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종교의 형식에서 생명의 성령으로
(네번째 사순절 / 이사야 58:1–12 / 로마서 8장 연결)
[예배의 부름 초대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또 하나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단지 우리의 입술의 노래나
형식적인 경건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깨어나는 생명의 떨림을 찾으십니다.
예언자는 외쳤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이것이 아니냐.” (사 58:6)
하나님은 제단의 향기보다
굶주린 이웃의 식탁을 더 사랑하시며,
긴 기도의 언어보다
상처 입은 사람을 향한
따뜻한 손길을 더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종교의 형식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들로 초대받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마음을 열어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맞이합시다.
[설교의 부름 초대글]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인간의 깊은 잠을 깨우는
거룩한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의 신앙은 무엇인가?”
“너희의 금식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적 열심보다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생명의 빛을 바라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잠시 멈추고
말씀 앞에 조용히 서십시오.
그 말씀 속에서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듣게 될 것입니다.
1. 예배로 부름받은 인간의 질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이사야 본문으로 설교할 때 마다 늘 말씀 드리지만
이사야는 3부분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1) 제1이사야(1-39장/ 예루살렘 이사야)
2) 제 2이사야(40-55장/ 바벨론 포로 이사야)
3) 제 3이사야(56-66장/ 바벨론 포로 후기 이사야)
그래서 이사야서 전체는
이스라엘 200년 역사가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8장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후(기원전 6–5세기)
예루살렘 공동체를 배경으로 합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기대와 달리
이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세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성전이 회복되면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이다
율법을 지키면 민족이 번영할 것이다
금식과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습니다.
세계 곳곳 죽음의 전쟁터
경제적 빈곤
빈부의 양극화
사회적 계층 분화
권력층의 착취
종교 엘리트들의 형식주의
그래서 백성들은 이렇게 불평합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나이까?” (58:3)
이 질문은 단순한 신앙적 질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학적 위기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가?”
예언자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너희의 종교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자기 정당화였습니다.
예언자는 외칩니다.
“목소리를 높여 나팔같이 외쳐라.”
이 외침은 단순한 설교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를 향한 신학적 심판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본문 앞에 서 있습니다.
한 본문은 예언자의 외침입니다.
다른 한 본문은 사도의 깊은 신학입니다.
한 곳에서는 하나님이 외치십니다.
“목소리를 높여 나팔 같이 외치라.” (사 58:1)
다른 곳에서는 사도 바울이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롬 8:1)
이 두 목소리는 서로 다른 시대에서 들려오지만
결국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신앙은 무엇인가?”
종교적 행위인가?
아니면 새로운 생명인가?
이 질문은 단순한 교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문제입니다.
2. 종교의 역설
“우리가 금식했는데 왜 하나님은 보지 않으십니까?”
이사야 58장에서 백성들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스스로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시나이까” (사 58:3)
이 질문은 신앙의 위기입니다.
그들은 금식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예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대답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너희 모든 노동자를 압제하는도다.” (사 58:3)
인간은 종종 종교를 통해
하나님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신을 도구화하는 종교입니다
이런 종교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위중심/ 의식중심/ 공로중심/입니다
성서의 하나님은 이런 종교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성령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다”
신앙은 법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한국교회는 매우 종교적입니다
새벽기도/ 금식기도/ 헌금/ 전도운동/성시화운동/
그러나 이사야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 종교가 인간을 살리는가?”
이사야 58장의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왜, 교회는 많아졌는데
사회는 더 불평등해졌는가?
왜, 기도는 많아졌는데
정의는 사라졌는가?
왜, 예배는 커졌는데
사랑은 작아졌는가?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금식하는 날에 노동자를 압제하는도다”
이 경고는 오늘에도 울립니다
교회 안에서 권력/ 위계/ 성공주의가 작동하면
그 종교는 이미 이사야가 비판했던 종교입니다.
역사 속에서 종교는 종종
권력/ 차별/ 이념/ 을 정당화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종교는 다릅니다
성령은 생명을 확장시키는 힘입니다
(인간의 존엄/평등/자유)
성령은 인간을 자유롭게 합니다
성령은 억압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명령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요구하지 않습니다
백성들은 금식하지만 동시에
다툼/ 포력/ 착취를 행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에는 열심이 있었지만
그들의 삶에는 정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노동자를 착취했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이웃을 억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합니다.
“이것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사 58:5)
여기서 우리는 성서의 매우 급진적인 신학을 만납니다.
