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나의 북한 방문기 (6, 7)

나의 북한 방문기 (6)
<1997년 10월 17일 (금요일) / 평양과 묘향산 – 구름, 약간 흐리다>
오늘은 묘향산으로 가는 날이다. 우리는 다른 날 보다 좀더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평양 시내를 벗어나니 한 10여분만에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평양 – 묘향산 고속도로는 북에서는 몇 개 안되는 하이 웨이 중 하나다. 인구나 자동차가 그리 많지 않은 북한에는 고속도로가 많지 않은 편이다. 차선도 2차선이고 총 길이는 약 150여 Km 쯤 된다.
한가한 도로를 달리면서 우리는 북한의 시골 모습을 바라 보았다. 평화로운 땅, 가을이 익어가는 풍요로움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스쳐가는 길목에서 가끔 바라보이는 북녘 농민들의 모습은 몹시 가난하게 보인다. 달리는 차 안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비롯하여 자유와 평등, 개인과 집단, 종교와 과학 등등의 이야기를 하느라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한 두어 시간 후 우리는 드디어 울창하게 숲이 우거지고 붉게 단풍이 물들어진 묘향산에 도착했다. 준비된 안내원이 나와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평양북도 영변에 자리하고 있는 묘향산은 잘 알려진 비로봉 (1909미터)을 주봉으로 칠성봉, 향로봉, 천왕봉, 선유봉 등 7개의 높은 봉우리들과 250미터에 이르는 구층폭포를 위시하여 86개나 되는 크고 작은 폭포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묘향산은 남북한을 통털어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과 더불어 4대 명산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묘향산에 얽힌 신화와 전설들도 많이 있는데 특히 <삼국유사>에는 환웅이 처음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태백산>이 바로 <묘향산>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몇년 전 까지만 해도 이곳 역시 평양 직할시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독립된 행정구역이 되어 이전 보다는 여러 면에서 낙후 되어 있다고 한다. 전기도 잘 공급이 않되고 상수도나 하수도, 도로나 통신 등 기간 시설이 잘 작동되지 않는다고 한숨을 쉰다. 그래도 그들은 앵무새 처럼 말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나라에서 삽니다> <저 불쌍한 남조선 인민들을 어서 구출해 내는 것이 우리의 최대 사명입니다> <위대한 수령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의 공산주의가 실패한 결정적 이유는 지도자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쏘련과 동구의 사회주의 체제가 70여년 만에 막을 내린 것은 이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이 결여된 인간들을 지도자로 세우는 바람에 붕괴된 것이라고 하면서 북조선은 정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를 만난 축복 받은 나라라고 말한다.

마침내 우리는 묘향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국제친선전시관>에 도착했다. <전시관>이란 말 대신에 <전람관>이란 용어를 쓰고 있는 이 곳은 1978년 처음 문을 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푸른 기와를 올린 청와대 지붕의 모습을 지녔으나 건물은 나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콘크리트로만 지어져 성곽처럼 든든하게 보였다. 안내하는 여성은 이 전시관 건물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으면서도 모든 빛과 습도를 자동적으로 조절한다고 자랑하며 이 건축물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건축양식인 한옥을 재현해 낸 기념비와 같은 것임을 강조했다. 6층이나 되는 대형 건물 안에는 모두100여 개의 전시실들이 있다고 한다. 그 중 우리는 몇 개의 방을 둘러 보았는데 이 전시관들은 모두 김일성 원수와 김정일 동지에게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받친 각종 선물들과 기념품들을 전시해 놓은 곳이었다. 여기에는 세계 180여 개 나라의 왕과 여왕, 대통령과 수상 등 최고 지도자들과 유명 인사들이 직접 김일성과 김정일을 찾아와서 받쳤거나 보내온 선물들 10만여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안내인은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과 빌리 그래함 목사 같은 이들이 드린 선물들을 특별히 강조해서 설명했다. 그 외에도 이 전시관에는 김일성의 수많은 초상화와 조각품들을 비롯하여 외국의 여러 나라에서 그들의 언어로 출판한 주체사상과 관계되는 책, 공예품, 가구, 시계, 박제품, 의복, 축문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둘러 보지는 못했다.
전시관을 나온 우리는 그분들이 미리 준비해 온 음식을 가지고 떨어지는 폭포와 흐르는 냇가에서 BBQ,를 했다. 맛있고 참 비싸게 보이는 소고기와 꿩고기를 비롯하여 여러가지 채소들과 흰 쌀밥을 잘 준비해 왔다. 아름다운 묘향산의 가을 풍경과 졸졸졸 흐르는 시냇가에서 이렇게 호사스런 음식을 나누다니 무척 감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런 음식이란 상상도 못할 불쌍한 인민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왔다.

