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4년 4월 25일,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성을 함락시키고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崇禎帝, 1611 ~ 1644)가 자결함으로써 명 (明) 나라 (1368 ~ 1644) 멸망
대명국 (大明國) 또는 대명 (大明), 약칭 명 (明, 병음: Míng 밍)은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속한 중국의 통일왕조로, 한족계 반란군 주원장이 원을 중국에서 몰아내고 세운 마지막 한족 왕조이다.
홍무제와 영락제의 재위 시기에 거대한 운하와 수로가 건설되어 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으나 이후 만력제와 천계제와 같은 암군들이 나오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고 후금의 거듭되는 침략으로 쇠퇴했다.
이후 명나라의 황족과 유신들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남명 정권을 세웠으나, 고질적인 내분과 무능함으로 결국 1662년 경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홍무제는 당시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던 농촌 지역들을 발전시켜 엄격한 사회 제도 내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군사력 증강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명나라는 백만 명에 달하는 상비군을 소유하고 난징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군항을 짓는 등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홍무제는 원나라를 교훈삼아 환관들, 그리고 재력가들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고자 하였고, 장자 계승 원칙을 확립함과 동시에 후대의 황제들을 위하여 황명조훈을 집필하여 절대적인 황권을 구축하려 노력하였다.
허나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건문제가 정난의 변으로 인하여 쫒겨나고 연왕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하며 점차 이같은 장자 계승 원칙은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영락제는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하였고, 자금성을 지었으며 대운하를 정비하였고 과거제를 재시행하였다. 그는 환관들을 주로 등용하여 신권을 잡고 있던 유교 사대부들을 견제하려 들었고, 결과적으로 환관들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이 환관들 중에서는 정화의 원정으로 유명한 환관 정화도 있었다. 정화는 인도양을 건너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까지 다녀오며 명나라의 권위를 해외에 과시한 업적을 남겼다.
명나라는 영락제 사후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정통제가 토목의 변으로 오이라트족에게 잡히면서 명나라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해군력은 정부의 무관심 속에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명나라는 대신 노동력을 징발하여 유조변과 만리장성 등을 개축하였고 북방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는 내지 못했다.
명나라는 세제를 개혁하고 정치제도를 개편하는 등 일련의 개혁조치들을 취했으나 세금을 회피하려는 사람들과 고착화된 관료제 등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명나라 후기에는 인구가 거의 1억 6천만 명에서 2억 명에 달하였으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면세 혜택이 있는 환관들이나 사찰들로 대거 자발적으로 들어가면서 정작 중앙 정부의 세입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또한 이 때에 명나라 조정은 왜구들과 해적들의 약탈을 피하기 위하여 해안 지방에 해금령 (海禁令)을 내려 해외 무역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16세기에는 점차 유럽의 팽창적인 해외 무역 정책이 중국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는 마카오와 같은 항구들에서만 이들과의 교역을 제한적으로 허가하였는데, 이 항구들을 통하여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수많은 작물들이 국내로 유입되었다. 이 때 고추가 들어와 쓰촨 요리에 큰 영향을 주었고, 생산성이 매우 높은 고구마와 감자 등이 새롭게 경작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근과 가뭄의 영향이 크게 줄어들었고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상인들은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중국제 상품들을 사가기 위하여 아메리카 대륙, 일본 등에서 들여온 은을 명나라에게 대금으로 지불하였다.
이렇게 유입된 은은 명나라의 경제를 대대적으로 촉진하였으며 나중에는 세금을 은으로 걷을 정도로 사회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다만 초기에 유교 정통론자들은 상업이 발달하여 사회에서 농업을 밀어내고 주요 산업으로 떠오르는 것에 반대하였으나, 왕양명 등의 개혁가들이 더 관용적인 양명학 등을 개창하며 점차 반발이 줄어들었다.
이후 소빙하기로 인하여 농업 생산이 줄어들고 유럽 세력들이 중국에 지나친 양의 은이 유입되는 것을 막는 정책을 펴며 명나라의 경제에도 어느 정도 타격이 있었으나, 재상 장거정이 일부 성공적인 개혁 조치를 펼치며 진정되었다.
