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의 호주선교사 열전(52)
뮤리엘 위더스 (1889. 5. 23-1979. 7. 23)
한국명: 위대서(偉大恕) 선생, 거창 1918-19; 마산 1920-21; 부산 1922-41, 47-54
뮤리엘 위더스(Miss Muriel Withers)는 한국선교사로 임명받기 전에는 빅토리아 전역에서 성경·선교 학습학교(Bible and Mission Study Schools) 운동을 수행하고 있었던 프랭크 패튼과 가까이 지냈던 인정받는 중등학교 교사였다.
그녀는 초기에 거창으로 가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나서 동료 선교사 엘리자베스 에버리가 건강상의 이유로 진주로 옮겨가면서 위더스는 학교를 운영할 책임을 지고 남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비기독교 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한 여섯 곳의 주일학교들을 감독하면서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그녀의 한국어 공부는 빠른 진전을 보였다. 1920-21년에 그녀는 마산의 의신학교 교장을 지냈고, 야간학교를 관리했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어린이 찬양대를 훈련시켰다.
1923년에 위더스는 부산진으로 이전하여 데이비스 교장이 휴가를 떠난 사이 일신여학교의 운영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후 17년 동안 뮤리엘 위더스는 소녀들의 교육에 자신을 헌신했다. 그녀는 일신여학교의 교장이었으나 이따금 일신중고등학교(the Jane B Harper Memorial School)의 대체 교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녀는 부산진교회 유치원을 위한 책임을 맡았고, 불신가정의 어린이들을 위한 확대주일학교를 지도했다.
위더스는 일본전쟁 기간 동안 한국으로 돌아올 수가 없게 되면서, 선교회의 대표자로 호주전역을 다니면서 활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일했고, 특히 교회들의 어린이들 사이에 선교동아리(Mission Bands)를 발전시켰다.
뮤리엘 위더스는 1947년 9월 7일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녀와 베스 던(Beth Dunn) 그리고 도로시 레거트는 프랭크 커닝햄 목사와 헤럴드 레인 목사(Harold Lane)와 함께 점심과 저녁을 함께 하면서 야영생활을 했다. 그들의 집은 여러 차례 강도질을 당할 정도로 안전부재의 상태였고 위더스는 한 차례 공격을 받았다.
1947-50년 뮤리엘 위더스는 부산진 유치원 원장을 맡았고 경남과 전국에서 찾아오는 유치원 교사들을 훈련하는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한국전쟁의 발발 때부터 부산으로 귀환하던 1952년 8월까지 두해 동안, 그녀는 도쿄에서 한국인들과 함께 일하면서 초후 교회(Chohu)를 설립했고, 두 곳의 주일학교와 성경공부 반들을 발전시켰다.
1952년 8월 부산에 돌아온 이후 위더스는 부산진교회 유치원을 다시 설비를 갖추었다. 그녀는 부산과 전국에서 찾아오는 유치원교사들을 위한 과정들을 운영했다. 그녀는 또 학생들을 위해 주간 영어예배를 인도했고 부산진 교회 성가대를 훈련시켰고, 부산국립대학에서 여러 과목들을 강의했다. 그녀는 매주 부산감옥을 방문했고 석방된 여성들을 위한 갱생시설인 희망의 집을 설립하는데 크게 참여하였다. 이들 중에 많은 여성들이 정치범들이었다.
위더스는 1954년 2월 6일 완전히 한국을 떠났고 많은 사람들이 슬프게 그녀를 그리워하였다. 1954년 3월 9일에 기관들과 선교회의 6명의 장(長)들은 위더스의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에 서명해서 본국의 호주장로교선교부(APBM)로 보냈다.
그녀의 동료들은 위더스가 늘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친절하고, 인자한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뛰어난 독창성과 상상력을 지녔고, 근면하고 적응력이 있는 일꾼이었다. 그녀는 은퇴이후, 학교들로 가서 지속적으로 종교과목을 가르쳤다. 그녀는 1979년 7월 23일에 사망했다.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학교 교회사 교수 / 멜번신학대학원 졸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