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은사보다 큰 길 (고린도전서 13:1-13)
「사랑은 교회의 존재 이유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본문을 결혼식장에서 듣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를 낭독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본문은
결혼식장에서 태어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갈등과 경쟁과 분열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지금으로 말하면 매우 성공한 교회였습니다.
은사가 넘쳤습니다.
열정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체험도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비교하는 존재입니다.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
누가 더 많이 아는가.
누가 더 많이 인정받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며 살아갑니다.
철학자들은 인간을 “사회적 존재”라고 불렀지만
어쩌면 인간은 “비교하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랬습니다.
어떤 이는 방언을 자랑했습니다.
어떤 이는 예언을 자랑했습니다.
어떤 이는 지식을 자랑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내세웠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는데
사람들은 그 선물을 경쟁의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누가 더 큰 교회인가.
누가 더 좋은 설교를 하는가.
누가 더 많은 성경지식을 가졌는가.
누가 더 많이 봉사하는가.
누가 더 영적인가.
우리는 여전히 은사로 서열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1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이 말씀은 단순한 경고가 아닙니다.
존재에 대한 선언입니다.
사랑 없는 능력은 소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능력을 숭배합니다.
우리는 능력이 세상을 바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歷史)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랑 없는 능력은 폭력이 되었습니다.
사랑 없는 지식은 억압이 되었습니다.
사랑 없는 종교는 광신이 되었습니다.
사랑 없는 정의는 또 다른 불의가 되었습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능력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은사를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은사를 절대화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은사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태양은 스스로를 위해 빛나지 않습니다.
가로등은 스스로를 위해 길을 밝혀주지 않습니다
강은 자신을 위해 흐르지 않습니다.
나무는 자신을 위해 열매 맺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은 자기 밖을 향해 존재합니다.
사랑도 그렇습니다.
사랑은 자신을 향해 닫히지 않습니다.
사랑은 타인을 향해 흐릅니다.
그래서 사랑은 존재의 가장 깊은 법칙입니다.
바울은 사랑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사랑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사랑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배신당해도 참으셨습니다.
욕을 먹어도 참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참으셨습니다.
세상은 강한 사람을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승자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사랑한 사람을 기억합니다.
바울은 갑자기 어린아이 이야기를 합니다.
(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왜 이 말을 했을까요?
고린도 교회가 영적으로 미성숙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무엇이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관계를 생각합니다.
사랑은 성숙의 다른 이름입니다.
신앙의 성숙은 지식의 증가가 아닙니다.
사랑의 확장입니다.
사회학자들은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가치를 존재가 아니라 성과로 판단합니다.
무엇을 했는가.
얼마나 성공했는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질문을 하십니다.
얼마나 사랑했는가?
얼마나 품었는가?
얼마나 함께 울었는가?
예언도 끝날 것입니다.
방언도 끝날 것입니다.
지식도 끝날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던 모든 것들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남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4장16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성경은 하나님이 능력이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식이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이 사랑 그 자체라는 겁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해 갑니다.
소망도 하나님을 향해 갑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믿음은 우리의 손입니다.
소망은 우리의 눈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의 심장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가장 큽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이 오면 믿음은 보게 될 것입니다.
소망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때 비로소 완전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 속에서도 사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창조세계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마지막 질문은
“얼마나 많이 알았는가?”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은사를 받았는가?”도 아닙니다.
“얼마나 사랑했는가?”입니다.
우리가 남기는 것은 업적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우리가 기억되는 이유도 성공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랑 때문에 존재합니다.
예언도 사랑 때문에 존재합니다.
설교도 사랑 때문에 존재합니다.
봉사도 사랑 때문에 존재합니다.
신학도 사랑 때문에 존재합니다.
만약 사랑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여전히 종교를 가질 수는 있지만
복음은 잃어버리게 됩니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저서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에서
성숙한 사랑의 4대 요소, 즉
성숙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보호(관심), 책임(나의 일처럼), 존경(있는그대러 봐주는 것), 지식(겉모습이 아니라 속까지 알려고 하는 것)이라는 4가지
기본 요소가 필수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의 은사는 누구를 살리고 있는가?”]
그리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그 사랑 안에서 교회는 교회가 됩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미리 살아갑니다.
믿음도 소망도 귀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