여기서 예언자는 종교적 아이러니를 사용합니다
그들은 겸손한 척하지만
사실은 종교적 퍼포먼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그 모습을 이렇게 풍자합니다
“갈때처럼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바르는 것”.
이것은 겸손의 연극적 퍼포먼스입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열심보다
인간의 생명(존엄/평등/자유)을 먼저 보십니다.
3. 참된 금식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하나님은 참된 금식을 다시 정의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이것이 아니냐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6)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사 58:7)
참된 금식은 종교 행위가 아니라
사회적 정의입니다.
참된 금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는 것
— 멍에를 끊는 것
— 압제받는 자를 자유케 하는 것
— 굶주린 자에게 떡을 나누는 것
— 집 없는 자를 집에 들이는 것
— 헐벗은 자를 입히는 것
이것은 예배가 아니라
삶 자체가 예배가 되는 신학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윤리적 권면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은 종교의 형식이 아니라
생명의 회복입니다.
본회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름은 곧 죽으라는 부름이다”
본회퍼는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사형당했습니다
본회퍼는 말합니다
“교회는 고통받는 하나님을 섬긴다”
변선환 교수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4. 바울의 선언
“생명의 성령의 법”
이제 우리는 로마서 8장으로 갑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종교적 노력의 한계를 말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셨다.” (롬 8:3)
율법은 거룩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언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 (롬 8:2)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사건이 아닙니다.
복음은 존재의 해방입니다.
5. 성령의 삶
바울은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롬 8:6)
여기서 육신은 단순한 육체가 아닙니다.
성서학자 James D. G. Dunn은
이 구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육신’은 자기 중심적 존재 구조입니다.
즉 인간이 자기 욕망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삶은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 안에서 흐르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삶은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유/ 사랑/ 정의/ 평화/ 평등/ 존엄……etc
이것은 바로 이사야가 말한 참된 금식입니다.
6.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
독일 신학자 Dietrich Bonhoeffer는
교회를 향해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값싼 은혜는 교회의 치명적인 적이다.”
그가 말한 값싼 은혜는 이것입니다.
회개 없는 용서
제자도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기독교
사람은 교회에 갑니다.
설교를 듣습니다.
죄 사함을 선포받습니다.
그러나 삶은 변하지 않습니다.
본회퍼는 말합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종교적 착각이다.
반대로 값비싼 은혜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삶
자기 부인의 길
정의를 위한 희생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평안한 신앙인가요?
아니면 십자가의 신앙인가요?
7. 우리는 철학적 질문이 있습니다
인간은 왜 종교적 위선에 빠질까요?
철학자 Friedrich Nietzsche는
종교의 위선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종교가 때때로
도덕적 위장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또한 심리학자 Sigmund Freud는
종교가 인간의 죄책감을 완화하는
심리적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종교를 통해
자기 양심을 위로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종종
예배로 죄책감을 덮고
기도로 불의를 가리고
종교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합니다.
이사야 58장은
바로 이런 종교적 자기기만을 폭로합니다.
사람은 종교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합니다.
종교적 행위는 종종
양심을 마취하는 기능을 합니다.
금식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경건하다.”
“나는 거룩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탐욕/ 폭력/ 착취가 계속됩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서는 인지 부조화라고 합니다.
즉
행동과 신념이 충돌할 때
사람은 자기합리화를 합니다.
예언자는 이 심리적 구조를 폭로합니다.
“너희는 금식하면서 싸우고 다투는도다.”
이것은 인간의 깊은 종교 심리를 드러냅니다.
종교는 인간을 거룩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가장 위험한 위선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58장은 성서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신학을 제시합니다.
“종교는 정의와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진정한 신앙은
— 의식이 아니라 관계
— 종교가 아니라 사랑
— 금식이 아니라 해방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때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다.”
이 빛은 단순한 축복이 아닙니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의 빛입니다.
참된 신앙은
—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 공동체를 치유하며
— 역사를 새롭게 합니다.
8. 성령이 만드는 새로운 인간
그래서
복음은 단순한 비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놀라운 희망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롬 8:9)
성령은 인간을 새로운 존재로 만듭니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면
탐욕은 나눔으로 변합니다.
폭력은 평화로 변합니다.
두려움은 자유로 변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말한 약속입니다.
“그때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사 58:8)
이제 하나님은 약속합니다.
참된 정의가 이루어지면?
