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와 함께하는 목회자인문학교실, 2025년 10월 모임에 “메멘토 모리” 나눠
손호현 저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제10장 나눔 … 다음모임은 11월 4일 (화) 오전 10:30 [10월 7일 발제전문 포함]
매월 첫째 화요일 “홍길복 목사와 함께하는 ‘목회자인문학’ 교실”은 지난 10월 7일 (화) 오전 10시 30분, 호주미래대학 파라마타캠퍼스에서 주교재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손호현 저) 제10장 “메멘토 모리”를 장대호 목사의 발제로 나눴다.

이날 장대호 목사는 서두에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주제는 제10장 ‘메멘토 모리’입니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란?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고대 로마에서 유래한 말로,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 행진을 할 때, 그의 뒤를 뒤따르던 하인이 ‘Remember you must die!’ 외쳤습니다. 화려한 행진 속에서 이 말은 ‘너도 결국은 죽는다. 유한한 인간일 뿐이다.’ 라는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결국 이 표현은 인간의 유한성과 필멸성을 강조한 말로 중세 미술, 문학, 종교적 묵상에서 삶의 유한함과 겸손, 현재 순간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라며 ‘인간존재의 유한성’, ‘죽음 이후에 대한 해석들’, ‘기독교적 내세관’, ‘기독교 신앙의 물음’ 등의 순으로 살핀 후 질의응답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기독교 신앙의 물음’ 부분에서는 ① 기독교인만 천국에 가는가? ② 기독교인은 화장을 할 수 있는가? 등에 대한 토론이 활발했다.
‘홍길복 목사와 함께하는 목회자인문학교실’ 다음 모임은 11월 4일 (화, 오전 10:30) 호주미래대학 파라마타캠퍼스 (L1 / 239 Church St Parramatta NSW 2150)에서 모인다.
다음은 10월 7일자 발제전문이다.
[목회자인문학교실 10월 7일자 발제전문]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제10장 메멘토 모리
제10장 메멘토 모리
인문학으로 읽는 기독교 이야기 (손호연 지음, 동연 출판)

1. 들어가며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주제는 제10장 ‘메멘토 모리’입니다.
메멘토 모리 (Memento mori)란? 라틴어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표현은 고대 로마에서 유래한 말로,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 행진을 할 때, 그의 뒤를 뒤따르던 하인이 “Remember you must die!” 외쳤습니다.
화려한 행진 속에서 이 말은 “너도 결국은 죽는다. 유한한 인간일 뿐이다.” 라는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결국 이 표현은 인간의 유한성과 필멸성을 강조한 말로 중세 미술, 문학, 종교적 묵상에서 삶의 유한함과 겸손, 현재 순간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소재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2. 본문 요약
1) 인간존재의 유한성
본 장이 시작되면서 불교의 ‘흰 쥐와 검은 쥐’ 비유를 인용합니다.
한 사람이 사나운 짐승 (삶)에게 쫓겨 우물 속으로 떨어지려는 순간, 가까스로 넝쿨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우물 아래에는 괴물 (죽음)이 입을 벌리고 있고, 위에서는 흰 쥐 (낮)와 검은 쥐 (밤)가 그 넝쿨을 갉아먹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 삶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생은 끊임없는 문제와 두려움에 쫓기며, 결국 우리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만이 죽음을 의식하고 준비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다른 생명체는 죽음을 본능적으로 피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묻고, 말하고, 의미를 찾고 ‘유서 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런 관점은 죽음을 세 가지 학문적 접근으로 설명됩니다.
