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5년 10월 1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6세 (Karl VI, 1685 ~ 1740) 출생
카를 6세 (독: Karl VI, 헝: VI. Károly, 1685년 10월 1일 ~ 1740년 10월 20일)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보헤미아의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이기도 하였고, 시칠리아와 나폴리, 사르데냐의 국왕을 겸하기도 하였다.
보헤미아의 국왕 카렐 2세 (체: Karel II.),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국왕 카로이 3세 (헝: III. Károly)에 해당한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이자 프란츠 1세의 장인이다.

– 카를 6세 (Karl VI)
.출생: 1685년 10월 1일, 오스트리아 빈 호프부르크 왕궁
.사망: 1740년 10월 20일, 오스트리아 Palais Augarten
.부모: 레오폴트 1세, Eleonore Magdalene of Neuburg
.형제자매: 요제프 1세, 마리아 아나 폰 외스터라이히 황녀 등
.배우자: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녀 (1708 ~ 1740)
.자녀: 마리아 테레지아, Leopold John, Archduke of Austria, 마리아 아나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손주: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남성 구성원이기도 하며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의 사위, 프란츠 1세를 통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으로 이어진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왕,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 밀라노 공작, 파르마 공작. 오스트리아 대공으로서는 카를 3세이다.
요제프 1세의 동생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남성이며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계는 단절되고 그의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의 사위 프란츠 1세를 통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으로 이어진다.

○ 지위
신성 로마 황제 외
1711–1722, 테센 공작
1707–1735, 나폴리의 왕
1708–1720, 사르데냐의 왕
1711–1740, 헝가리의 왕
1711–1740, 크로아티아의 왕
1711–1740, 보헤미아의 왕
1711–1740, 오스트리아 대공
1711–1740, 신성 로마 황제
1711–1740, 독일의 왕
1714–1740, 룩셈부르크 공작
1714–1740, 나뮈르 백작
1714–1740, 브라반트 공작
1714–1740, 림부르크 공작
1714–1740, 로티에 공작
1714–1740, 밀라노 공작
1714–1740, 플랑드르 백작
1714–1740, 에노 백작
1720–1735, 시칠리아의 왕
1735–1740, 파르마 피아첸차 공작
1735–1740, 구아스탈라 공작

○ 생애 및 활동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의 왕,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 밀라노 공작.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남성이며 그의 사후 합스부르크 본가는 단절되고 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의 사위 프란츠 1세를 통해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로 이어진다.
- 즉위 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레오폴트 1세와 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의 사실상 차남으로 태어났다.
레오폴트 1세는 3번의 결혼에서 4남 16녀를 얻었으나 앞의 두 아들은 요절하고 마지막 결혼에서 얻은 두 아들만 생존했는데, 이것이 카를 6세와 그의 후계자와 그의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레오폴트 1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단절이 예상되자 주변국들과 영토를 나누려 모의를 하다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분노를 샀다.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를 상속인으로 지명한 데 이어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앙주 공작이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을 경우를 대비해 루이 14세의 셋째 손자 베리 공작을 2순위, 둘의 승계가 여의치 않을 경우 같은 가문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은 3순위로 지명했다.
레오폴트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프랑스와 스페인의 통합을 바라지 않았던 영국, 네덜란드 등의 지지를 받아 루이 14세의 프랑스에 대항하였고 카를로스 2세 사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는 유럽의 강국 프랑스를 전 유럽이 괴롭혀 놓는 바람에 전황이 유리했고, 카탈루냐 지방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상륙해 한때 마드리드에도 입성하는 등 순조로워 보였다.