우리는 묘향산 안내인을 따라 <청천여관>이라는 곳에 들렸다. 묘향산 근처에서 흐르는 청천강 이름을 따라 지어진 것으로 보였다. 청천강은 우리가 학생 때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곳으로 배웠던 강이다. 그런데 이 여관에는 전기도 들어왔다 나갔다 하고 물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그들은 우리를 <향산호텔>로 안내했다. 아마도 무엇인가 준비와 시행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향산호텔은 묘향산 기슭에 지어진 특급 호텔로 평양의 류경호텔 처럼 피라미드 형태로 건축되어 있었고 많은 외국 손님들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15층 높이에 객실만 해도 200개가 넘고 여러가지 편의 시설들이 고루 갖추어진 큰 호텔이었다. 그러나 많이 한가하고 참 조용해서 손님들은 별로 없어 보였다. 근처에는 김일성 원수가 숨을 거두었다고 하는 특각도 있다고 한다. 객실을 안내 받은 후 나와 장목사는 사우나로 갔는데 손님이란 우리 둘 뿐이었다. 우린 한 30분 정도만 머물다가 나와서 2층에 있는 바에 들렸다. 거기엔 중국과 일본에서 왔다고 하는 관광객들 여럿이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호텔의 지배인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사람이 와서 우리에게 그들을 인사시켜 주며 그들에게도 우릴 소개해 주었다. 그는 벌써 우리 이름과 직업을 다 알고 있었다. 그리 잘 소통이 되지는 않아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우리는 묘향산 기슭으로 산책을 나왔다. 아름다운 골짜기와 흐르는 물가에 있는 커다란 자연석에는 <김일성원수 만세>라는 구호가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이런 행동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며 김일성원수도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동행한 이목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이구, 인민들이 좋아서 충성으로 하는 일을 어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산책 중 우리는 묘향산에서 풍경화를 그리는 젊은이들을 만났다. 자신들은 근처에 있는 군부대에서 근무하는데 인민군의 미술반원들로서 쉬는 시간엔 이렇게 그림을 그린다고 소개했다. 우리는 서로 통성명을 한 후 그들의 이름을 적었다. <정남식 / 박성옥 / 박명란> 우리는 그들이 그린 풍경화 몇 점을 샀다. 그리고 50원을 주었다.

그 다음 오늘 우리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여기 묘향산에 있는 역사 깊은 보현사였다. 보현사는 고려시대에 지어진 아주 오래된 고찰로써 13층 및 9층 석탑이 있고 백제시대 부터 전해진 수많은 불상과 불교 문화재들과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목판 인쇄본도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북한에서는 최고의 사찰로 여기고 있는 곳이다. 보현사 경내에는 조선불교도련맹이 직접 관리하는 불교박물관도 함께 있다. 아마도 잘 모르기는 해도 서울의 조계종 본사나 아니면 해인사나 통도사 같은 대사찰과 버금가는 곳이 아닐까 싶었다. 우리를 마중해 준 주지 백운스님은 극진한 예를 갖추어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 우리도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보조하는 여성 불자도 예의 바르게 대해 주었다. 그들은 우리를 대웅전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부처님 앞에 합장으로 절하고 나와서 스님의 설명을 들었다. 스님의 말씀에 의히면 보현사에는 20여 명의 출가한 스님이 있는데 전국적으로는 약 100여 명의 스님이 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대처승도 있고 삭발을 하지 않은 스님도 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불자들은 천여 명 정도가 되는데 북한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철저하게 보장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힘을 주어 말했다. <이곳 보현사는 6.25 때 미군들의 폭격에 의해 거의 전소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수령님께서는 우리 보현사를 완전하게 재건시켜 주셨고 살아 생전에 친히 이 보현사만도 17차례나 찿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스님이 말하는 김일성 체제가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라는 말에는 많은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아는 공산주의는 <종교란 민중의 아편이며 가장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집단>이기에 결코 용납해서는 않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향산호텔로 돌아온 우리들의 저녁식사는 부폐식이었다. 묘향산 산나물을 주로한 푸짐한 음식이 차려졌다. 점심을 잘 들어서 많이 먹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것 저것 골고롭게 맛있게 먹었다. 우리들은 모두 피곤에 지치기도 했고 나는 또 일기를 정리하느라 일찍 방으로 올라왔다. (계속) * 홍길복 (2026. 5.4)

나의 북한 방문기(7)
<1977년 10월 18일 (토요일) 숙천군 – 흐림 / 평양 – 맑고 개이다>
토요일 아침, 묘향산의 공기는 맑고 찼다. 호텔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안개가 자욱하다. 흐르는 물소리는 사방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고 마치 클라식 음악이 연주되는 것 처럼 들렸다.