— 빛이 새벽같이 비치고
— 상처가 치유되고
— 하나님이 앞뒤에서 보호하고
— 폐허가 다시 세워질 것이다.
이 구조는 윤리 → 회복 → 새 창조의 구조입니다.
9. 주님은 오늘 교회를 향한 질문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말씀은 제일 먼저 우리 교회에게 질문 합니다.
시드니 성시화 모임
시드니 교역자 모임
시드니 모든 신앙 공통체에게 질문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종교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살고 있습니까?
교회는 커졌지만
세상은 더 불평등해졌습니다.
예배는 많아졌지만
사랑은 줄어들었습니다.
기도는 많아졌지만
정의는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묻습니다.
“이것이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예배겠느냐?
모임이겠느냐?
전도이겠느냐?
선교이겠느냐?
10. 복음은 약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롬 8:1)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성령은 인간의 깊은 곳에서
새로운 생명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인간의 마음 속에서
빛이 떠오릅니다.
이사야는 그 순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네 빛이 새벽같이 비칠 것이다.”
11. 오늘 주님이 선포하신 말씀은
하나님은 화려한 종교를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크기나 숫자를 찾지 않으십니다.
오늘 제 3 이사야의 하나님은
굶주린 사람의 식탁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오늘 제3 이사야의 하나님은
헐벗은 사람의 옷 속에서 거룩을 보십니다.
오늘 제 3 이사야의 하나님은
억압받는 사람의 해방 속에서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오늘도 인간의 깊은 곳에서 속삭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새로운 존재다.”
그때 인간의 마음 속에서
빛이 새벽처럼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신앙은
종교의 형식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생명(존엄/평등/자유)이라는 것을…
아멘.
내려놓음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
(다섯 번째 사순절 / 빌립보서 2:1–11)
[예배의 부름 초대글]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존재는 무엇으로 완성되는가?
생명은 무엇으로 빛나는가?
우리는 오랫동안
더 가지는 것을 삶이라 배워왔고
더 높아지는 것을 영광이라 믿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전혀 다른 길을 가리킵니다.
스스로 비우시고
자신을 내어주시며
타자의 생명 속으로 흘러 들어가신
자기비움 (Kenosis)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그 신비한 사랑의 길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기를 증명하려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타자를 향해 열린 존재로 서십시오.
두려움 대신 사랑으로
소유 대신 나눔으로
지배 대신 섬김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갑시다.
오늘 이 예배는
우리가 무엇을 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다시 배우는 시간입니다.
[설교의 부름 초대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우리 존재를 흔드는 부르심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그러나 이 마음은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윤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존재의 새로운 방식입니다.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지금
나를 지키기 위해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내어주기 위해 살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숨을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넘어
우리의 존재를 부르십니다.
자기를 움켜쥐는 삶에서
자기를 내어주는 삶으로
닫힌 자아에서 열린 존재로
이제 그 부르심 앞에
조용히, 그러나 깊이
우리 자신을 내어맡깁시다.
그리고 들읍시다.
십자가의 침묵 속에서 울려 나오는
하나님의 가장 깊은 언어를.
“사랑은, 자신을 주는 것이다.”
Ⅰ. 들어가는 말: 사순절의 마지막 질문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우리는 지금 사순절의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시간은 단순히 절기를 지나는 시간이 아니라
존재를 묻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이렇게 질문해 왔습니다.
나는 얼마나 기도했는가
나는 얼마나 내려놓았는가
나는 얼마나 순종했는가
그러나 오늘 성서 본문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Ⅱ. 본문: 그리스도의 마음
빌립보서는 로마 감옥에 있던
바울이 마케도니아의 로마 식민 도시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빌립보는 로마 제국의 군사 식민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의 공기는 로마 황제 숭배와 권력 질서로
가득했습니다.
로마 세계의 가치는 위계의 통치/ 명예 경쟁/
권력의 통치/ 자기 과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세계의 질서 한가운데서
완전히 다른 존재의 패러다임을 선언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빌 2:6–7)
여기서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
케노시스 (Kenosis)입니다.
케노시스는 단순한 겸손이 아닙니다.
권력의 방식 자체를 뒤집는 존재론적 사건입니다.
로마 황제는 자기를 높임으로 신이 되었지만,
그리스도는 자기를 비움으로 주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의 전환을 요구하는 선언입니다.
신앙공동체인 교회는 권력의 피라미드가 아니라
자기 비움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2:7)
자기비움 (Kenosis)입니다.
