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칼럼
마주함
어떤 책에서 “거짓된 인문학은 진통제를 주는 데 만족하지만, 참다운 인문학적 정신은 우리 삶에 메스를 들이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모든 생명체는 고통을 수반하는 시간을 소유하며 존재한다. 그런데 때론 존재에 대한 솔직한 직면을 외면하려고 할 때도 종종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들, 스스로 괜찮다고 느끼고 싶은 충동, 뿐만 아니라 타자에게도 그렇게 보여 지려고 몸부림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도 너무 많이 부딪히게 된다. 나를 향해 진실이 보여 지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소리들을 거부 하려는 불편한 진실, 불편한 목소리, 그런 것들이 진정한 내 모습임에도 그것들을 못견뎌하는 인간의 이기심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견디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에 더 솔직함으로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위로와 자기 최면이 아닌, 아파도 당당하게 상처를 마주할 수 있게 하는 몸부림이 필요하다. 그 속에 자신에 대한 진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다만 여러 가지 현란하고 화려한 포장지들로 포장된 자신을 숨기기 위해 처절한 싸움을 싸우며 스스로 만족해하며 희열감에 중독되어버린 인간들.
비록 자기 자신마저도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맘에 들지 않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 할지라도 이런 것들을 마주하려는 노력이 기초가 될 때에야 자신의 소망스러운 삶에 대한 꿈도 키워갈 수 있는 것이다. 남들이 보는 나가 아니라 진정한 자신을 찾고, 타인과 맺은 비뚤어진 관계들을 제대로 잡고, 나와 너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지속 가능한 소통을 할 때에 세상은 거짓의 껍데기를 벗고 진실의 속살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속내에 얼마나 정직하고 솔직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에서 부딪히는 많은 마주함들은 실체가 아닌 껍데기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타인에게 자신의 껍데기를 통해 자신을 어필하고 자신을 꾸미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솔직함,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 보일 때, 타자도 자신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자신의 삶과 감정에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 관습, 자본, 그리고 권력이 만들어 낸 거짓 것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백일하에 드러남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한 아픔을 겪을 수 있지만 말이다.
라캉(Jacqure Lacan, 1901-1981)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생각할 수 잇을 것이다. 그러나 라캉에 따르면 불행히도 인간이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과 실제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직접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마주할 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직면할 수 있다. 그 자리에서부터 우리들은 본래의 자아를 대면할 수 있고, 타자에게도 솔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여기에 세상의 소망을 새롭게 싹틔울 수 있고, 꿈꿀 수 있는 것이다. 힘들겠지만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는 자신의 활동영역을 정해 놓고 각 가의 영역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역할들을 감당하되,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만큼의 수고를 한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들이 조금씩 그 지경을 넓혀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속에 진실함과 솔직함, 정직함의 능력이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것들이 모아져서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기에 마주한다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초석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 각 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자신을 마주하고, 타자를 마주할 때에 비로소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게 될 것이다. 특히 다음세대의 주역인 자녀들이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도록 먼저 앞서가는 부모세대들의 겸손의 무릎 꿇음과 손 모음이 작은 씨앗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청소년들에게 흘려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윤석영 목사(히스교회 시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