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라에서 들려주는 교육칼럼
세월호의 슬픔이 치유되기 바라며
나는 안산에 잠시 거주하고 있다. 2014년 4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가슴에 혼돈과 분노를 가져온 세월호 사건의 피해자들이 사는 곳이다. 세월호 관련자들의 태도 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총체적인 부정적인 모습을 기억하면서 세월호 사건은 우리의 민족의 마음을 오래 동안 우울하게 하였다.
안산에는 아직도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겠다는 프랭카드를 볼 수 있는데, 세월호의 상처가 회복되어 가는 것일까?
내가 잠시 머물면서 다니고 있는 안산동산교회에서도 희생자가 있었다.
희생자 어머니가 나와서 금요기도시간에 간증을 하였다. 1년이 지나서야 겨우 교회 앞에서 간증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 학생은 학교생활을 잘 하던 학생은 아니었다고 한다. 학교 가기 싫어하는 학생을 달래도 보고 기도도 해 보면서 약간의 우울증 증세를 가진 아들과 긴 영적 싸움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와서 공부에도 취미를 붙이고 신앙생활을 잘 해 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해 세월호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그 아들의 시신을 수습한 부모의 마음은 더 무너졌다고 한다. 살려고 손톱들이 다 뒤집어지도록 몸부림치던 아들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떠나 버린 아들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아들과 함께 하던 시간들에 대한 감사와 그간 그녀를 위로하고 함께 해 주었던 교우들에 대한 감사로 간증을 마무리하였다.
그 간증을 들으면서 타지에 와서 희생자들의 간증을 직접 듣는 내 마음은 더 안타까왔다. ‘치유란 시간이 가서 잊어져가야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들의 희생으로 새롭게 변화된 것이 무엇인가?’
당사자들은 회복되어 가는 시간에 나는 기도회 시간 내내 아픈 마음으로 몸부림을 쳤다. 손톱이 꺾인 그 학생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져서 더 혼돈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세월은 몇 개월이 더 지났다.
지역신문에서 안산 고잔고등학교 출신 학생 두 사람이 시화호를 페트병으로 만든 땟목으로 건넜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치광, 유솔이란 학생인데 한양대와 충북대 학생이다. 그들은 시화호 근처에 사는데, 학교 다닐 때 시화호는 오염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아름다운 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시화호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서 약 20km 되는 시화호를 땟목으로 횡단하기로 한 것이다. 땟목은 두 사람의 이름 첫자를 따서 치유호라 하였다. 8시간 항해 끝에 도착했는데, 신문기자들과 안산시장 등의 관계자들이 와서 그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치광군은 예전에 비해서 깨끗해진 시화호를 횡단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와 함께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고 한다. 시화호는 원래 담수호였는데, 조력 발전소 건설과정에서 그 호수가 썩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물고기와 조류들이 오고 가는 곳이 되었다. 그들이 횡단 훈련할 때에 한국 돌고래 상괭이를 만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안산의 과거를 잘 모르는 나는 안산에서 조금만 나가면 바다가 있고 조력 발전소의 아름다운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원래 그런 줄 알았는데, 1994년 조력발전소를 만드는 과정에서 갯벌을 막아 담수호로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국 그 시화호는 간장색 물로 변한 죽은 갯벌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시화호가 철새들이 도래한 아름다운 자연이 된 것일까?
죽은 자연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는 것 만으로도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희망이 솟게 된다.
그런 희망을 세상에 애써 알리는 모습 또한 세월호 슬픔을 조금씩 씻어낼 치유의 힘이 되어가는 것을 본다. 세월호에 대해서 아무 관계없는 일이지만,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아 있는 어두운 마음들이 조금씩 밝아지는 것을 느껴 보았다. 세월호처럼 가라 앉기만 하는 사회가 아니라, 희망도 일어나는 사회임을 보면서 마음들이 조금씩 희망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느껴 보았다.
두 청년이 만든 땟목의 이름은 치유호인데, 그렇게 이름을 정한 이유는 그 땟목이 세월호 슬픔을 가득 안은 안산을 향한 치유의 메신져가 되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학생들이 참 좋은 일을 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또 생각하게 된 것이 있다. ‘그렇다면 시화호가 이렇게 좋은 곳이 되기에는 어떤 과정이 있었던 것일까?’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인터넷에는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 이라는 단어가 뚜렷하게 반복되었다.
