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출생 · 사망한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 · 군인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Gaius Cassius Longinus, BC 85 ~ BC 42)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Gaius Cassius Longinus, 기원전 85년 10월 3일 ~ 기원전 42년 10월 3일)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의 주동자이며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매제였다.
기원전 1세기의 로마에서 활동한 원로원 의원이자 무장으로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암살을 주도한다.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Gaius Cassius Longinus)
.출생: BC 85년 10월 3일, 로마 공화정 로마 (이탈리아 로마)
.사망: BC 42년 10월 3일, 마케도니아 필리피 근처 (그리스 트라키 주 필리포이)
.배우자: Junia Tertia
.직업: 군인, 정치가
* 군 경력
.계급: 불명
.복무기간: 기원전 54년 ~ 기원전 42년
.참전: 카르헤 전투 (기원전53년),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내전, 카이사르의 암살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기원전 85년 ~ 기원전 42년)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 중 한 명이며, 그의 매제인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해방자들 (Liberatores)’을 이끌었다.
카이사르 암살 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제2차 삼두정치 세력에 맞서 싸웠으나, 필리피 전투에서 패배하고 기원전 42년에 자결했다.

○ 생애 및 활동
– 초기의 생애
카시우스의 초기 생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는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의 딸이자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아버지가 다른 누이인 유니아 테르티아와 결혼하였다.
로도스 섬에서 아켈라우스밑에서 공부하였고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하였다고 한다.
기원전 53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밑에서 재무관을 지낸 것이 첫 공직생활이었다.
크라수스의 시리아 원정 당시 함께 종군하여 크라수스에게 유프라테스 강에서 적진 깊숙이 들어가지 말 것을 조언했으나 무시되었다.
이후에도 몇 번씩 크라수스에게 군사적 조언을 했으나 통하지 않았고 카르하이 전투에서 카시우스는 크라수스를 버리고 기병 500명과 함께 겨우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고 크라수스는 전사했다.
전투 이후 시리아에서 파르티아와 대적하면서 몇 년을 더 보내다가 로마로 돌아왔다.

– 내전기간
기원전 50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의 전면전이 일어나자 당연히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폼페이우스 파에 가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형이었던 루키우스 카시우스는 카이사르의 측근으로 활약한다.
폼페이우스 파에서 해군을 지휘하면서 적지 않은 공을 세웠지만 파르살루스 회전을 끝으로 내전은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난다.
물론 이후에도 잔존 세력이 북아프리카와 히스파니아 등지에서 이따금 반란을 일으켰지만 카시우스는 이들에게 합류하지 않고 로마로 귀환한다.
내전 시기 관용으로 유명했던 카이사르인만큼 당연히 원로원 의석도 유지됐다.
로마에서 그는 시리아에서의 강탈로 인해 재판을 받을 위기에 처했는데 때마침 일어난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내전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카시우스는 “원로원파”의 일원으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자 그리스로 달아나 폼페이우스와 합류했고 원로원파의 함대를 지휘하면서 기원전 48년 시칠리아의 카이사르 군을 공격했다.
이후 계속 함대를 이끌고 지중해 일대에서 카이사르의 해군을 괴롭혔는데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가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방으로 도망치다가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카이사르에게 무조건 항복하였다.
그는 카이사르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로 하고 카이사르의 군단장이 되어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내전에 참가했고 이후 폰투스의 파르나케스 2세와의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카시우스는 아프리카에서 카토와 싸우는 것을 거부하고 로마로 돌아왔고 그 후 키케로와 친분을 쌓았다.

– 카이사르 암살
내전이 끝난 후 기원전 44년 그는 처남인 브루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에 의해 법무관이 되었다.
이때 카시우스는 브루투스가 수도담당 법무관이 되고 경력에서 처남을 훨씬 능가하는 자신이 차석 법무관이 된 것에 불만을 품었고 카이사르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카이사르가 그를 신뢰하지 않은 것은 그가 크라수스를 배신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그는 카이사르의 암살을 계획하고 처남이자 사람들의 신임을 받는 브루투스를 끌어들였다.
3월 15일 그는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오는 카이사르를 다른 주모자들과 함께 암살했다.
내전이 종결된 이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은채 로마에서 칩거하던 카시우스는 기원전 44년 마르쿠스 브루투스와 함께 카이사르의 암살을 주도한다.
그렇지만 기쁨은 너무나 짧아서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권력을 쥐었던데다가 암살자들은 명분도, 재력도, 힘도 없었다.
이미 탑수스 전투 때 거물급 반 카이사르파 인사들이 대거 전사하거나 항복했기 때문에 카이사르에 대항할만한 권위를 지닌 인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키케로와 카시우스가 안토니우스도 죽였어야 됐다고 한탄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정작 그 안토니우스가 중재를 하지 않았다면 카이사르 암살자들은 강경파로서 ‘기병대장’의 직위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들어왔던 레피두스에 의해 전부 죽은 목숨이었다. 일반 시민들 역시 대놓고 ‘아버지를 죽인 놈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암살자들에 대한 반응은 냉랭함을 넘어서 적대 그 자체였다.

– 카이사르 암살 이후
카이사르 암살 이후, 폭도로 변한 시민들과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은 암살자들을 위협했고 혼란을 틈타 권력을 장악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암살자들과 타협하였다.
암살의 주동자인 카시우스는 성난 민중을 피해 로마에서 달아나 시리아 속주 총독자격으로 망명하듯 떠났다.
한편 로마에서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로 서서히 옥타비아누스가 부상하고 있었고 그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고 카이사르 암살파에 대한 복수에 나섰다.
카시우스는 시리아에서 군사를 모집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트라키아로 진격했다.
그는 브루투스와 함께 그리스에서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였다.
기원전 42년 10월 마케도니아 동부 필리피 전투에서 카시우스는 안토니우스를 맞아 싸웠으나 패했다.
브루투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맞아 이겼지만 카시우스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채 절망하여 자살했다.
○ 기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의하면 유년기 시절 술라의 아들과 술라의 통치에 관해 독재자를 싫어하던 모습을 보여주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단테는 ‘신곡’을 통해 카시우스가 지옥 최하층에서 루시퍼 발 밑에 깔려 있다고 묘사한 바 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