하지만 장거정이 세상을 떠나자 명나라는 전염병,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들에 시달리며 사회가 급격히 불안정해졌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농민 출신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여 순 왕조를 세웠고,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 (崇禎帝, 1611년 2월 6일 / 음력 1610년 12월 24일 ~ 1644년 4월 25일 / 음력 3월 19일)가 자금성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면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야 만다.
이후 이자성의 반란군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무너졌고, 청나라가 새로운 중화 대륙의 통치자가 되었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崇禎帝, 1611 ~ 1644)
명 의종 숭정제(明 毅宗 崇禎帝, 1611년 2월 6일 / 음력 1610년 12월 24일 ~ 1644년 4월 25일 / 음력 3월 19일)는 중국 명나라의 제16대 황제(재위 : 1627년 ~ 1644년)이다. 시호는 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 (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 소천역도강명각검규문분무돈인무효열황제 (紹天繹道剛明恪儉揆文奮武敦仁懋孝烈皇帝)이며, 휘는 유검(由檢)이다.
– 숭정제 (崇禎帝)
.휘: 주유검 (朱由檢)
.묘호: <청나라>는 회종 (懷宗), <남명>은 의종 (毅宗)
.시호: <청나라>는 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
(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 <남명>은 소천역도강명각검규문분무돈인무효열황제 (紹天繹道剛明恪儉揆文奮武敦仁懋孝烈皇帝)
.능호: 사릉 (思陵)
.연호: 숭정 (崇禎) 1628년 ~ 1644년
.출생: 만력 (萬曆) 38년 12월 24일 (1611년 2월 6일)
.사망: 숭정 (崇禎) 17년 3월 19일 (1644년 4월 25일)
.부모: 태창제 (泰昌帝) 주상락 (朱常洛), 효순황태후 (孝純皇太后) 유씨 (劉氏)
.배우자: 황후 (皇后) 주씨 (周氏)
.자녀: 장평공주, 주자랑, Zhu Cijiong, 소인공주, Zhu Cihuan, Zhu Cizhao, Zhu Cixuan, 곤의공주 등
*제16대 대명 황제
.재위: 1627년 10월 2일 ~ 1644년 4월 25일
.즉위식: 천계(天啓) 7년 8월 24일 (1627년 10월 2일)
.전임: 천계제(天啓帝) / 후임: 남명(南明) 홍광제(弘光帝)
.섭정: 서광계 (1627 ~ 1628)
*신왕(信王)
.재위: 1622년 10월 26일 ~ 1627년 10월 2일
.즉위식: 천계(天啓) 2년 9월 26일 (1622년 10월 26일)
천계제의 동생으로 후사가 없는 천계제의 뒤를 이어 명나라 제1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역사학계에서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남명과 청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묘호와 시호를 같이 쓰거나, 그것들을 쓰지 않고 숭정제(崇禎帝)로 통용되어 쓰기도 한다.

○ 생애 및 활동
1611년 2월 6일 태창제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인 천계제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하였고, 1627년 9월 30일 천계제가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서광계가 1년간 섭정하였기에 형 천계제때 전횡을 부린 환관 위충현을 처단하였고, 1628년 친정을 하였으며 명나라 명신으로 유명한 서광계를 고급 신료로써 재등용하는 등 국정 개혁에 임한다.
명 말은 1619년 사르후 전투에서 패전 이후 북쪽에서 만주족 국가 후금이 침입해오고, 남쪽에서는 1627년에 이자성의 난이 일어나서 명나라으로선 어려운 시기였으며, 또한 17세기 들어 닥친 전 세계적인 기상악화와 천재지변으로 흉작이 계속되어 더욱 더 민심이 흉흉했다. 만력 연간 이후로 계속해서 세금이 증가하고 재정의 수요가 증가하였지만, 재정은 날로 악화되고 있었다. 숭정제가 즉위할 무렵의 명나라가 닥친 어려움이 이와 같았다.
