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복 목사의 세 번째 잡기장 (68) 중에서 _ 9월 30일자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참 고귀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이상적인 종교적 교훈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예외적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이 ‘원수도 자기 자신처럼 대하기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냥 조금은 쉽게, ‘네 이웃은 네 이웃으로 대해주어라’가 그래도 실천 가능성이 많이 높은 가르침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여기에 인간이해에 대한 종교적 가르침과 철학적 생각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네 이웃은 그냥 네 이웃으로 대해주어라’
에마뉘엘 레비나스 (Emmanuel Levinas, 1906 ~ 1995)는 인문학적 및 철학적 인간관계에 대하여 종교적 이상을 현실적 가능성으로 이해한 사람입니다. 그는 ‘타인을 나 처럼 여기지 말고’ ‘타인은 그냥 타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드리고 타인으로 존중해 줄 것’을 주장하고 요청합니다. 무슨 ‘원수까지나’ 하면서 ‘인간을 인간으로’ ‘타자를 타자로’ 여기면서 사는 태도가 종교인이 아닌 상식적 범인들의 바른 인간관계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레비나스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나온 유태계 리투아니아 사람으로 프랑스 현대 철학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타자성의 철학자’요 ‘타자가 존재함으로 자아가 존재한다’는 명제로 널리 알려진 인문학자입니다. ‘윤리학은 존재론에 앞선다’ – Ethics precedes Ontology – 는 생각을 갖고 평생을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과 함께 살 것인가?’ 하며 몸부림치며 호로코스트의 경험을 통한 ‘나와 타인과의 가장 바람직하고 실천가능한 관계’ 문제와 씨름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자꾸 나 처럼 생각하거나 나 처럼 대하려고 애쓰지 말아라. 다른 사람을 나처럼, 내 식구처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처럼, 내 자식 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대해주는 데서 자꾸만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이웃은 내가 아니다. 이웃은 이웃이고 타인이다. 그럼으로 이웃은 나처럼, 내 몸처럼 대해 주어서는 않된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다. 이웃은 이웃답게 대해주고 타인은 타안으로 대접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레비나스는 나와 타인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자각하고,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은 종교적 이상이나 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그것을 ‘인간 이성’ 혹은 ‘인간이성의 회복’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것,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는 능력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능력’ 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인간관계에서 비극적 파국을 만나게 된 원인은 인간 이성의 상실 때문이라는 것이 레비나스의 진단입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타인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 폭력 당하는 사회적 약자들 – 흑인들, 원주민들, 여인들, 어린이들, 난민들 등등 – 그들의 참상을 보면서도 못 본척 하는 것, 사회적 악과 불의와 불공정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등은 모두 ‘신앙이나 양심이 무디거나 약해져서’라고 해석하면 접근하기가 더 어렵다는 겁니다. ‘이성적 인간이 되어야한다. 오늘날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개의 관계의 파괴현상은 ‘우리가 결코 이성적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이 레비나스의 생각입니다.
‘이성적 인간은 타자를 자기와 같은 하나의 인간으로 본다. 비이성적 인간은 언제나 타자를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물질로 본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들은 타자를, 타자의 인격과 생명을 돈으로 교환 가능한 money exchange로 대치한다.’
물론 종교적 인간이해와 인문학적 타자이해는 대립되거나 상치되는 것은 아니지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 나 ‘타인을 정직하게 나와 같은 하나의 사람으로 대하는 일’은 함께 가야할 우리 모두의 숙제입니다.
타인을 생각하며 모든 어려운 이들을 기억하며 감사와 마음을 함께하는 추석이 되시옵소서 !
Carpe diem !
Bonam fortunam !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