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람맘의 두서없는 이야기 27
향기
나는 향기[香氣)에 민감한 사람이다. 길거리를 걷다가 익숙한 냄새가 나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지면서 그 향기를 맡았던 추억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달콤한 Romantist라 부른다. 쇼핑센터 안에 수제 비누나 향초를 파는 곳을 지나갈 때면 늘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도 그 이유다.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지만 사랑스런 향기에 취해 막상 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저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 곳이라면 하루 종일 일해도 좋겠다 싶다. 예전 한국에서 직장을 다닐 때 친구들이 생일선물로 사준 향수냄새를 맡으면 그때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른다. 사회초년생이던 시절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친구들이 제일 먼저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멋진 커리어우먼이 되라며 사준 향수. 비온 뒤 느껴지는 촉촉하고 싱그러운 냄새로 느끼하지 않아 좋았다. 물론 지금은 다 썼지만 예쁜 병이 마음에 들어 아직도 보관중이다.
호주의 4월이 중반에 이르니 아침, 저녁으로 제법 날씨가 쌀쌀하다. 그렇긴 하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꽤 더웠다. 지금도 한나절에는 태양이 뜨거우니 말이다. 어느 더운 날 하람이와 잘 익은 수박을 하나 깨 먹으며 문득 청년부 시절 교회수련회에서 맡았던 시원한 수박냄새가 떠올랐다. 열정으로 똘똘 뭉쳐져 있던 우리. 목이 터져라 몇 시간이나 무릎 꿇고 기도를 하고 덕분에 피가 안 통해 저려오는 다리를 간신히 질질 끌며 집회를 마치고 밖에 나온다. 온몸은 땀투성이가 되었지만 늦은 밤 기도원의 여름바람은 아주 시원했다. 무엇보다 선생님들께서 직접 준비해 주신 시원한 수박을 보면 더위가 싹 가신다. 큰 쟁반에 투박하게 썰어진 수박이지만 통성기도로 지쳐버린 목에는 이보다 더한 피로회복제가 없을 정도였다. 그제야 저려오는 무릎을 조금씩 피고 더위를 식히면 어느 사이엔가 여기저기서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수박향이 밤바람을 타고 추억으로 새겨진 듯하다.
나는 비가 내릴 때 그 비릿한 냄새도 참 좋다. 중,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비가 오면 일부러 버스를 타지 않고 집까지 마구 뛰어 가곤 했다. 그 당시엔 산성비 그런 것도 그다지 심한편이 아니어서 철퍽 거리면 뛰어가는 재미에 자주 그러곤 했는데 물론, 교복이 흠뻑 젖어 집에 가면 부모님께 엄청 혼나기는 했다. 길거리마다 조금씩 생기는 물웅덩이를 점프해 건너뛰는 터프함을 보이다가도 조금한 지렁이 한 마리에 캭! 하고 호들갑을 떨던 사춘기 시절. 지금 생각해도 다시금 웃음이 난다.
집에 걸어가는 길 어디쯤에서 초저녁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가 부지런히 준비하는 저녁밥 냄새. 칙칙폭~ 하며 바쁘게 돌아가는 압력밥솥 소리도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냄새도 좋다. 특히나는 어머니가 볶아주는 나물냄새가 집문 앞에서 솔솔 풍겨 나오면 마음이 급해진다. 어머니는 고사리나물도 취나물도 맛나게 볶으셨기 때문이다. 통통하게 물오른 고구마순 나물은 껍질을 벗길 때 조금 귀찮기는 하지만 막상 고춧가루를 약간 넣고 매콤하게 볶으면 양념국물까지 너무 맛있어 밥에 통째로 넣고 자주 비벼 먹었다.
나는 지금도 약간은 쿨한 향수를 주로 뿌리는데 cool water나 musk향이 대부분이다.
회사를 다니시던 아버지는 네모난 케이스의 갈색 스킨을 바르곤 하셨다. 그 냄새가 좋아 무조건 손에 덜어 얼굴에 턱 하고 바르면 엄청난 따가움이 얼굴을 강타한다. 지금은 어머니가 쓰시는 그것이 순하고 부드럽다며 함께 사용하시는 것 같지만 말이다. 약간은 시원하면서 칼칼한 느낌의 그 냄새. 누군가 아빠냄새라고 부르는 스킨냄새가 그래서 지금도 나는 좋다. 그러니 혹시 내 옆을 지나가다가 낯선 남자의 냄새가 나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요즘 나는 체리블러썸 이라는 향에 푹 빠져버렸다. 자기직전 바디로션으로 쓰면 뜨거운 허브티를 마신 것 마냥 잠이 푹 잘 온다.
그렇다면 하람이의 응가냄새도 오랜 시절이 지나면 나에게 그리운 향기가 될까…? 하지만 그건 정말 모를 일이다. 정말!
박은정 사모(시드니동산교회 양화영 전도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