이 선언은 윤리적 권면이 아닙니다.
존재론의 혁명입니다.
케노시스는 세 가지 차원을 가집니다.
1)존재론적 차원입니다
존재는 자기 보존이 아니라 자기 증여입니다.
2)관계적 차원입니다
자기 비움은 타자를 향한 열림입니다.
3) 정치신학적 차원입니다
권력은 지배가 아니라 섬김입니다.
이런 점에서 케노시스는
로마 제국의 권력 질서에 대한 급진적 비판입니다.
Ⅲ. 케노시스: 비움이 아니라 존재 방식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이 “비움”을 우리는 너무 쉽게 이렇게 이해합니다.
내려놓아라/ 포기하라/ 욕심을 버려라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케노시스는
자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타자에게 개방하는 것입니다 (武裝解除).
자기를 타자에게 내어주는 존재 방식입니다.
1. 존재의 두 길
인간은 두 가지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첫째, 자기 보존의 길
둘째, 자기 증여의 길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더 가져라
더 높아져라
더 강해져라
그러나 십자가는 말합니다.
“내어주어라.”
Ⅳ. 로마 제국과 케노시스 관계
이 본문은 단순한 개인 영성이 아닙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제가 주님이다
힘이 진리다
지배가 질서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는 주다.”
이 선언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로마 권력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1. 거꾸로 된 세계
빌립보서 2:1–11 은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깊은
신학적 시(詩) 가운데 하나입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6–11절을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 찬가 (Christ Hymn)라고 보며,
사도바울이 공동체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이 찬가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 본문은 단순한 윤리적 권면이 아니라
존재론 (ontology), 권력의 전복, 인간의 자기 이해를
동시에 드러내는 신학적 본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찬가인 빌립보서 2:6–11 은 두 개의
거대한 움직임을 가진 하강과 상승의 시입니다.
① 하강 (6–8 절)의 구조입니다
신적 존재→인간->종->십자가의 죽음입니다.
② 상승 (9–11 절)의 구조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높임->모든 이름 위의 이름->
모든 무릎이 굻음->모든 혀가 고백하는 형식입니다.
이 구조는 십자가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패배처럼 보이지만
실은 존재의 진정한 높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서의 장면을 떠올립니다.
“자기 생명을 잃는 자가 얻는다.”(막 8:35)
즉 낮아짐이 높아짐입니다.
이 문학적 구조는 인간 문명의 가치 체계를
완전히 전복합니다.
로마의 세계는 이렇게 올라갑니다.
힘 → 명예 → 권력 → 신성 (로마황제)
그러나 그리스도의 길은 이렇게 내려갑니다.
하나님 → 인간 → 종 → 십자가
이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계의 구조를 뒤집는 사건입니다.
Ⅴ. 한국교회의 “내려놓음”에 대한 질문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솔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이용규 선교사의 저서 “내려놓음”있습니다.
“내려놓음”과 “자기비움”은 분명 다른 겁니다.
우리가 말하는 “내려놓음”은
과연 성서적일까요?
1. 내려놓음의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내려놓아야 합니다.
집착/ 욕망/ 통제/ 이런것들은 우리를 묶어 놓습니다.
2. 그러나 내려놓음의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려놓음은 때때로
다음과 같이 변질됩니다.
책임 회피/ 현실 회피/ 자기 억압
이때 내려놓음은 케노시스가 아니라
존재의 위축이 될 수 있습니다.
Ⅵ. 심리학적 통찰: 자아의 문제
프로이드(Freud)는 말합니다.
“자아는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다.”
이드/ 에고/ 슈퍼에고에서
에고 (자아)는 이드와 슈퍼에고 사이
갈등하는 존재, 분열된 존재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불안하고 두려우면,
우리는 두 가지 극단적인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1. 과잉 자아입니다
지배하려고 하고/ 통제하려고 하고
인정받으려 합니다.
—-죽음의 정치—
“우리에게는 포로가 없다”(국방부장관)
“우리의 전쟁은 게임이다”(트럼프)
(로마황제/트럼프/네타냐후/김정은/윤석열)
2. 붕괴된 자아입니다
포기하려고 하고/ 회피하려고 하고
자신을 지웁니다 (중독, 자해, 자살).
그러나 케노시스는 이 둘이 아닙니다.
케노시스는 성숙한 자아 (에고)가
자신을 타자에게 내어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안하기 때문에
자기를 과장하고/ 권력을 붙잡고
타인을 지배하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자아를 지키려 하지 말라.
