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33)
제임스 톰슨 켈리 목사 (1877. 9.23-1959. 1. 5)
한국명: 길아각(吉雅各) 목사, 진주 1912-13; 거창 1913-18
제임스 켈리는 스코틀랜드 덤바턴(Dumbarton)에서 태어났고 덤바톤 아카데미와 글래스고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존 타이트 목사의 영향 아래서 그는 교회, YMCA 그리고 파운드리 소년소녀회 (Foundry Boys’ and Girls’ Society)에서 열심히 봉사했다. 그는 연합자유교회(the United Free Church)의 선교잡지에서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가 선교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을 읽은 후, 자원하여 칼구를리(Kalgoorlie)의 알렉스 크로우 목사(Rev. Alex Crow)를 돕는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1년 동안 골드필드(Gold field)에서 일했고 멜번에 가서 오몬드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도시 근교 선교지에서 일했다. 그는 신학공부를 마친 후 크랜번(Cranbourne)에서 초빙을 받았고 2년 8개월 동안 매우 성공적인 목회를 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로티 앤더슨(Miss Lottie Anderson)과 결혼했다. 그는 한국의 요청이 그를 감동시켰고 그는 자원하였고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켈리 부부는 왓슨 목사와 나피어 간호사와 함께 9월 25일에 시드니를 출발하여 1912년 10월 30일 한국에 도착했다. 며칠 후 그는 부산의 나환자요양소의 예배에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세례와 성만찬의 성례가 나환자 회중들이 참여한 가운데 집례되었다. 한센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섬기는 전반적인 경험은 통해 켈리는 크게 감동을 받았다.
켈리 부부는 곧 진주로 떠나 1912년 11월 5일 경에 도착했다. 1912년 선교협의회는 그들을 거창으로 배치했다. 그러나 그들은 새 공관이 건축되는 동안 한국어를 공부하며 진주에 머물러 있었다. 켈리 목사는 진주에서 주일학교를 설립했고, 한 인근 마을에 저녁공부반을 설립했다. 그리고 켈리부인은 여 선교사들과 함께 몇차례의 순회여행을 수행했고, 진주교회의 예배를 위해 오르간을 반주하였다.
1913년 6월 13일 선교지부가 개척되면서 켈리 가족과 매크래이 목사는 거창으로 갔다. 1914년 부활절에 켈리 부인은 데이비드를 낳았다. 그후 4년 동안 그들은 거창과 인근 지역에서 심방하고, 가르치고, 지도력을 훈련시키는 일에 열심을 다했다. 거창시의 교회는 번성했으나 마을 교회들은 거의 자라지 못했다. 문맹, 전통종교로 돌아오라는 이웃들의 압력, 그리고 가난은 이러한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마을 교회들의 발전을 느리게 만들었다.
1914-18년까지 켈리는 거창 안의 교회들, 즉 안의 함양, 합천 지역의 교회들을 돌보는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꾸준하게 순회하였다. 주일학교 공부 반들 외에도 주일학교 교사들을 훈련시키는 공부 반들, 교인들 공부 반들, 지도자 성경공부반, 한 주간이 걸리는 남녀 각각의 연례 사경회들이 있었다.
캘리 부부는 1918년 5월 어린 아들 데이비드의 죽음 이후 사별의 슬픔으로 괴로워했다. 캘리 목사는 오랫동안 병에 시달려 체력을 크게 상실했고, 예정보다 빨리 휴가를 떠나야할 상황이었다.
켈리의 건강악화는 지속되었고 결국 그는 1919년 12월에 사임하였다. 그는 호주에서도 한국교회의 선교를 위해 크게 헌신을 유지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