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7년 8월 1일,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로렌초 발라 (Lorenzo Valla, 1407 ~ 1457) 별세
로렌초 발라 (Lorenzo Valla, 1407년 ~ 1457년 8월 1일)는 15세기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다.

– 로렌초 발라 (Lorenzo Valla)
.출생: 1407년, 이탈리아 로마
.사망: 1457년 8월 1일, 이탈리아 로마
.국적: 이탈리아
.학력: 파비아 대학교
.분야: 서기관, 언어문헌학 (言語文獻學)
.업적: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The Donation of Constantine) 문서가 위서임을 증명
.주요저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대한 로렌초 발라의 논문
《콘스탄틴 기증장》이라 불리는 교황청의 문서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문헌학적인 연구를 토대로 하여 그 증거와 함께 폭로한 것으로 유명하다.
로마 출생으로 언어문헌학 (言語文獻學) 방법의 확립자로서 일생 동안 기존 학문에 대해서 비판을 가하였다.

○ 생애 및 활동
로렌초 발라 (Lorenzo Valla)는 1407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출생했다.
1429년 이후 파비아에서 웅변술을 강의했다.
1437년 나폴리로 가서 알폰소왕 (王)의 서기관을 역임하였고, 1448년 로마로 돌아와 만년에는 교황 서기관으로 근무하였다.
키케로 등을 모범으로 삼아 라틴어를 순화할 것을 주장하고, 스콜라 철학자와 로마법학자의 방법과 언어를 비판하였다.
라틴어 《신약성서》의 본문을 교열하였는데, 뒤에 에라스뮈스가 출판하였다.
로마 교황령이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로부터 기부되어 세속의 황제에 대한 로마 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한 근거가 되어온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라는 문서가 조작된 후대 (後代)의 위작 (僞作)이라는 것을 언어문헌학적 역사학적으로 증명한 사람이다.
발라는 〈증서 Declamatio〉 (1440,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에 대한 로렌초 발라의 논문〉으로 1922년 영역)에서 그는 익명의 저자가 쓴 ‘증서’에 나타난 조잡한 라틴어 문체를 밝혀내고, 감정 결과 그것이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하에 씌어진 것일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교황 지상주의를 비판했기 때문에, 당시 교황 에우제니오 4세의 분노를 사 이단심문소에 고발되어 화형을 선고 받았으나 당시 교황과 적대관계였던 알폰소 왕의 중재로 간신히 화형을 면하게 된다.
이 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관용을 보여 발라를 교황청에 초청하여 고전 연구에 종사시켰다.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문서의 위작을 밝혀냄
중세 시대, 로마 교황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름으로 세속 군주에 대한 로마 교황의 우위를 인정’한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The Donation of Constantine)”라는 문서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로렌초 발라는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의 라틴어 문체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문서에서의 라틴어 문체가 다르다는 것을 밝혀내고, 감정 결과 교황령이 제시한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문서가 후대에 의해 조작된 문서임을 언어문헌학적 방법으로 증명하였다.
본래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4세기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분석 결과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위작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로렌초 발라의 연구 결과에 크게 분노했고, 로렌초 발라는 고발당하여 화형을 선고 받았으나 당시에 교황과 적대적 관계에 있던 알폰소 왕의 중재로 형별을 면하게 된다.
이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오히려 로렌초 발라를 교황청으로 초청하여 교회의 고전 문헌에 대해 연구하도록 시킨다.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문서의 위작을 밝혀낸 로렌조 발라 (Lorenzo Valla, 1407 ~ 1457)
1440년 9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자 문헌학자였던 로렌조 발라 (Lorenzo Valla, 1407-1457)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표했다.
지난 700여 년 간 사실성을 의심받지 않았던 ‘콘슨탄틴 기증서’가 위조문서인 것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 기증서’ 라는 문서는 프랑크왕국의 페핀 3세가 중부 이태리의 상당한 땅을 교황에게 헌납했던 756년경부터 광범위하게 회람되기 시작했는데, 이 문서는 토지의 헌납을 정당화 하는데 이용되었다.
문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심한 나병에 걸려 고생하던 콘스탄틴 황제는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허사였다.
그런데 로마의 감독 실베스터 1세에 의해 고침을 받고, 감사의 표시로 로마에 있는 궁궐터와 이탈리아 중부의 상당한 토지를 로마감독에게 기증했다는 내용이다.
이 문서는 신성불가침의 권위로 받아드려졌고, 그 누구도 문서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때 교황 니콜라스 5세의 서기였고, 당시에는 아라곤과 시실리의 왕 알퐁스의 서기였던 로렌조 발라는 이 문서를 검토하는 중에 은밀한 거짓을 발견했다.
언어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이 문서를 검토하는 중에 이 문서에 사용된 라틴어가 4세기 언어가 아니라 8세기의 라틴어임을 알게 되었고, 콘스탄틴황제 때에 사용되지 않는 몇 가지 용어를 발견했다.

‘원로원 의원의 긴 양말,’ ‘황제의 관,’ 그리고 로마의 관리를 칭하는 용어가 4세기의 용법과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특히 로마제국의 관리를 칭하는 ‘사트랍’ (satrap)이라는 용어는 4세기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칭호임을 밝혀냄으로서 그 문서가 후대의 위작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사실 ‘사트랍’은 고대 페르샤제국의 통치자를 칭하는 용어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역사적 문맥과 정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을 통해 이 문서가 4세기의 것이 아니라 8세기에 만들어진 위조문서임을 입증했다.
파장은 대단했다.
중세교회는 도덕적 신뢰를 상실했고, 거짓과 위선의 실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발라 자신은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회유를 거절하자, 그는 거룩한 교회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사악한 야수로 지목되었고, 그의 「콘스탄틴대제의 기증으로 믿어진 선언의 허구성에 관하여」 (De falso Credita et ementita Constantini donatione declamatis)는 금서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발라의 문서고증은 부인할 수 없었기에 당시 교황 에우게네 (Eugenius IV, 1431-1447)는 이 문서가 위서 (僞書)임을 인정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