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북송된 탈북고아의 처형소식을 듣고…
다음의 아홉 명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23살의 문철, 21살의 박영원, 20살 정광영, 19살 이광혁, 유광혁, 박광혁, 18살 류철룡, 17살 장혜리, 16살 노애지, 지난 2013년 5월 28일 라오스에서 북송된 9명의 탈북 고아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우리 교회가 컴퓨터도 보내고, 책도 보내고, 옷도 보내고, 영양제도 보내고 밥도 사주었던 아이들입니다. 저는 그들과 잠도 같이 자고, 예배도 같이 드리고, 압록강에서 같이 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수요일 그 아이들 중에 두 명이 처형 당했다는 소식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나이가 제일 많았던 철준이와 또 한 명의 아이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같이 자던 친구가 얼어 죽자 한 밤에 홀로 장백산 눈 길을 헤치고 걷던 키크고 잘 생긴 영원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 뉴스를 보고 정확한 소식을 듣기 위해 중국에서 일하는 일꾼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사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9명이 다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7명은 지금 수용소에 있다고 소식이 왔습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정말 짐승처럼 산 아이들입니다. 쥐가 먹으려고 모아 놓은 벼와 옥수수를 먹고, 그리고 그 쥐들을 잡아 먹으며 산 아이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돕는다고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작년 4월 중국을 떠나기 전에 만나 적지만 경비도 지원했습니다. 그런 아이들이 라오스에서 북송 됐을 때 가슴이 무너지는 슬픔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책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 그와 똑같은 참담한 기분으로 한 주를 보냈습니다. 그동안 뭘했나 하는 회한에 젖었습니다. 문철이는 2012년 3월, 장백산 아래 눈구덩이를 헤치고 구하여온 청년입니다. 당시에 21살이었지만 키는 135센티미터에 멈추었습니다. 다행히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렸고, 자유의 날을 기다리며 공부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안타깝고 답답합니다. 북한은 참 못되고 나쁜 나라입니다.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습니까? 제 백성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만들면서도 지상천국이라고 선전하는 나라, 하나님은 왜 이런 나라를 존재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걸까요?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그런데 문제는 북한만이 아닙니다. 그동안 한국이라는 나라는 도대체 무얼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외교관리들의 잘못으로 9명의 고아들은 사지로 끌려갔고, 이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을 끈 인권침해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권을 무기삼아 북한을 공격하는 데는 열을 올리면서도 이 애처로운 아홉 명의 여린 천사들을 위해서는 두 손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부만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주위를 환기시키는 일을 지속하지 못했고, 기도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들 아홉 명과 두 명의 인솔자는 중국 양회가 끝날 무렵인 2013년 4월에 안가를 출발하여 라오스에 도착하였습니다. 5월 10일, 라오스 이민국에 붙잡히기는 하였지만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고, 잠시 기다리면 한국 대사관에 의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겨질 줄 알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억류 17일이 되던 26일, 아이들은 어디론가 이송되었고, 다급한 우리는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고 한국교회에 기도요청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틀 후인 28일에 아이들이 평양에 도착하였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탈북자가 한국에 오는 것만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그 땅을 떠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도록 우리가 도와야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경우 한국행을 결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 아홉 명이 그렇습니다. 이들은 부모로부터 버림받았고, 자기들의 조국으로부터도 버림받았습니다. 그렇다고 중국에서 살 수도 없었습니다. 한국행은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유를 향한 이 아홉 명의 여정에 왜 함께 하지 않으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고 믿으며 성경을 묵상하다가 레위기 16장의 ‘아사셀의 염소’에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 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 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아론은 여호와를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를 속죄제로 드리고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레위기 16:7-10)
대속죄일이 이르면 구별된 숫염소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그리고서 대제사장은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백성의 죄를 고백합니다. 그런 다음 아사셀의 염소는 백성의 죄를 지고 광야로 내보내졌습니다. 이 아홉 명의 천사들이 바로 아사셀의 염소라고 해석해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만 하면 무조건 응답하시는 자판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긍정’과 ‘성장’에 묶어 두지는 않았던가요? 우리가 하나님을 ‘긍정과 성장의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사이에 아홉 명의 아이들은 민족의 아픔을 외면한 기독교의 불의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내 대신 거친 광야로 내몰린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고 했던가요? 가장 가까운 이웃인 내 동포가 굶주려 죽어가고 있어도 우리는 무심했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공격하기 위하여 ‘인권의 칼’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문철이와 누군가가 죽었습니다. 오늘도 아사셀의 염소는 광야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정작 죽어야 할 우리는 여기 이렇게 살아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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