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19)
넬리 R. 스콜스(1881-1919. 4. 14)
한국명: 시원(柴園) 교장, 진주 1907-19
넬리 스콜스는 아버지가 학교 교장으로 있었던 빅토리아, 칠턴(Chiltern)의 미들 인디고(Middle Indigo)에서 1881년에 태어났다. 넬리는 학교를 마치고 아버지의 학교에서 견습 교사훈련을 받았다. 그녀는 해외선교사역에 흥미를 가기게 되었는데, 커를 부부가 한국으로 갔을 때 정기적으로 에델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스스로 그곳을 섬기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기로 결심하였다.
스콜스는 여성훈련소에서 1년의 준비를 마쳤고, 1907년 2월 27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즉시 언어공부를 시작했는데 우수함을 보였다 그녀는 진주로 배속되었고 10월에 그녀와 메리 켈리는 진주에 도착했다.
켈리와 커를 부인이 그곳의 여성들을 가르친 반면, 스콜스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커를 가족은 1908년 10월 휴가를 떠났고 두 사람만이 남았다. 1909년 2월 말에, 진주의 학교와 교회는 터져나갈 듯 사람들로 꽉 들어찼고, 한동안 매주 두 번의 예배를 드려야만 했다. 처음에는 여자들과 소녀들이 그리고 두 번째는 남자들과 소년들이 예배를 드렸다. 그 다음 교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 당시 한국에서 백정들은 멸시받는 계층이었다. 진주에서 백정 가족들의 일부가 예수를 믿고 예배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수의 양반들은 즉시 교회를 떠났고 천한 계층인 백정들과 같은 교회 안에서 앉기를 거부하였다. 그해 4월 데이비드 라이얼(David Lyall)이 진주에 도착했으나 그는 아직 한국어를 전혀 말할 수가 없었다. 비록 라이얼이 조언을 하였지만, 갈라진 교인들을 중재할 책임은 이 두 여자 선교사들에게 주어졌다. 켈리는 한국에 온지 4년째였고 스콜스는 2년째였다. 그들은 확고하고 끈기가 있었다. 그들은 타협을 거부했다. 결국 그 백정들은 수주일 동안 교회에서 물러나겠다고 제안했고 양반들은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양반들은 이러한 호의에 감격하여 “아니오, 당신들도 교회로 돌아오시오 우리도 참석할 것이오. 우리 함께 예배드립시다.”라고 응답했다. 그래서 이 두 여선교사들은 경남의 중심지에서 이 계층 장벽을 무너뜨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PWMU와 해외선교위원회는 교회의 위기를 잘 해결한 두 여성의 공로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시했다.
그 후 스콜스는 진주여학교를 운영하면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휴가를 마친 커를 가족이 3월에 돌아온 후에, 스콜스는 여자소학교의 책임을 맡았고, 주일학교, 저녁 공부반, 진주의 연례 여성사경회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또한 여러 번 시골 순회여행을 수행했다.
새로 건축한 학교는 1911년 5월 50일에 개교했다. 1913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스콜스는 여성 순회선교사 자리를 맡았고 시골 중심지들을 방문했다. 비록 육체적으로 힘이 들었지만 그녀는 순회 전도자의 일과 공부반을 굉장히 즐거워했다. 그러나 그녀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심장의 문제가 지속적인 시골 사역을 그만두게 했다.
결국 캠블이 순회사역의 책임을 대신 맡았고, 넬리 스콜스는 학교로 돌아가서 2년 반 동안 학교를 운영했고, 동시에 진주의 여성 반들과 여자 주일학교에서 가르쳤다.
1917년 후반 남동생이 프랑스 전선에서 전사하였을 때 스콜스는 더 큰 좌절을 겪었다. 그녀는 1918년의 상반기를 어렵게 보냈고, 7월에 휴가를 떠났다. 이러한 여러 달 동안 한국의 친구들은 그녀에게 큰 사랑을 쏟아 부었다. 그녀는 호주에서 휴식을 취했고, 정성스런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독감과 기관지염에 걸려 1919년 4월 14일에 사망했다.
선교회는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그녀의 생애는 이 나라에서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아낌없이 드려졌다 … 그녀에게는 상냥함, 지혜, 재치와 인내가 발견된다. 그녀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들 중에서 대부분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녀의 동료는 이렇게 기록했다.
“어떤 말로도 한 생애에 대해 완벽한 묘사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따뜻한, 그의 순결함으로 순결한 이 인물의 향기와 매력을 말로 전달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진주의 여학교는 스콜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시원(柴園)여학교”1라고 명명했고 멜번의 디커니스 훈련소와 결연을 맺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