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1년 7월 16일, 조선 중•후기의 시인 고산 (孤山) 윤선도 (尹善道, 1587 ~ 1671) 별세
윤선도 (尹善道, 1587년 7월 27일 / 음력 6월 22일 ~ 1671년 7월 16일 / 음력 6월 11일)는 조선의 의금부 금부도사 겸 통덕랑 등을 지낸 조선 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 문신· 작가· 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 (約而) 이고, 호는 고산 (孤山) 또는 해옹 (海翁)이다. 시호는 충헌 (忠憲)이다. 예빈시부정 (禮賓寺副正) 윤유심 (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 (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정철, 박인로, 송순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 어부사시사로 유명하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 (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고,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 (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 생애 및 활동
고산 윤선도는 1587년 7월 27일 (음력 6월 22일) 한성부 동부 연화방 삼각산 근처 (후일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에서 생부 예빈시직장 윤유심 (尹唯深)과 생모 순흥 안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8세 때인 1594년(선조 27년)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관찰사 윤유기 (尹唯幾)의 양자가 되어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내려가 해남 윤씨의 대종 (大宗)을 잇는다.
1613년(광해군 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과 영창대군 옥사 등과 북인 (北人)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30세에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 (李爾瞻) 등의 횡포를 규탄했다가 함경도 경원 (慶源), 경상도 기장 (機張)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인조 1년) 의금부도사 (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후 인조 반정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봉림대군, 인평대군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되었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 6년)부터는 세자시강원문학으로 발탁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는 남인 중진 문신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선봉장이었다. 서인 (西人) 송시열과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송시열은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삼수 (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 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유배지에서 가사문학과 저서를 남긴 송강 정철, 20여 년간의 유배지에서 수십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등과 비견된다. 그의 학문과 시맥은 이서우를 통해 성호 이익과 채제공에게로 이어졌다.

1641년 55세에 <금쇄동기 金鎖洞記>를 지었다. 1642년 56세에는 시조 <만흥 漫興> 6수, <조무요 朝霧謠> 1수, <하우요 夏雨謠> 2수, <일모요 日暮謠> 1수, <야심요 夜深謠> 1수, <기세탄 饑歲歎> 1수, <오우가 五友歌> 6수 등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를 지었다. 1645년 59세에 시조 <추야조 秋夜操> 1수, <춘효음 春曉吟> 1수 등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2수를 지었다.
그 밖에 <고금영 古琴詠> 1수, <증반금 贈伴琴> 1수, <초연곡 初筵曲> 2수, <파연곡 罷宴曲> 2수 등의 시조를 지었다.
1651년(효종 2) 가을 벼슬을 버리고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1652년 66세 5월에는 고산 (孤山)에 머무르면서 시조 <몽천요삼장 夢天謠三章>을 지었다.
1664년 78세에는 유배지에서도 음악을 즐긴다는 소문을 염려한 용주 (龍洲) 조경 (趙絅)에게 자신의 음악론을 피력한 <답조용주별폭 答趙龍洲別幅>을 답신으로 지어 보냈다.
1667년 6월 8일(음력 윤4월 17일)에 이르러 조정에서는 윤선도의 석방을 논의하였으나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해 7월 1일(음력 5월 11일) 유학 이석복 (李碩馥) 등이 윤선도의 사면, 석방을 상하였다. 고민하던 현종은 그해 9월 8일(음력 7월 21일) 윤선도를 석방하라는 명을 내렸다. 8월에 해남으로 돌아와서 있다가 9월에는 부용동(芙蓉洞)으로 들어갔다.
1668년 무민당 (無憫堂) 동쪽 시냇가에 작은 집을 짓고 곡수 (曲水)라고 명명하였다.
성격이 곧고 직설적이었던 그는 적을 많이 만들었다. ‘조선의 정치에서 생존의 조건인 침묵을 지키지 않는 불 같은 성깔은 결국 정치에서 문학으로 전환하려는 잠재된 욕망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평도 있다.

1667년(현종 9년)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자연 속에 묻혀서 시를 읊으며 남은 생애를 보내다 숙종 때 이조판서 (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만년에는 이해창 (李海昌), 조경, 허목, 윤휴, 홍무적, 홍우원, 하홍도, 권해, 이서우, 정길보, 나위소 등과 교유하였고, 그밖에 당색이 다른 인물로는 백강 이경여, 윤선거, 윤문거, 윤원거 등과 교유하였다.