① 생물학적 관점 (막스 셸러 Max Scheler의 주장)
☞ 막스 셸러는 죽음에 대한 이해가 일종의 생물학적인 직관에 기초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이 다른 사람이나 생물의 죽음에서 대리적으로 죽음을 경험하기 이전에, 자신 속에 내재하는 죽음에 대한 본질적이고 직관적인 지식을 지닌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죽음을 이해하는 것은 문화나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미 ‘본능적으로 죽음을 인지하는 생물학적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② 사회 문화적 관점 (푹스, 하안, 란츠베르크, 야스퍼스)
☞ 푹스는 셸러가 말하는 죽음에 대한 생물학적 직관을 비판하며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의식은 ‘사회적 산물’임을 주장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해는 단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만이 아니라 특수한 문화 속에서 특수한 죽음관을 학습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 하안도 유사한 견해를 제시하며 죽음에 대한 인식은 우리 인간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경험이요, 삶의 과정의 결과이며, 이 삶의 과정의 기초는 다른 사람들의 죽음의 경험이다.”라고 말합니다.
☞ 란츠베르크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죽음의 실재를 깊이 있게 자각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실존적으로 경험함으로 무관심에서 벗어나 죽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③ 종교적 관점 (죽음을 통한 존재론적 인식)
고대 그리스 텔피의 아폴로 신전에서 “너 자신을 알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곧 ‘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며,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언어에서 ‘호모 homo’는 땅을 가리키는 ‘후무스 humus’에서 왔고, 히브리어 ‘아담 adam’ 역시(아다마 adamah)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의 영원성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유한성과 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죽음의 필연성 (흙에서 나서 흙으로 되돌아가는 인간)을 말합니다.
따라서 종교의 죽음 의식은 신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 사이에 존재하는 질적 차이에 대한 인식을 핵심으로 합니다.
성서의 죽음관은 신과 인간의 존재론적 차이를 직시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오만을 넘어 겸손에 대한 인식, 죽음 앞에서 모든 인간과 모든 생명의 평등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아름다운 죽음은 아름다운 삶에 의해서만 완성된다는 인식을 가져오게 한다고 말합니다.
2) 죽음 이후에 대한 해석들
‘죽음 이후 나는 어떻게 될까?’ 완전히 사라지게 될까?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여 남게 될까? 라는 질문에 수많은 종교와 철학이 죽음 이후에 사후세계에 대한 물음을 답하고자 시도했습니다.
① 영혼 불멸설 (플라톤적 이원론 사상)
인간의 몸과 영혼이 구분될 수 있다는 이원론적 인간학에 근거합니다.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 신비종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측되며, 기원전 6세기 이후에는 그리스와 소아시아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고 피타고라스, 엠페도클레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 철학자들도 영혼 불멸설을 받아들였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초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참된 본질은 물질세계 가 아니라 영원한 신의 세계에 있다고 생각하며 몸은 죽어도 영혼은 결코 죽지 않고 이데아 세계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영원 불멸설에 대해서 한계를 지적합니다 (P346).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원론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통전적 존재이기에 영혼 없는 육체가 불가능하듯이, 육체 없는 영혼도 불가능하다.
② 영혼 윤회설 (힌두, 불교적 세계관)
영혼 불멸설의 한 형태이며, 인도의 힌두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카르마 이론에 기초한다.
죽음이란 삶의 마지막이 아니라 다른 삶으로의 관문이며, 이생에서의 삶의 행동과 업이 다음 생애에서의 존재 양태를 결정한다고 주장합니다.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가르치는데 첫째는 ‘행위의 길’로 업보를 통한 구원의 길로서 종교적인 의무를 잘 이행하고 고행을 실천함으로 해방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지혜의 길’로 근원적인 무지를 극복하고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브라만과 자신의 영혼이 일치한다는 직관적 인식을 통해 해방된다는 것이며, 셋째는 ‘헌신의 길’로 종교적 의무와 고행을 실천할 시간이 없는 사람이나 지성적 명상을 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철저한 헌신과 희생의 삶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윤회설은 동양만이 아니라 서양의 종교와 철학에서도 종종 발견되는데, 고대 이집트 종교, 가나안 종교, 그리스 철학과 로마의 종교 사상에서 윤회설이 발견된다. 예로 피타고라스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고기를 먹지 말라 권했는데 그것이 죽은 이웃집 할머니의 환생으로 판명날 수 있기 때문이라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윤회설의 한계 또한 지적합니다 (P349).
