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설교 : 성서속에 던져진 질문들 (9)

주제 : 성서속에 던져진 위대한 질문들 (The Great Questions in the Bible)
오늘의 본문 : 욥기 38장 1 – 7절
오늘의 제목 :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Who are you to question my wisdom with your ignorant, empty words ?)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욥기 38장 1~7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욥기는 성문서에 속합니다. 유대인들의 히브리어 성경도 그렇고, 우리 기독교에서도 욥기는 구약에서 시편이나 잠언, 전도서나 아가서 처럼 문학작품으로 분류합니다. 그런 중에서도 특히 욥기는 잠언과 함께 <지혜문학>의 정수에 속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욥이라는 인물이 실존했던 사람이냐, 아니냐를 놓고 논쟁을 벌리지는 않습니다. 이 책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문중 하나를 놓고 끈질기게 논쟁을 벌립니다. <왜 의인에게도 고난이 있는가? 인간 세상에는 왜 우리가 도저히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이 닥쳐오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합니다.
성경은 신구약 모두를 통털어서 욥을 최고로 의롭고 온전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의로운 인물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와 양과 약대와 하인들을 거닐었고 아들 7에 딸 3을 둔 정말 유복하고 축복 받은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도 완전했고 신앙적으로도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며 악에서 떠났던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어서 마치 의로운 사람의 아이콘 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욥에게 어느날 갑작스럽게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비극이 엄습해 왔습니다. 그것은 어느날 사탄이 하나님을 찾아와 질문을 던지는 데서 부터 비롯됩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말합니다. <하나님, 저 욥이란 사람이 이렇게 의롭게 살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옳바르게 살아온 것은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에겐 지금까지 아무런 시련이나 아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욥을 지켜 주시고 축복해 주셨기에 그가 하나님을 잘 섬겨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한번 그를 쳐 보시옵소서. 그에게 고난과 고통과 시련을 안겨 보시옵소서. 그러면 그도 틀림없이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하나님은 사탄에게 말합니다. <그래? 그럼 네가 직접 욥을 쳐서 그에게 한 번 고난을 주어 보아라. 그러나 목숨 만은 건들지 말아라> 종교적 신앙이나 신학으로는 불가능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하여튼 문학작품으로써의 욥기는 이렇듯 하나님과 사탄의 합의된 결정에 따라 욥에게는 엄청난 비극이 몰려오기 시작합니다. 하루 아침에 그렇게 많던 소와 양과 낙타떼들은 약탈당하고 천재지변 까지 일어나 모두가 다 싹쓸이를 당했습니다. 논과 밭과 초창은 물론이고 그 많던 종과 하인들 까지 모두 몰살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더 비참한 일이 이어졌습니다. 어느날 한자리에 모여 생일 잔치를 하던 10명의 자녀들이 몰려온 태풍과 토네이도에 휩쓸려서 모두 한자리에서 떼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엔 욥의 아내 마져도 욥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으면서 남편을 향해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소리 소리를 지릅니다. 욥 자신 또한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온갖 질병에 걸려 고통을 당하며 기와장으로 자기의 몸을 끍어댈 정도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게 많던 재산, 열 명이나 되던 자녀들, 사랑스러웠던 아내, 건강했던 육체에 이르기 까지 어느 것 하나 성한 곳이 없이 완전하고 철저하게 파멸을 당했습니다.