문하생 중의 한 사람인 이서우는 남인의 학문과 시맥 (詩脈)을 후대에 전하였다.
온갖 억측과 비판이 계속되었지만 미수 허목 등 소수의 친구들은 그와 계속 교류하였고, 허목은 그를 ‘경외하는 외우’, ‘이 시대의 의인’이라며 그를 칭송하였다.
그의 첩 경주설씨는 고산이 진도에 머무를 때 얻은 부인으로, 고산은 이곳에서 간척사업을 하였는데 이곳 토착민의 부인이었다 한다.
경주설씨는 고산이 보길도에서 생활할 때 함께 지냈다고 하며 그곳의 후손들이 경주설씨와의 후손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년에 그는 매일 아침마다 두륜산정에 올라 오심재 약수터를 찾기도 했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 7월 16일(현종 12년 음력 6월 11일) 전라남도 해남군 보길도 낙서재 (樂書齋)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85세였다.
서인들은 현종실록에서 그의 졸기를 뺐고, 현종개수실록에 그의 졸기를 실었지만 ‘윤선도가 죽었다’라는 몇 글자만 실어 놓았다.
그해 9월 22일 해남군 현산면 구시리 금쇄동 아래 문소동(해남군 현산면 문소동과 해남군 삼산면의 경계 지점)에 안장하였다.
그는 치열한 당쟁 때문에 일생을 거의 귀양지에서 보냈으며,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등 많은 시가를 지었다.
그의 작품은 《고산 유고》에 수록되어 있다.
죽은 뒤 1675년(숙종 1년) 남인이 집권하자 죄가 풀려 신원되고, 증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사후
그의 학문과 시문은 이서우를 통해 성호 이익과 채제공에게로 이어졌다.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의 하별집 (下別集)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 (夢天謠) 5수, <우후요> (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
1672년 12월 현종은 특명을 내려 선왕과 자신의 스승이던 그의 직위와 작첩을 되돌려주라 명하였다.
그의 사후 효종비 인선대비 장씨가 1674년 1월에 사망하면서 자의대비가 다시 효종비 장씨의 상복을 입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윤휴, 허목 등의 1년설이 채택되어 제2차 예송 논쟁에서 남인이 승리, 집권하면서 그도 복권된다. 묘갈명과 신도비문은 1681년 미수 허목 (許穆)이 찬하였다.
그의 아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장남 윤인미 (尹仁美)는 그가 삼수에서 귀양살 때 급제하였으나, 금고형 13년형을 선고받고 그가 죽은지 4년 뒤 1674년(현종 15년)에 병사했다.
1675년 1월 그에게 가해진 유벌을 풀어주기를 청하는 윤휴의 상소로 유벌이 풀렸다.
금고된 아들 윤인미는 1677년(숙종 3년) 증 사간원 헌납 (司諫院 獻納)이 추증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 이후 다시 그의 후손들에게도 금고령이 내려졌으며 영조 때에 가서야 특별히 해금되었다. 4대손 윤덕희 (尹德熙)는 화공으로 출사하여 삼성진전 (三聖眞殿) 모사중수도감 (摸寫重修都監)을 중수할 때 감독으로 참여한 공로로 정릉현감이 되어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이어 1675년(숙종 1년) 2월 제1차 예송 논쟁으로 송시열, 송준길 등에 맞서다가 피해를 입은 남인 관료들을 복권시킬 때 허목, 윤휴의 건의로 그해 8월 2일 증 (贈) 자헌대부 이조판서 (吏曹判書)에 추증 (追贈)되었다. 이때 허목과 윤휴는 여러 번 그가 예를 바로잡는 데 기여하였으므로 마땅히 의정 (議政)으로 추증하고 작위를 내려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의정부영의정 허적 (許積)은 옳지 않다하여 결국 1671년 1월 증직은 이조판서로 정해졌다.
1676년 2월 28일 이조참판 이무가 다시 윤선도에게 삼공을 증직할 것을 청하였다.
1678년 9월 영의정 허적과 허목, 윤휴 등이 그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상주하여 1679년(숙종 5년) 8월 김덕원 (金德遠)의 상주로 충헌 (忠憲)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1680년(숙종 6년) 8월에 허견의 옥사로 남인들이 서인에 의해 대거 숙청, 허적 (許積), 윤휴 등이 처형당하고 허목, 홍우원 등은 파직당하여 문외출송당한 뒤, 이사명 (李師命) 등의 상소로 그해 윤 8월 10일 윤선도에게 내려진 증직과 시호도 함께 추탈당하였다. 그 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그해 2월 다시 복작되었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 (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거세되면서 관작이 다시 추탈되었다가 1697년 다시 복권되었다.