단풍은 온 천지를 울긋불긋 붉게 물들여 놓았다. 새벽 공기는 방안을 시원하고 유쾌하게 만들어 주었다. 참 상쾌한 아침이다. 그러나 오늘은 그리 행복한 날이 아니었다. 아니 슬프고 가슴이 져린 하루였다. 그 후 우리가 찾아간 하루의 일정이 아침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묘향산에 자리하고 있는 특급호텔이라고는 하지만 손님이 별로 없어 썰렁하게 보이는 식당에서 아침을 나눈 후 우리 일행은 향산호텔을 떠났다. 우리를 안내하는 두분 목사님들과 그 일행들은 어디에서 주무셨는지 모르겠다. 아침식사가 끝날 무렵 우리를 찾아와 두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다시 남쪽으로 달리리 시작했다. 한 두어 시간 후 아침 10시경 우리가 도착한 곳은 평안남도 숙천군의 해안가였다. 이목사와 황목사는 달리는 차 안에서 숙천군과 지난 8월 그 지역에서 발생했던 해일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숙천군은 평양에서 서북쪽에 위치한 북한의 곡창지대중 한 곳이다. 邑소재지는 한 곳이지만 20여 개의 里로 구성되어 있는 비교적 큰 郡이라고 했다. 서해 (황해바다)를 맞대고 있는 숙천군은 밀물과 썰물을 조절해 주는 관개시설도 아주 잘되어 있고 간척지도 넓어서 문전옥탑을 이루는 곳이라고 했다. 동쪽으로는 산이 높은 편이지만 서쪽으로 갈수록 넓은 평야가 펼치어져 안주평야와 맞다아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지난 8월에 눈깝짝할 사이도 없이 갑작스럽게 해일이 덮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많은 인민들이 집과 농토를 잃어버려 이재민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수해 현장에 도착했다. 해외동포원호회 일로 시드니에서 온 임용모장로와 이문철집사, 그리고 독일교회에서 온 사람 두 분이 함께 둘러보게 되었다. 우리가 수해 현장 중 처음 찾아 간 곳은 창동리의 한 집단농장이었다. 그 농장의 책임동무라는 사람이 나서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전날 밤 우리 숙천군과 인접한 황해 바다에서는 무척 쎈 태풍이 불어왔고 아주 큰 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나 날이 밝아오자 좀 잠잠해 지는듯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지 갑자기 아침 한 10시 쯤 되어 다시 바람이 불고 억수같은 비가 퍼붓더니 저기 바닷물을 막아주던 우리 숙천군의 문지기 방파제가 무너져버렸습니다. 방파제는 한 2-300미터 쯤이나 무너져 버렸고 이곳 저곳엔 커다란 구멍이 뚫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그만 눈깜짝 할 사이도 없이 100미터도 더 되는 높은 파도가 밀어닥쳐 온 마을과 전답을 모두 휩쓸어 갔습니다 (오즉이나 큰 파도였으면 그이는 100미터나 된다고 했을까?). 아마 그런 해일이 한밤에 밀려왔더라면 우리 농장에 사는 인민들은 한 사람도 못살고 다 죽었을 겁니다.> 그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차마 눈뜨고 보기도 힘들고 듣기도 고통스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도 울음을 참기가 참 어려웠다. 몇 가지 질문을 했지만 자세한 숫자 같은 것은 말하지 않았다. 주변엔 어린아이들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가지고 간 사탕과 노트와 볼펜 등을 나누어 주면서 몇 살이냐고 물어 보았다. 나는 한 대여섯살 쯤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열 살이라고 했다. 제대로 먹질 못해서 키는 작고 발육이 늦어 몸집이 아주 작아 보였다. 우리들에게 부탁 할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책임동무는 수해 이후 수령님께서 모든 것들을 다 해결해 주어서 먹을 것이나 의약품 같은 것은 충분하다면서 지금 필요한 것은 트럭이나 트랙터 같은 농기구를 도와 주면 좋겠다고 했다. 곧 겨울은 다가 올텐데 입고 있는 옷이나 신고 있는 신발을 보면 필요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닐듯한데 그들은 꼭 시키는 대로만 말하는 것 같아서 더더욱 가슴이 져려 왔다. 우리는 봇물이 터져 무너진 제방에 올라 약 한 시간 정도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다. 말로는 도저히 힘이 될 수도 없고 보탬이 되지도 못할 것 같은 참화의 현장에서 <고난의 행군>을 이어가는 그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지금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경제적 도움이나 구호활동이 이 거대한 구조적 악의 체제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민들에게 무슨 도움과 보탬이 될 수 있을까? 괴롭고 아픈 갈등이 우리를 많이 슬프게 만든다.