산골인 전남 장흥에서 태어난 최종인씨는 17살 때 안산 공단에서 일하면서 바닷가의 아름다움을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조력발전소가 세워지면서 죽은 호수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져 직장을 잃고 경찰서에서 야간 공공근로를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1년 가까이 저녁에는 파출소에 나가 근무를 하고, 낮에는 사진을 찍으러 시화호 구석구석을 다니며 생태 변화를 관찰했다. 오염된 현장을 고발하고 환경단체와 정부에 지속적인 관심을 촉구했다고 한다. 그가 찍은 사진은 TV방송 여러 곳과 잡지사 등에 기고되었다. 2000년부터 3년 동안 안산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1998년부터 2002년 사이에는 안산 지역 시민단체들의 연합체인 ‘희망을 주는 시화호 만들기 시민연대’의 공동대표를 맡으며, 시화호 회복을 위해서 노력하였다고 한다. 2002년 한국 환경기자 클럽에서는 그를 ‘올해의 환경인’으로 선정되기도 하고, 환경보호에 대한 공헌으로 대통령상을 받기도 하였다. 1999년 9월 안산시청에 공무원으로 특별 채용돼 환경생태자료실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죽은 호수가 살아난 것이 민간인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홍보하고 정부에 지혜를 주고, 다시 담수를 빼고 바닷물이 들어가면서 그 넓은 갯벌이 스스로 치유력을 회복한 것이었다. 지렁이 한 마리도 시화호 치유를 위해 흙을 파고 조개들이 살 수 있는 갯벌을 만들어 왔다. 물 반 고기 반으로 많은 고기들이 모여들고 수많은 조개들이 서식하여 많은 새들이 도래하는 자연으로 회복된 것이다. 43.8㎢ (1,329만평)의 땅이 생명의 땅이 된 것이다.
그곳을 지나가면, 죽은 땅이 살아서 노래하는 것이 들려오는 것 같다. 그곳에서 숨쉬며 살아가는 고기와 조개들과 생물들의 숨쉬고 노래하는 소리가 바도 소리와 함께 들려온다.
무엇보다 가장 큰 혜택은 본인 자신에게 돌아갔다. 그가 직장을 마치고 밤을 새면서 환경을 헤치는 요인들을 감시하고 다녔는데, 이제 그는 자신이 하던 일을 직업으로 갖게 된 것이다.
수년 전 우리 교회 교우 청년 한 사람이 바닷가에서 실족하여 조금씩 조금씩 바닷가 멀리 사라져 가는 것을 보았다. 파도는 생명을 삼켰다. 그러나 바다는 세월호를 삼킨 무서운 곳이 아니라, 땅에서 흘러오는 온갖 더러운 물을 받아내고 그것을 스스로 정화하며 온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힘을 다하는 곳임을 시화호 회복을 통해서 확신하게 된다.
우리 인간도 생명을 위해서 전심을 다해서 움직이듯이, 이 자연도 바다도 회복과 치유를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해 활동한 것이다.
한 사람이 치유를 외치면, 함께 하는 사람이 생기고, 자연도 치유를 위해 힘을 다하고 하나님 또한 함께 동행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 또한 구원자이시시지 않는가!
치유호 땟목을 만들어 시화호 회복의 소식을 알리자는 청년들의 행동은 세월호 처럼 가라앉은 마음을 가진 안산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들의 행동을 보고 희망을 느끼고 이 작은 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안산에 인접한 바닷가를 차를 타고 지나다 보면, 바다에 잠긴 세월호가 자꾸 연상이 되어 슬펐다. 이제는 바닷가를 지나면서 그 갯벌 아래에서 숨쉬는 수많은 생명들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죽은 땅에서 다시 들려오는 그 숨소리가 세월호의 잔영들을 조금씩 멀리 떠나 보내고 있는 것을 느낀다.
나는 한 사람으로 시작된 아름다운 일들이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음을 믿고 싶다. 그 믿음의 증거를 모우고 또 그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 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호주 시민으로서 위대한 호주, 위대한 대한민국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살아간다. 그러기 위해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바로 그 한 사람임을 알리고 싶다. 당신이 전하는 회복과 희망의 소식에 공감된 사람들이 이어져서 세상을 치유하는 나라, 호주와 한국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을 통하여 세상이 새롭게 될 것을 믿는 김광호로부터
김광호 목사(캔버라한인장로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