1701년(숙종 27년) 무고의 옥으로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정조 때인 1795년(정조 19년) 10월 정조 (正祖)의 특명으로 다시 복권되었다. 그의 증손 공재 윤두서의 외손이 다산 정약용으로, 정약용은 정조 때의 남인 문신이자 5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저명한 학자였다.
1725년(영조 3) 영조의 특명으로 불천지위(영구히 제사지냄)의 명을 받았다.
그 뒤 추탈되었다가 1727년(영조 5년) 다시 영조의 특명으로 불천지위가 회복되었다. 묘비문은 허목이 썼고, 신도비는 허목이 쓴 신도비와 문인 이서우가 쓴 신도비가 있다.

○ 가족 관계
윤선도의 본처 남원 윤씨의 친정아버지 윤돈 (尹暾)은 백호 윤휴의 친족이기도 하다. 또한 증손자는 화가 윤두서이고 정약용이 윤두서의 외증손자가 된다.
부인 : 남원 윤씨(南原尹氏, 1588년 – 1655년 2월 22일, 판서(判書) 윤돈(尹暾)의 딸)
첫째 아들 : 윤인미(尹仁美, 1607년(?) – 1674년, 진사, 자(字)는 자수(子壽)이고 호(號)는 뇌치헌(牢癡軒))
며느리 : 전주유씨(감사(監司), 유항(柳恒)의 딸, 유영경의 종손녀)
손자 : 윤이석(尹爾錫)
손자며느리 : 청송심씨 (종친부 전부 <宗親府 典簿> 심광사 <沈光泗>의 딸, 이조판서 심액 <沈詻>의 손녀, 남인 산림 공조참의 심광수 <沈光洙>의 조카)
증손자 : 윤두서(尹斗緖)
둘째 아들 : 일직 요절(? – 1630년 이전 사망)
셋째 아들 : 윤의미(尹義美, 1612년 9월 25일 – 1636년 5월, 진사) – 형 윤선언의 양자로 출계하였다.
손자 : 윤이후(尹爾厚)
손자 : 이름 미상
넷째 아들 : 윤예미(尹禮美, 1619년 4월 28일 – 1669년 8월)
며느리 : 이씨, 이숙진(李叔鎭)의 딸
손자 : 윤이구(尹爾久, ? – 1656년 3월)
딸 : 윤씨
사위 : 심광면(沈光沔, 1622년 – 1647년)
외손자 : 심단(沈檀, 1645년 – 1730년)
딸 : 윤씨
사위 : 이보만(李保晩 또는 이간만(李侃晩))
부인 : 한양조씨
서자 : 윤순미(尹循美, 1638년 6월 – 1667년 9월)
서녀 : 윤씨, 성균관직강(直講) 이익로(李翼老)의 첩
서녀사위 : 이익로(李翼老)
첩 : 이름 미상
서자 : 이름 미상(1631년 – 1639년 2월 1일)
첩 : 경주설씨(1620년 ~ ?)
서자 : 윤직미(尹直美, 1643년 ~ 1724년) : 학관(學官). 윤선도의 시문과 작품을 일부 정리하여 보존, 후대에 전하였다.

○ 저작
단가와 시조 75수를 창작하였다.
시가 중 〈산중신곡(山中新曲)〉, 〈어부사시사〉 등이 유명하다.
《고산선생유고집》 (孤山先生遺稿)
《별집》 (別集)
《약화제》 (藥和劑)
《충헌공가훈》
《금쇄동기》
《병진소》
《고산소초》
《경모첩》
《장원급제답안지》
《영모첩》
《고산서찰》
《금쇄동집고》
《은사첩》
《고산양자 예조입안 문서》
《증이조판서 윤공시장》
- 작품
이필행묘갈명
- 처방전
선창약 (癬瘡藥) – 버짐을 없애는 약
회충약 (蛔蟲藥) – 회충을 없애는 약
해수약 (咳嗽藥) – 노인들의 해수병 치료약
복학신방 (腹瘧神方) – 어린애들의 자라배를 다스리는 약
우역신방 (牛疫神方) – 농촌지역 소의 전염병을 퇴치하는 간단한 처방전
오선주방 (五仙酒方) – 술, 건강주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