자아를 비워라.
여기서 케노시스는 자아의 파괴가 아니라
자아의 완성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비움 속에서
인간은 처음으로 타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자기 비움은
공감하여->관계를 맺고->인격적인 공동체를 이룹니다
즉 케노시스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Ⅶ. 철학적 사유에서 존재는 무엇인가?
하이데거는 말합니다.
인간은 “세계-내-존재”이다.
유명한 명제 하나를 제시합니다.
현존재가 더 이상 내재적인 주관성에 갇혀 있는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바깥 세계 에 열려져 있으며
세계 속에 있는 모든 사물 (모든 도구와 인간)들과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여기서 존재의 역설이 있습니다.
존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살 수 있습니다.
자기 확장 (power)이냐 아니면
자기 비움 (love)이냐 입니다.
인류 역사는 대부분 권력의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말합니다.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은
권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존재 철학자
하이데거의 질문으로 묻습니다.
“존재는 무엇인가?”
바울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존재는 자신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존재는 사랑의 존재론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존재는 무엇입니까?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를 주는 것입니까?
십자가는 대답합니다.
‘존재는 자기 증여 (贈與)다.’
호주 메디케어 (Medicare) 엡/ ‘신체 증여’
저는 이 설교를 선포하기 위해
신체 전부를 실험용으로 호주정부에 증여했습니다
신체증여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증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인격과 존엄과 평등과 자유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신체증여를 넘어
자기증여까지 나아가신 분입니다.
Ⅷ. 교회 신앙 공동체:
새로운 인간의 탄생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개인에게만 말하지 않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라” (2:4)
이것은 공동체 선언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아름다운 교회였지만
갈등도 존재했습니다.
빌립보서 4 장에서
바울은 두 지도자를 언급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두 지도자 사이의 갈등이
빌립보 공동체 긴장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말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 (2:3)
사회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권력 경쟁을 중단하라는 선언입니다.
고대 로마사회는 명예 경쟁 문화였습니다.
누가 더 높은가?
누가 더 존경받는가?
누가 더 힘 있고, 영향력 있는가?
바울은 말합니다.
“그 문화에서 나와라.”
교회의 중심 원리는 이것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 (2:4)
이것은 공동체를 유지하는 관계적 존재론입니다.
인간은 경쟁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돌봄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 신앙공동체입니다.
1. 교회는 무엇인가요?
교회는 경건한 개인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교회는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입니다.
2. 새로운 인간 탄생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이것은 단순한 명령이나 요구가 아닙니다.
로마 황제의 마음이 아니라
(통제/억압/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생명/존엄과 평등과 자유를 나눕니다)
새로운 인간의 탄생입니다.
Ⅸ. 십자가는 케노시스의 완성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2:8)
십자가는 실패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존재의 완성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사랑이 완전히 드러났고
자기 증여가 완전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요 19:30)
세상은 말합니다.
높아져라!
지배하라!
이겨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말합니다.
비워라
섬겨라
내려가라
이것이 케노시스의 길입니다.
Ⅹ.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 내려놓음을 넘어서십시오
단순히 포기하지 마십시오.
단순히 비우지 마십시오.
자신을 내어주십시오.
2. 진실한 관계로 들어가십시오
고통을 피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피하지 마십시오.
타자의 삶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이것이 성육신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이것을 완성한 사건입니다.
3. 사랑의 존재가 되십시오
존재는 높이 쌓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는 주는 것입니다.
결론: 사순절의 끝자리에서
메타 인지를 통해 자기 객관화가 필요합니다.
메타인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능력)를 통해
자기 객관화 (나의 상태를 파악)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높아지려 애쓰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명예를,
더 많은 인정과 권력을 얻기 위해
끝없이 서로를 밀어내며 올라갑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신 하나님
왕의 자리에서 종의 자리로 내려오신 하나님
영광에서 고통 속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그 낮아짐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늘의 높이를 봅니다.
참된 높이는
남을 짖밟고 올라가는 곳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 속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존재의 빛입니다.
사순절의 끝자리에서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더 가지려 하는가?’
아니면 ‘무엇을 내어주려 하는가?’
높아지려는 인간의 길 위에
한 사람이 거꾸로 걸어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려왔고
더 내려왔고
끝내 십자가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그 낮아짐 속에서
하늘이 열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존재의 진짜 높이는
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내어주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습니다. 아멘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