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람맘의 두서없는 이야기 22
추억
조용히 눈을 감고 잠시 있으면 앞으로 자욱이 퍼지는 흙먼지와 함께 정겨운 풍경이 밀려온다. 묵직하고 커다란 나무대문을 두 손으로 바짝 밀면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넓은 마당이 눈앞에 펼쳐진다. 마당 가운데에는 간단한 수도시설 (시설이라고 해봤자 기껏 덩그런 수도하나가 전부다) 오른쪽에는 짧은 계단위로 넓은 마루가 인상적인 집이 있고 왼쪽에는 아기자기한 텃밭이 있어 부글부글 끓는 뚝배기 된장만 있으면 깻잎이고 고추고 상추까지 풍성한 식사를 할 수 있다. 파는 것처럼 둥글게 예쁘진 않지만 투박해서 더욱 맛있어 보이는 토마토나 싱싱한 오이로 후식까지 즐길 수 있다.
정면으로는 큰 눈을 굴리며 집안일을 도왔을 우직한 소의 아늑한 외양간과 이끼만 잔뜩 낀 우물이 하나 있다. 촌스럽고 불편한 부엌에는 커다란 무쇠 솥이 두 개나 있고 건초와 나무를 쌓아놓는 공간도 보인다. 4계절 내내 아궁이에 불이 꺼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 장작 타는 냄새가 부엌에 그윽하게 머물러 있다. 김치는 뒷마당 땅속 깊은 항아리 안에 들어있고 과일은 직접 키운 것을 그때그때 따 먹거나 좋은 햇살에 적당하게 말려 걸어두면 오래 먹을 수 있다. 간장, 고추장, 장아찌 또한 마찬가지니 냉장고가 딱히 필요가 없다. 그러다 보니 부엌에 있어야 할 냉장고가 우습게도 안방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게 된다. 아파트에 살 때는 자고나도 피곤하고 눈뜨기가 힘들었는데 이곳에서는 저절로 눈이 떠진다.
창호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기도 하지만 부지런히 움직이는 발소리와 여물 끓는 구수한 냄새 때문에 더 잘 수가 없다.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고 문을 열면 깨끗하고 맑으면서도 물안개처럼 수분을 잔뜩 먹은 아침 공기가 제일 먼저 다가온다. 안개를 손으로 휙휙 걷어내고는 수돗가 앞에 쭈그리고 앉아 가마솥에서 끓어오른 뜨거운 물을 붓고 찬물과 적당히 섞은 후 햇빛에 쩍쩍 갈라져 수분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주황색 비누를 물에 불려 고양이 세수를 한다. 그렇게 아침산책 준비를 하고 집 밖으로 슬슬 걸어 나가면 반가운 도랑이 제일 먼저 나타난다. 사시사철 많은 양은 아니지만 꾸준히 흐르는 도랑덕분에 옆에는 싱싱한 나뭇잎들이 풍성한데 거기에는 손톱만한 작은 청개구리들이 붙어있다. 얼마나 귀엽고 싱그러운지 손바닥 안에 잠시 담아두다가 이내 정신이 다른데 팔리면 어디 갔는지 폴짝 사라지고 없다. 그렇게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면 허기가 밀려와 집으로 냉큼 달려간다.
아침밥은 둥그런 양은 상에 차려진다. 올라온 반찬은 별거 없지만 참 맛깔나다, 간장에 절인 고추지와 마늘, 밭에서 금방 따온 애호박에 새우젓과 실고추를 넣고 볶은 나물, 국물이나 내는 커다란 통 멸치와 찍어 먹을 고추장, 후라이팬이 오래 되서 인지 달걀 후라이는 모양이 온전하지 않고 전부 으스러져 있지만 금방 꺼내 쫑쫑 썰어온 신 김치와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으면 든든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아 처음에는 입에 잘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먹다보면 재료 본연의 깊은 맛과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언제라도 이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리운 풍경 그리고 보고픈 할머니. 자녀들을 다 시집 장가보내시고도 혼자 몸으로 자식들을 의지 하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사셨다. 평생 정직하고 부지런히 삶을 일구시느라 손 마디마디 깊은 주름이 지고 흙물이 손톱을 검게 물들였지만 주일날만큼은 곱게 옷을 입으시고 읍내에 있는 작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셨다. 누군가 심심할 때 드시라 했을 사탕이랑 과자는 유통기간이 다 지나도록 안 드시고 광에 넣어 두셨다가 가끔 들리는 손자 손녀 손에 쥐어 주셨다. 과자는 이내 눅눅하고 사탕도 녹아 모양이 뭉그러져 있지만 그때는 왜 그리 맛있었는지 탈도 잘 나지 않았다, 밤에는 커다란 모기장을 마루에다 걸어주시고는 마당에 모기향 까지 피워 두신다, 그리고는 감자며 옥수수며 잔뜩 찌기 시작하시면 기다리는 동안 나는 가만히 누워 모기장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의 별을 센다. 저녁바람은 선선하고 은은하며 향기롭다. 멀리 개가 한 마리 짖어대니 온 마을의 개들이 동시에 짖어 대는데 그 소리마저 정겹다. 무릎에 나를 앉히시고 참 빗으로 머리를 쓱쓱 빗겨 주시면서 흥얼거리시던 할머니와 나의 추억.
말동무도 별로 없는 시골마을 그래서 산과 벗하며 외로움을 견디시느라 말씀도 워낙 적으셨고 그래서 식사 때 혼자 하는 기도 못하신다며 늘 주기도문을 식사기도 대신으로 외우시던 할머니, 지금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벗하며 사시겠지. 호주 3월의 바람이 이렇게 불어오는 소소한 일상의 어느 날 나는 그리운 것을 떠올리며 잠시 눈을 감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