영혼 불멸설과 마찬가지로 윤회설은 몸과 영혼의 이원론을 전제하지만 오늘날 의학, 심리학 등은 동일체로서의 인간이해가 좀 더 사실에 가깝다고 여긴다. 그리고 윤회설은 원인과 결과, 행위와 상벌이 이라는 엄격한 인과율에 근거하고 있지만, 기독교입장에서 이러한 엄격한 인과율보다 우선하는 것이 신의 용서하는 은혜이며 사랑이어야 한다.
③ 부활설 (4가지 주요 논점)
부활이 빠진 예수는 우리가 아는 예수가 아니다. 예수를 가장 예수답게 설명하는 것은 그가 십자가의 지옥으로 내려가셨으나 당당하게 부활하셨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테는 자신의 ‘예술론’에서 예수를 무덤에서 걸어 나오는 부활한 주님으로 표현하는 것이 예술가들의 가장 아름다운 과제라고 말한다.
십자가를 넘어 부활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다.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신비 앞에 놓인 우리는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 상자를 아직 열어보지 못한 채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흔들어 보고 궁금해 하는 아이와도 같다.
이처럼 우리도 부활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 아닌지를 짐작해보도록 하자.
첫째, 역사적 사실이다.
부활은 제자들의 시체 도난극이 아니라, 그들의 삶 전체를 변화시킨 실체적 경험이다.
트리노의 수의 등 물증은 한계가 있으나, 제자들의 삶의 전환이 부활의 강력한 증거다.
둘째, 부활은 영혼 불화설이나 불교인들이 주장하는 영혼 윤회설이 아니다.
이것은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적 존재를 만지고 확인하는 의심 많은 도마의 이야기는 기독교인이 믿는 부활의 사건이 단지 영혼의 불멸설이나 윤회설이 아니라 몸의 부활도 포함하는 인간 전체의 불멸설이 라는 것을 보여준다.
셋째, 부활은 단순히 되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몸으로의 존재 변화이다.
부활은 현재의 시공간과 현재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활은 인간의 몸이 급격한 변형을 통해 영원히 죽지 않는 영적인 몸으로 바뀌는 것이다. 바울에 따르면,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고전 15:53).
한스 큉 (Hans Kung)은 부활 전의 인간의 몸과 부활 후의 인간의 몸을 마치 애벌레와 나비의 관계처럼 묘사하며, 우리의 몸이 극단적인 변형을 거치게 되겠지만 여전히 우리의 정체성은 남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넷째, 부활은 예수 혼자만의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시며”라고 고백할 때, 이것은 예수가 죽은 자들을 모두 자신에게로 모아서 함께 데리고 부활하셨다 는 것을 의미한다고 일찍이 교부들의 설교는 증언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이러한 예수의 부활사건이 미래에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전 15:20 새번역).
부활은 인간의 궁극적 희망이며 완성이다. 죽은 자와 죽임을 당한 자는 다시 살아나야 하며, 그뤼네발트의 ‘이엔하임의 제단화’ 앞에서 기도하던 문둥병자들도 새로운 몸으로 치유 받아야 한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보편적 부활의 첫 열매, 첫 신호탄이다. 그것은 죽음을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행동이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고전 15:54-55 새번역). 인간의 생물학적 죽음과 모든 죽음의 현실 자체가 이제 하나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죽음이 죽었다. 여기에 희망의 이유가 있다.
3) 기독교적 내세관
최후의 심판 때에 모든 인류가 부활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된다는 믿음을 핵심으로 한다.
① 지옥
최후의 심판을 통해 영원히 멸망당하는 사람들이 가게 될 장소를 가리킨다. 사악한 악마와 타락한 천사들이 거주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죄인들의 형벌의 장소로 기독교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지옥에 가게 된다. 지옥에 대한 가장 생생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묘사로는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중세 스콜라 시낭의 주장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단테에 따르면 지옥은 9개의 지역 혹은 고리로 구분되어 있다. 지옥의 문에는 이런 푯말이 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의 지옥관은 당시 중세의 종교 문화적 가치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죽음의 문화는 삶의 문화의 거울인 것이다.