숭정제는 천계제와 달리 정치에 열심이고, 정사 (政事)에 빠지는 일도 없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황제로 있던 17년 동안 부지런히 국정에 임하였던 황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시의심 (猜疑心)이 강하고, 가신을 신용하지 못했던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신하를 죽였고, 특히 1630년 산해관에서 만주족으로부터의 방어를 혼자서 맡고 있던 명장 원숭환을 죽인 일은 치명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혹자는 명 말의 숭정 연간 혼란의 원인 중 하나를 숭정제의 시의심으로 꼽기도 한다. 재위 17년간에, 숭정제에 의해서 살해당한 신하는 총독 (総督) 7명, 순무 (巡撫) 11명에 달해, 그 외 파면된 사람도 다수 있어 이것이 신하들의 사기를 현저히 저하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숭정제는 중세 (重稅)를 견디지 못한 섬서성 출신 반란군인 이자성을 진압하기 위해 차례로 토벌군을 보내지만, 그 이자성 토벌군을 조직 하기 위해서는 다시 증세 (增稅)가 필요했다. 다시 이로 인해 궁핍한 백성들이 반란군에 참가해,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1644년, 이자성군은 북경을 포위하여, 4월 24일에 총공격을 감행한다. 한 기록에 따르면 숭정제는 위급을 알리는 종을 울렸지만, 신하들이 모두 도망가서, 환관 왕승은 (王承恩)만 혼자 있었다고 한다. 1644년 4월 25일 새벽, 사방이 불타는 와중에 숭정제는 아들들을 자금성으로부터 탈출시키고, 처첩과 딸들을 살해하고, 자금성의 북쪽에 있는 경산 (景山)으로 가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였다.

- 사후 : 시호, 묘호
.청나라
청나라에서는 숭정제 사후에 명나라 황제의 예로 묘호를 회종 (懷宗)으로 시호를 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단황제 (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端皇帝)로 올렸다. 순치 16년(1659년)에 단황제를 장렬민황제(莊烈愍皇帝)로 고쳐 다시 추존했다. 장렬민황제를 줄여서 《명사》 등의 역사서에서는 장렬제 (莊烈帝), 명민제(明愍帝)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 외 청나라에서 건의하거나 올리려고 했던 묘호에는 흠종 (欽宗), 열종 (烈宗), 경종 (敬宗) 등이 있으며, 시호는 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 (守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 과의돈검홍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 (果毅敦儉弘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 등이 있다.
청나라에서 최종적으로 올리는 묘호는 회종 (懷宗)이며, 시호는 순천수도경검관문양무체인치효장렬민황제 (順天受道敬儉寬文襄武體仁致孝莊烈愍皇帝)이다.
.남명
남명 정권에서는 홍광제가 즉위한 후에 묘호 사종 (思宗), 시호는 소천역도강명각검규문분무돈인무효열황제 (紹天繹道剛明恪儉揆文奮武敦仁懋孝烈皇帝)로 추존하였고, 이듬해인 홍광 원년 (1645년)에는 묘호를 고쳐서 의종 (毅宗)이라 하였다. 융무제 때에는 위종 (威宗)이라고 고쳐 올렸으나, 잘 쓰이지는 않았다.
그 외 남명에서 올리려고 했던 묘호로는 열종 (烈宗), 건종 (乾宗) 등이 있으며, 시호는 민황제 (敏皇帝), 정황제 (正皇帝) 등이 있다.
남명 정권에서 최종적으로 인정한 묘호는 의종 (毅宗)이며, 시호는 소천역도강명각검규문분무돈인무효열황제 (紹天繹道剛明恪儉揆文奮武敦仁懋孝烈皇帝)이다.
- 기타
조선에서는 숭정제 사후를 기점으로 숭정기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청나라의 연호 사용을 거부하여, 공식 대외 공문서에만 청나라의 연호를 쓰고 실생활의 문서, 경조사, 묘비명, 신도비문 등에는 숭정제의 사망을 숭정기원 1년으로 하고 숭정기원 연호를 사용하거나, 후임자인 영력제의 연호를 사용한다.
○ 가족
- 부모
부: 태창제 (泰昌帝) 주상락 (朱常洛)
모: 효순황태후 (孝純皇太后) 유씨 (劉氏)
- 배우자
황후 (皇后) 주씨 (周氏)
- 자녀
장평공주, 주자랑, Zhu Cijiong, 소인공주, Zhu Cihuan, Zhu Cizhao, Zhu Cixuan, 곤의공주 등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