- 즉위
1711년 형인 요제프 1세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33세의 젊은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요절해버렸다.
이에 카를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계승자가 된 것이다.
애초에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프랑스가 스페인 왕위까지 차지해 동군연합이 되어 유럽의 초강대국 탄생을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카를 대공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모두 상속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오르자 동맹국들은 지금까지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가 물려받는 걸 저지하자고 제2의 카를 5세를 만들어주는 격이 되자 전쟁 명분이 소멸해 종결되었다.
카를 6세는 스페인에 미련을 버렸고, 그 결과 루이 14세의 뜻대로 그의 둘째 손자인 펠리페 5세가 즉위했다.
카를 6세는 프랑스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종결하는 평화조약을 맺고 나폴리-사르데냐에 이르는 이탈리아 영토를 양도받으며 승승장구했다.
카를 6세 재위 초기의 오스트리아는 역사상 가장 큰 팽창을 이룬 상태였다.
그러나 이후 카를 6세의 정치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빈과 라이바흐, 트리에스테를 잇는 상공업 도로를 건설하는 등 나름 의욕적으로 열심히 상공업 진흥 정책을 추구했으나 스페인 국왕을 자처하던 시절 데리고 있다 함께 오스트리아로 온 측근 세력들과 오스트리아의 전통적 귀족 세력의 갈등이 심했고,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의 치세는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끝났다. 즉위초인 1718년, 사부아 공자 외젠의 맹활약으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바나트 (Banat) 및 합스부르크 세르비아와 왈라키아 공국 서부를 확보했으며 1720년, 사국 동맹 전쟁을 끝내며 사보이아 공국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를 반쯤 협박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교환했는데 이것이 카를 6세 시기 오스트리아의 몇 안되는 군사적 성공이었다.
먼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섣불리 개입했다가 손해를 봤다. 해당 전쟁의 결과가 좀 묘한 게,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왕위 자체는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잇게 되었다. 폴란드 전역에선 승리했다. 그러나 폴란드를 제외한 로렌 지방과 이탈리아 남부에서 프랑스-스페인에게 패배한 게 문제였다. 이로 인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고 얻어내 자신이 국왕을 겸하고 있던 나폴리 왕국 및 시칠리아 왕국을 스페인의 카를로스 왕자에게 넘겨주면서 남부 이탈리아 및 지중해에서의 패권을 모조리 상실했다. 사위인 로렌 공작 프란츠 1세는 처가인 오스트리아를 지지했는데, 고향 로렌을 잃는 대신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대공국을 얻었고 합스부르크 왕가는 파르마-피아첸차 공국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1738~39년 치러진 7차 튀르크 전쟁에서 참패, 벨그라드 조약으로 1718년의 전쟁에서 얻어낸 영토를 대부분 토해내어 자신의 유일한 군사적 업적마저도 빛이 바랬다.
말년의 군사적인 실패로 주변국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깔보기 시작했고 그가 죽은 후 딸 마리아 테레지아는 즉위 초부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치러야 했다.
- 국사조칙
국사조칙(國事詔勅, 독: Pragmatische Sanktion, 라: Pragmatica sanction)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카를 6세가 1713년 발표한 칙령이다.
독일어권에서 여성의 상속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을 부정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카를 6세의 즉위 기간 중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중심으로 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존속을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그는 젊었을 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개입하면서 왕위 계승자가 없는 경우의 정치적 혼란과 국가 분열의 가능성을 직접 체험했고, 딸만 남긴채 요절한 형 요제프 1세를 보며 합스부르크 제국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한 일을 막기 위해 카를 6세는 즉위 직후인 1713년, 여성의 왕위 계승을 금지한 살리카법을 부정하는 국사조칙을 발표하고 재임 기간 내내 주변국들로부터 이를 인정, 승인받는 데 모든 노력을 다했다.

- 상속 문제
카를은 항상 성공하지는 못하였지만 제국의 상업적 번영에 계몽적인 관심을 모이기도 하였으나, 독일(현재의 빈)로 돌아간 이후 죽을 때까지 그의 관심은 제국을 분할하고자 하는 위협에 대응하는 데에 있었다. 1713년 초 카를은 국사조칙을 발표하여 상속권을 규제하여 제국의 분할을 막고자 하였다. 카를의 유일한 아들은 1716년 4월 13일에 태어났으나 유아기에 사망하였고, 이로 인하여 카를의 정책은 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상속인으로서 인정받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카를은 이를 이루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고 외교적으로도 많은 교섭을 진행하였다. 포자레바츠 조약으로 얻었던 영토의 대부분은 그의 별세 1년 전인 1739년에 상실됐는데, 이는 1737년에 참전한 제7차 오스트리아-오스만 전쟁에서의 패배에 따른 베오그라드 조약(1737년 9월 18일)의 결과였다.
- 사망
카를은 1740년 10월 20일 사망했고, 이와 동시에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상속받을 더 이상의 남성이 남지 않게 되었다.
○ 가족
- 부모
레오폴트 1세, Eleonore Magdalene of Neuburg
- 형제자매
요제프 1세, 마리아 안토니아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등
- 배우자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녀 (1708 ~ 1740)
- 자녀(이름, 출생 ~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ia, Holy Roman Empress), 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 프란츠 1세, 슬하 5남 7녀
2녀, 마리아 안나 여대공 (Archduchess Maria Anna), 1718년 9월 14일 ~ 1744년 12월 16일, 카를 알렉산더
3녀, 마리아 아말리아 여대공 (Archduchess Maria Amalia), 1724년 4월 5일 ~ 1730년 4월 19일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