② 연옥
가톨릭교회는 인간이 죽은 다음 그 영혼은 잠시 연옥에 있을 것이라는 연옥설을 주장한다. 연옥설은 개개인의 사람이 죽을 때 받는 개별심판과 세계종말 때 궁극적인 최후의 심판 사이의 시간을 설명해 준다고 믿는다. 연옥설을 최초로 만든 연옥의 두 창건자로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가 있다. 스승과 제자인 이 둘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신의 징벌의 도구로서의 불과 신약성서에서 언급되는 불에 의한 세례라는 두 생각에 기초하여 연옥의 이론을 최초로 제시한다. 클레멘스는 연옥의 불이 복수를 위함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기 전 영혼의 정화를 위함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오리게네스도 불의 세례가 바로 이러한 정화를 위한 임시적인 조치라고 보았고 지옥 그 자체를 연옥으로 본 것이다. 영원 한 지옥이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임시적 정화의 조치로서 연옥만이 존재한다.
개신교는 연옥설에 대해 몇몇 이유에서 비판적이다.
개신교 기독교인들은 죽음 후에 최후의 심판 전까지 인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인간이 죽으면 알 수 없는 시공간의 영역에 잠들어 있다가 최후의 심판 때에 부활하여 그 심판을 통과한 자들은 천국으로 그렇지 못한 자들은 지옥으로 간다고 개신교는 믿는 것이다.
③ 천국
성서에서 천국은 연회로, 결혼잔치로, 도성으로,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묘사된다.
새 예루살렘 도성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기독교 성서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삶이 세상의 도성에서 천상의 도성으로 옮겨가는 중간기에 살고 있는 것으로 이 해한다. 이러한 생각은 성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세상의 도성’과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두 도성 사상에 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천국에서는 가족의 재회가 이루어지리라고 여겨진다. 순교자 키프리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 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 동안 손님과 이방인으로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낙 원이 우리의 본향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본향에 돌아가 우리의 부모님께 인사하게 될 그 날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천국에는 더 이상 결혼제도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눅 20:34-35).
4) 기독교 신앙의 물음
① 기독교인만 천국에 가는가?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천국과 지옥으로 인류의 운명이 나누어질 것이며 오직 종교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만 구원받을 것이라 믿는다. 이를 ‘이중예정설’이라고 부른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최종적인 보편적 심판이 완결되는 부활 다음에는 두 왕국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들 각각은 스스로의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왕국이고, 다른 하나는 마귀의 왕국이다.”
비록 소수이지만 몇몇은 지옥이 영원히 존재할 수 없으며 궁극적으로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모든 존재 가 하나님에게 돌아 가리라는 보편구원설 혹은 만유회복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소수이다.
② 기독교인은 화장을 할 수 있는가?
화장과 관련하여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염려하는 것은 몸이 완전히 소멸된다는 생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바르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몸은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마찬가지로 완전히 소멸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이나 무덤에 어떠한 일이 생기든 그것은 부활과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은 벗거나 덧입을 수 있는 일시적인 장막집에 사는 것과 항구적으로 영원한 집에 사는 것을 대조시키고 있다. 현재 우리의 몸은 잠시 잠깐 우리가 거하는 천막이다. 한편 부활의 몸은 우리의 영원한 집이 될 것이다. 그 두 몸은 겉으로 보기에 비슷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회장은 부활에 있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요컨대 화장이든 매장이든 기독교인들은 몸의 신체적 해체를 궁극적으로 인정한다. 이처럼 죽음 후에 인간의 부활이 있다는 것은 많은 믿음을 요구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죽음 후에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동일한 믿음을 요구한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모른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희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3. 토론

발제: 장대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