 목회자의 리더십 브랜드로 전유했으며 비판을 “영적 공격”으로 몰아낸다. 이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 사용 방식의 문제다.
8. 한국교회의 회복의 방향은 결국 다시 ‘식주인’에서‘식객’이 되는 목회자와 교회 공동체다.
로마서 16장은 한국교회에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의 집에 빚지고 있는가? 당신의 사역은 누구의 위험 위에 서 있는가? 당신은 그 이름들을 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가? 교회가 회복되려면 목회자는 다시 식객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해석을 독점하지 않고 정치적 확신을 복음으로 포장하지 않으며 성도를 동원이 아니라 동반자로 대할 때 교회 공동체는 다시 새로운 교회 공동체가 된다.
9. 이제 한국 목회자와 교회 공동체를 향한 성서의 질문이 있다. 강단은 누구를 판단하는 자리가 되었는가? 설교는 복음을 선포하는가, 이데올로기를 동원하는가? 교회는 하나님을 증언하는가, 자신의 불안을 정당화하는가? 바울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 (로마서 14:2–4)
10. 한국교회 공동체와 목회자가 회복을 위한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거창한 개혁 구호가 아니다. 판단을 멈추고 환대를 회복하는 것, 사적 확신을 공적 폭력으로 만들지 않는 것, 성서를 이데올로기의 무기로 쓰지 않는 것, 목회자가 먼저 식객이 되는 것, 그때 교회는 극우도, 극좌도 아닌 복음의 느린 진리와 윤리를 다시 배울 수 있다.
나오는 말
로마서 14장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옳은 편에 서라.”대신 이렇게 말한다.“서로를 모시라.”이렇게 교회가 다시 식탁으로 돌아올 때, 한국 목회자와 교회 공동체는 비로소 분열을 멈추고, 이단의 토양을 잃고, 정치보다 깊은 복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길은 언제나 겸손, 섬김, 사랑이라는 식주인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20260301 교회 서재에서 匍越의 [목회단상] 중에서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