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05)
리처드 프랭크(딕) 우튼 목사 (1933. 6. 13)
한국명: 우택인 목사, 서울 1964-69
딕(리처드)은 장로교 가정에서 자랐다. 그는 면허를 가진 배관기술자였고, 난방, 용접, 에어컨디션 설비의 전문가였다. 1958년 리처드는 목회후보생이 되었고 발라랏, 매클레오드(Macleod), 멜번에서 국내선교사역을 수행했고, 멜번대학과 오몬드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그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지원했고 한국에 임명되었다. 올 세인트 칼리지에서 선교훈련 과정을 마친 후, 그와 베티(Betty), 그들의 세 자녀 피터, 자넷, 마크는 한국으로 항해했고, 그들은 1964년 7월 초에 도착했다. 그들은 마산에서 언어공부를 시작했다. 그후 그들은 서울로 이사하였고,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공부했다.
언어과정을 마친 후 리처드는 예장의 영등포산업선교에서 조지송 목사와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이로써 호주선교회와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사이에 40년간의 협력의 시기가 시작되었다.
우튼은 산업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에 높은 우선권을 두었다. 산업선교는 기독교장로회와 감리교회의 비슷한 프로그램들과 협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영등포 프로그램의 장점들 중에 하나는 영락교회로부터 오는 지원이었다. 또한 그것은 많은 장로교 목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영등포산선은 장로회 신학대학과 관계를 발전시켰고, 선발된 신학생들에게 일정기간 공장에서 노동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도시산업선교회의 기초를 배우게 했다.
딕은 홍콩, 일본의 산업선교 활동, 필리핀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프로그램들을 방문했다. 그는 평신도들이 기독교 선교와 아시아 개발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리처드가 한국에 기여한 중요한 공헌들 중에 하나는 병원들과 다른 기관들을 건축할 때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딕은 한국에 있는 동안 노동자들, 정치적 양심수들과 만나고, 민중신학과 한국인들의 기도생활을 통해 인생이 변화되는 경험을 하였다.
그는 자신이 호주로 돌아온 이후 한국과 한국교회를 위해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리처드는 선교위원회의 인권총무로서 그리고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와 세계교회협의회 국제관계위원회(WCC-CCIA)의 위원으로서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투쟁을 강력하게 지원했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차례의 북한방문과 출판을 통해 그는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의 대화들을 강경하게 지원했다. 그는 12년 동안 매주 멜번의 한인교회에서 영어사용자를 위해 목회를 했다. 그는 멜본한인교회과 연합교회 시노드 사이에서 교회재산의 발전 문제를 포함하여 중요한 연결 역할을 해왔고, 목회자들, 평신도들과 한국전쟁 베테랑들에게 상담자가 되었다.
2000년, 리처드는 한국, 팔레스타인, 타밀, 남아프리카, 그리고 여러 나라들에서 인권에 기여한 공로로 호주정부로부터 호주훈장(AM: Member of the Order of Australia)을 수여받았다.
정병준 교수
(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