욥의 고난과 비극은 이렇게 하나님과 사탄이 함께 합작하여 엮어낸 <우리가 도저히 이해 할 수도 없고 받아드리기 힘든 인간 고난과 비극의 문제>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 후 욥의 비극적 소식을 듣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찾아온 엘리후를 비롯한 욥의 4친구들과 욥은 긴 논쟁을 이어갑니다. 3장 부터 37장 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의 눈으로 볼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고난> <인간의 이성과 지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논의와 논쟁은 한도 없고 끝도 없는 말싸움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욥은 아무런 잘못을 져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한 순간에 그렇게 엄청난 고난을 당해야 할 이유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합니다. <나는 죄가 없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공정하지 않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해 할수가 없다>는 것이 욥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런데 이 비극적 소식을 듣고 욥을 위로해 주겠다고 찾아온 친구들은 집요하게 욥을 비난합니다. <욥아. 너도 하나의 인간이다. 인간 중에 죄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인간이란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지으면서 사는 존재다. 너 역시 너도 알지 못하는 죄를 짖고 살아온 사람이다. 원인 없는 결과란 없는 법이다. 모든 고난과 고통,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비극과 불행은 다 죄의 결과다. 지금 너에게 닥쳐온 이 모든 비극은 죄의 결과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엎드려 자복해라> 이것이 전통적 죄형법정주의 틀을 지키려는 친구들의 논리였고 훗날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교리의 틀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이런 요청을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욥기서는 이후 서른 다섯장에 걸쳐 욥과 그의 친구들의 동어반복적 논쟁과 말싸움을 이어 갑니다.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 받을 수 없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풀리지 않는 신비로운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고 생각하는대로 움직이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초월하시고 우리의 경험과는 어긋나게 행하시는 분입니다. 정말로 그는 <신비한 존재요, 알 수 없는 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욥기서가 왜 지혜문학에 속하는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근본임>을 다시 한번 더 새롭게 깨우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몰라도 믿고 이해가 않되어도 받아드리고 신비롭고 경이스럽기에 더욱 더 찬양하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만이 참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알 수도 없고 이해 할 수도 없는 신비로운 분이십니다. 우리는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알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자, 이쯤해서 우리는 오늘 우리들에게 던지신 주님의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폭풍우 가운데서 욥에게 나타나시어 말씀하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Who are you to question my wisdom with your ignorant, empty words? <어리석고 말도 않되는 이야기를 가지고 내가 하는 일에 문제를 제기하는 자는 도대체 누구냐?> 표준 새번역입니다. <네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이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38장 4절 부터 41장 사이에서 이와 비슷한 질문을 70여 회나 반복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누가 이 세상의 도량법을 정했는지 너는 알고 있느냐? 이 세상의 주춧돌은 누가 놓았는지 아느냐?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는지 아느냐? 바닷물은 누가 한 곳으로 모았는지 아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알고 있느냐? 트집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너는 너의 의를 정당화 하려고 나를 악하다고 할 작정이냐? 정말 알량한 지혜라 할지라도 너에게 그 지혜를 준 이가 누구인지 너는 아느냐?> 등등 하나님의 질문은 무더기로 쏟아집니다. <네가 아느냐? 네가 보았느냐? 네가 할 수 있느냐?> 3가지로 요약되는 이 질문들은 결국 앞에서 오늘 우리들에게 던지신 질문 –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만드는 자가 누구냐? – 하는 질문에 대해 다양하게 확대되고 변형된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질문은 과학만능의 시대라고 하는 지금도 신비에 가려져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1초 동안 가는 거리는 보통 약 30만 Km라고 합니다.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는 약 9조 5천억 Km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빛은 약 400억년 쯤을 가도 우주의 끝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필리핀 동쪽에 있는 마리아나 해구는 그 깊이가 약 1만 2천 미터라고 합니다. 눈과 비, 해와 달, 홍수와 가뭄, 우뢰와 번개, 얼음과 서리, 묘성과 삼성, 별자리와 북극성 – 우주의 신비, 그리고 그 신비에 도전하는 인간이란 존재는 도대체 알고 있는 게 무엇이고 설명할 수 있는게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과학자들? 천문학자들? 시인들? 화가들? 음악가들? 종교인들? 목사님들? 아닙니다. 일흔 개도 더 되는 긴 질문 끝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40장에 이르러 욥과 그의 친구들에게 최후의 통첩을 내리십니다. <나를 향하여 트집 잡는 자는 누구냐? 전능자와 한판 붙어보겠다고 큰 소리치는 자는 누구냐? 나와라! 입을 벌려 한번 말해 보아라!> – 욥기의 정점, 욥기의 클라이막스는 바로 이 때 나타납니다. 욥은 마침내 엎드려 이렇게 말합니다. <보시옵소서 저는 비천한 인간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주님께 입을 벌려 말 할 수 있사오리까? 이젠 그만 손으로 제 입을 가리울 뿐입니다. 다시는 떠들어 대며 말하지 아니하리이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우주의 신비와 인간의 역사는 결코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 인간의 경험이나 상상력으로는 결단코 이해 할 수도 없고 풀려지지도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신비입니다.
