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람맘의 두서없는 이야기 32
(평생 초보엄마인 하람맘의 일상 속 에피소드)
전성기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 하자마자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는 인턴을 거쳐 점장을 하기까지 꽤 긴 시간을 한 회사에서 근무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만큼 좋은 경험을 한 시간이었다. 명품관이 있는 모 백화점에서 근무할 때다. 본인은 영양사였기 때문에 매일매일 필요한 분량의 식재료를 발주 하곤 했는데 하루 1000명 정도의 식사에 필요한 양이다 보니 정확한 분량을 맞추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10K 필요한 오징어 단위를 착각해 10k박스 10개가 입고되는 실수도 있었다. 덕분에 물오른 맛난 오징어를 소비할 방법을 생각해 내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튀김옷이 바삭한 오징어 튀김, 갖은 야채와 함께 맵게 볶은 오징어 불고기, 식초 설탕을 넣고 새콤하게 버무린 오징어 도라지 무침, 맛있는 초장과 함께 먹는 오징어 숙회 등등…하다하다 안돼서 잘게 썰어 삼선볶음밥도 하고 오징어무국도 몇 번 끓이고 오징어 탕수 까지 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이런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었지만 어쨌든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족들과 여행도 자주 다니고 틈틈이 취미생활도 하며 아마 그때가 나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로 나름 즐겁고 행복한 20대를 보냈다. 그러다 여기저기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편과 호주에 온 나는 솔직히 한국에서의 그런 생활이 계속 지속되리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러나 이게 왠걸…호주는 만만한 나라가 아니다. 커리어 우먼으로 한국에서 당당하게 잘 나가던 나는 호주에선 별 볼일 없는 그리고 써 먹을 데가 하나도 없는 그냥 그런 아줌마에 불과한 것이었다. 영화에 나오던 마당이 있는 그림 같은 집에 살리라 예상 했는데 입이 떡 벌어지는 렌트비에 간신히 구한 집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비가 오면 천장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였고 문짝은 다 떨어져 초록테이프로 칭칭 붙여둬야 하니 이런 상황에 그야말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의 인내심은 중고로 산 세탁기가 펑하고 터지면서 결국 함께 터져 버렸다. 왜 내가 잘 다니고 인정받던 직장을 그만 두고 여기 와서 한국의 60년대 어느 집처럼 비 오는 날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기 위해 물통을 대고 있어야 하는지, 한국 지인들에게 나눠 주고 온 대형 통돌이 세탁기며 멀쩡한 가구들이 얼마나 아까운지 생각하는 처량 맞은 나라니…물론 자리 잡기까지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지만 모든 것이 그것을 뛰어 넘었고 겉으로 보이는 호주의 아름다움과 실제 삶은 너무나 달랐다. 자꾸 집안에 출몰하는 바퀴벌레도 지겹고 곰팡이 스미는 벽도 밉고 나의 가장 찬란한 시절이 이 우중충한 공간에서 사라지는구나 하는 순간이었다. 많은 분들에게 한국에서는 소위 잘 나갔는데 호주에 와서 고생 많이 했다고 하는 얘기를 지금도 종종 듣는다. 잘 나가던 직장인, 안정된 공무원에 선생님 기타 좋은 직업을 가진 그때가 인생의 전성기였다는 것이다. 나또한 그런 생활을 얼마간 지속하다 문득 늘 과거의 모습만을 추억하며 사는 한심한 나를 발견했다. 예전의 삶이 전성기였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 그때와 다른 지금이 있기 때문일 텐데 그렇다면 과연 내가 한국에서 계속 살았다면 그 생활을 만족하며 여전히 전성기를 누렸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 것 이다. 그러다 한때 파라오의 잘나가는 왕자로 모든 부귀영화를 누리던 모세를 생각해 보았다. 모세는 애굽 감독관을 죽이고 도망치듯 왕궁에서 떠나 방랑길에 오른다.
그 후 약 40년간 미디안 광야와 호렙산 에서 목동으로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데 능력 많고 힘 있던 왕자의 신분이 아닌 연약한 목동 모세를 출애굽을 위해 하나님이 들어 쓰셨다. 하나님의 전성기와 우리가 바라보는 전성기의 차이가 드러나는 셈이다. 내 삶도 세상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조금 실패한 듯 보이고 기운 빠지고 낙심도 되는 상황이지만 그렇게 내 자신이 연약한 순간이 하나님이 일하시기 가장 좋은 때. 즉 인생의 진정한 전성기라니 얼마나 기운이 나는 말인가. 지금의 나는 장난꾸러기 아들 하람이를 둔 엄마이고 배가 조금 나오기는 했지만 다정하고 신실한 남편의 아내이자 멀리 한국에 계신 부모님의 딸이고 사랑하는 교회의 성도이자 조금은 뚱뚱해지고 발에 굳은살도 생긴 그야말로 길거리를 걷다 100번은 만날 평범한 아줌마지만 이제는 조금씩 기대를 가져본다. 당신은 당신 인생의 전성기를 과거로 남기고 있는가 미래로 두고 있는가. 나의 전성기는 그래서 늘 내일이다.
박은정 사모(시드니동산교회, 양화영 전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