그런데 그날 나를 더 슬프게 만든 말은 그 책임동무의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였다. <그래도 말입니다. 우린 그런 무서운 해일 중에서도 우리 농장과 집에 걸려 있는 김일성원수와 김정일동무의 사진은 단 하나도 분실하거나 물에 적시지 않고 모두 다 들고 나왔습니다. 우리는 수령님의 사진을 들고 목숨을 걸고 온 힘을 다하여 뛰고 뛰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된 것은 다 수령님의 은덕입니다.> 지난 몇일 동안 평양과 묘향산은 물론 어디를 가서 누구를 만나던지 한 목소리로 외치는 북한동포들의 3대 구호와 그 외침이 여기 비참한 자연재난의 현장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는 김정일동지를 중심으로 하는혁명의 수뇌부를 목숨을 걸고 사수한다> <당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
수해를 당해 고통당하는 현실 보다 내 가슴을 더 져미게 하는 것은, 인간이란 존재의 무지와 한계성 때문이었다. 슬프게도 인간이란 한번 세뇌당하여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확정하게 되면 결코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존재다. 인간은 결코 이성적 존재가 아니다.

평양으로 돌아왔다. 약간 늦은 점심을 들게 되었다. 그들은 우리를 그 유명한 옥류관으로 데려갔다. 강영섭목사가 먼져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한번 쯤은 가게될 줄 알고 있던 식당이지만 그래도 오늘 같이 수해 현장을 보고 와서 아픈 마음을 갖고 옥류관 냉면을 먹도록 일정을 잡다니 <그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옥류관은 대동강변에 한옥 지붕을 얹고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2층 식당으로 본관과 별관 두 채가 있다. 좌석만 해도 본관과 별관을 포함하여 모두 2200석이나 되는 북한을 대표하는 식당이다. 옥류관은 1960년에 김일성원수의 지시에 의해 일반 인민들을 위해서 문을 연 곳이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외국인 관광객들과 당 간부들이나 특권층이 주로 이용하는 식당이 되었다. 일반 서민들에게는 음식값이 너무 비싸서 먹기가 힘들다고 한다. 주메뉴는 평양냉면이지만 그외 쟁반국수와 녹두지짐, 거위고기와 갈비국밥, 술떡과 전골 등으로 다양한 음식들이 나온다. 2층의 별실로 안내를 받은 우리는 냉면과 녹두지짐을 들었다. <정말 이게 진짜 평양냉면이야!>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도 맛있고 비싼 옥류관 냉면을 다 먹지도 않고 슬쩍 밀어내는 강목사가 아주 미웠다. 그의 위장된 오만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식사 후 우리는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주체사상탑으로 안내를 받았다. 김일성원수의 70회 생일을 기념하여 대동강변에 화강암으로 세워진 이 탑은 그 높이만 해도 170미터나 된다.
망치를 들고 있는 노동자, 낫을 들고 있는 농민 그리고 붓을 들고 있는 지식인들이 서있는 그 뒤에는 하늘을 향해 횃불을 들고 있는 거대한 주체사상탑이 치솟아 있다.
오늘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이 탑은 150미터 까지 엘리베이터가 오를 수 있으며 거기에는 전망대가 있다고 한다.
탑 정면에 쓰여진 헌시에는 주체사상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귀절이 곳곳에 새겨 있었다.
<빛나라 주체사상이여 / 주체의 횃불은 온 누리에 타오른다 /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다 / 사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 이것이 주체사상의 기초이다 / 아 인류를 해방시키는 장엄한 선언이여 / 영원하여라 주체의 태양이여 / 공산주의의 휘황한 미래를 앞당기리라 / 아 조선의 영광, 인류의 행복 / 만대에 길이 빛나라 영생불멸의 주체사상이여>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다시 고려호텔로 돌아왔다. 1층 사우나에 갔다. 일본에서 온 조총련계 사람들이 여럿 있어서 인사를 나누었다. 장목사는 다른 일행과 같이 저녁식사를 하러 나가고 나는그냥 오늘의 일기를 가다듬은 후 먼저 잘테니 천천히 오라고 했다. 묘향산, 향산호텔, 숙천군에서 만난 인민들과 어린아이들의 몰골, 우리를 태우고 다니는 운전사의 눈빛, 불쌍한 내 동족들, 옥류관과 냉면, 주체사상탑… 하루를 돌이켜 보며 어쩔줄 몰라하는 내 그림자를 바라본다.<계속> *홍길복 (2026. 5. 4)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