물론 세상에는 애매한 고난과 아픔이 많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비극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들도 많이 발생합니다. 납득되지 않는 죽음이 비일비재합니다. 억울하기 그지 없는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상식으로는 이해가 않되고 양심으로는 받아드리기 어렵고 기도를 해도 좀처럼 풀리지 않는 일들이 정말 시도 없고 때도 없이 우리를 질식 시키려고 달려듭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어온 전쟁의 역사는 셀 수도 없습니다. 처참하고 처절했던 침략과 수탈, 전쟁과 정복은 일일히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16세기 이후 자행된 유럽 열강들의 아프리카와 남북미 및 동남 아시아와 남태평양을 향한 식민지 수탈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악의 정형입니다. 13세기부터 시작되었던 몽골제국의 유라시아정복전쟁을 위시하여 1,2차 세계대전과 이어진 독소전쟁, 태평양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그리고 최근까지 연속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 미국과 이란 전쟁에 이르기 까지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비극과 살륙은 욥이라는 한 개인이 격은 스토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정말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는 인간 삶의 비극입니다. 어디 그 뿐 입니까? 놀라지 마십시요. 지금도 미국에서만 1년에 총기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평균 4만 건을 넘고 있습니다. 또 지금까지 이 지구촌을 휩쓸고 간 자연 재난은 얼마나 크고 엄청났습니까? 아주 옛날은 빼고 근래의 역사만 보아도 1931년 중국의 황하와 양쯔강의 범람은 4백만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역사상 최대의 피해를 안긴 자연 재난으로 남아있습니다. 1970년 방글라데시를 강타한 사이클론은 해일과 함께 불과 몇 일 만에 50만 명의 목숨을 앗아 갔습니다. 1976년 중국의 탕산 지진은 65만 명을 몰살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기억 나시지요? 2004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에서의 해저 지진은 23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2010년 아이티 지진은 21세기 최대의 인명피해로 32만 명을 몰살시켰습니다. 이런 처절한 비극적 역사는 집단적으로 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도 욥은 저리 가라할 정도로 슬프고 비극적인 일들이 지난날 우리의 삶을 불게 물들여왔습니다. 말을 않하고 못해서 그렇지, 사실 6.25와 같은 동족상쟁의 비극을 경험하고 바로 내 눈 앞에서 폭격으로 처참하게 죽으신 부모님이나 자식들의 최후를 목도한 사람들의 이야길 우리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피난길에 나서 굶기를 먹기 처럼 하면서 겨우 목숨을 건져온 난민들의 이야기 역시 욥의 비참함과 같이 이해가 않되는 슬픔과 비극의 스토리들입니다. 그럴 때 마다 우리중 좀 생각이 깊고 공부 좀 했고 또 신앙심도 깊다고 하는 이들 중에서는 어떻게든지 이런 이해되지 아니하는 인간사들에 대하여 이론을 만들고 논리를 전개하고 이해 시켜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자들, 교수들, 박사들, 전문가들, 변호사들, 정치인들, 목사들, 신부들, 스님들 – 똑똑하고 말 잘하는 분들이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들의 설명이 그럴싸 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짜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를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는 무한한 실재를 알 수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간 속에서 사는 사람에게 영원이란 추상적 언어이지 체감되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인간일뿐입니다. 그래서 욥기는 끝에 이르러 이렇듯 이해 되지도 않고 이해 시킬 수도 없는 일을 가지고 마치 이해 되고 이해 시킬 수 있는 양 떠벌이고 있는 인간들을 향하여 마침내 이렇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나와라!>
세상에는 말 가지고는 설명이 않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아무리 말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이해 시키지 못하는 것도 많습니다. 차라리 그냥 받아드리는 것이 오히려 훗날엔 더 잘 이해될 때도 적지 않습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고난, 죽으심과 다시 사심은 인간의 이성과 언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처음엔 그 쓴 잔을 물리쳐 달라고 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마침내 그 이해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결정을 받아드립니다. <아버지여,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사> 바로 이 이해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을 그냥 받아드림으로 주님은 이해를 초월하는 구원의 신비를 만들어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해 내셨습니다. 그것이 욥과 예수님의 차이점 이라고 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대신하는 욥과 그의 친구들은 이해되지 않는 고난을 이해해 보려고 몸부림 치고 논쟁하고 이론을 만들어 볼려고 했으나 예수님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지 아니하고 자기 앞에 주어진 아픔과 비극과 알 수 없는 현실을 그냥 그대로 받아드림으로 마침내는 하나님의 신비한 뜻을 알게 해 주었고 인류를 구원해 내게 되었습니다.
지혜문학의 정수인 욥기는 주인공 욥을 이해할 수 없는 최고의 비극 까지도 묵묵히 받아드림으로 마침내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게 만들어 줍니다. <주님,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운 자는 저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했고 알지도 못하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가지고 떠들어댔습니다. 보시옵소서, 저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말하오리이까? 내 손으로 내 입을 가리울 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받아드리기 어려운 것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힘든 것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허리를 숙여 엎드리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으로 하여금 의인의 아이콘 자리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었고 그가 처음 받았던 온갖 축복의 갑절을 넘어서 그의말년이 그의 시작 보다 더 아름답게 되어지는 해피 엔딩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화이트헤드는 캠브릿지대학 교수직을 사임하면서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최고 최대의 바보집단은 대학교수 사회다” <너 자신을 알라, Know yourself> 굳이 소크라테스의 말을 다시 빌리지 않아도 인간 최고의 숙제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하고 어리석고 제한적 존재인지 똑바로 알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온 우주의 신비와 비밀을 다 알고 있고 또 알 수 있는 양 자만해서는 않됩니다. 무지한 말과 논리로 하나님의 신비를 알아보겠다고 허세를 부려서는 않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말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일언지하로 내리치십니다. <무지한 말로 내 생각을 가리우지 말아라!> 동일한 지혜문학서인 전도서는 이를 더욱 더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아라 하나님이 구부러 놓으신 일을 어느 누가 곧게 펼 수가 있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해 보아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래서 사람이란 그의 장래를 능히 헤아릴 수가 없느니라>(전도서 7장 13-14절)
말씀을 마무리 하면서 저는 오늘 하나님께서 욥에게 던지셨던 질문을 저를 향하신 음성으로 다시 새겨봅니다. <목사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무지하고 어리석은 말과 제한적 인간 지식을 가지고 떠들어 온 자는 누구냐?> 이제 저는 머리를 숙입니다. <주님, 그것은 욥이 아닙니다. 엘리바스도 아니고 빌닷도 아닙니다. 소발도 아니고 엘리후도 아닙니다. 그 자는 바로 저, 홍길복입니다. 이제까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고 생각을 어둡게 했던 인간은 바로 저 홍길복입니다. 저를 용서하시옵소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아멘>

홍길복 목사
(호주연합교회와 해외한인장로교회 은퇴목사)
홍길복 목사는 황해도 황주 출생 (1944)으로 연세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다. 1980년 호주로 건너와 40여년 간 이민목회를 하는 동안 시드니제일교회와 시드니우리교회를 섬겼고, 호주연합교단과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여러 기관에서 일했다.
2010년 6월 은퇴 후에는 후학들과 대화를 나누며 길벗들과 여행하는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다. 자신이 경험한 이민, 특히 이민한 기독교인들의 삶을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내는 글쓰기를 바탕으로 ‘동양인 예수’, ‘내 백성을 위로하라’, ‘성경에 나타난 이민자 이야기’, ‘이민자 예수’ 등의 책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