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12월 18일, 서독의 정치인•4대 총리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1913 ~ 1992) 출생
빌리 브란트 (독: Willy Brandt, 1913년 12월 18일 ~ 1992년 10월 8일)는 독일의 정치인으로 서독의 총리 (1969년 ~ 1974년)이자 독일 사회민주당의 당수 (1964년 ~ 1987년)이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동독, 폴란드•소련과 관계들을 향상시키는 데 목표를 둔 동방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서독에서 숙고적인 논쟁을 일으켰으나 브란트는 197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 빌리 브란트 (Willy Brandt)
.출생: 1913년 12월 18일, 독일 뤼벡
.사망: 1992년 10월 8일, 독일 Unkel
.매장: 1992년 10월 17일, 독일 베를린 Waldfriedhof Zehlendorf
.정당: 독일 사회민주당
.배우자: 브리지트 제바허 (1983 ~ 1992), 루트 브란트 (1948 ~ 1980)
.자녀: 마티아스 브란트, 닌자 프람, 피터 브란트, 라르스 브란트
저서: My Life in Politics, People and Politics: The Years 1960-1975 등
*제4대 연방총리
.재임: 1969년 10월 21일 ~ 1974년 5월 7일
.전임: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 후임: 헬무트 슈미트
브란트는 자신의 가까운 측근들 중의 하나가 슈타지를 위하여 일한 것으로 알려진 후 1974년 총리로서 강제로 사임하였다. 이 일은 전쟁 이후 서독의 역사에서 가장 큰 정치 스캔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퇴직에 그는 남북 분열을 줄이고, 환경을 보존하고 “공유, 정의 및 평화”에 세계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들어가는 독립적인 조사단 “브란트 위원회”의 의장을 지냈다.
1980년 발행된 “남북-생존을 위한 프로그램” 후속 보고서는 많은 것을 예상하였고, 유엔의 밀레니엄 개발 목표에서 안치된 목표를 향하여 실리적으로 공헌하였다.
총리로서 그의 기간이 비록 논쟁에 끝냈어도 브란트는 남북의 공평에 관한 토론을 흥행하는 데 평화와 정의를 위하여 자신의 지성과 열정을 지속적으로 이용하여 개발, 경제와 제3세계의 빚에 관하여 생각하는 데 매우 가치 있고 오래가는 공헌을 이루었다. 그의 위원회는 에드워드 히스 같은 몇몇의 저명한 부재중 정치인들에게 20세기와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논점들 중에 어떤 것으로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기여하고 행성 생존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자신이 나치 독일로부터 탈출하고 제3제국과 연관성이 없었기 때문에 브란트는 유럽의 것으로 그 국가의 신분을 감추는 데 대체로 평화주의적 정신과 의지와 함께 경제력으로서 독일의 재건을 이끄는 데 잘 놓였다.
1990년 독일의 재통일은 브란트의 동방과 친선 정책에 많은 빚을 졌다.

○ 약사
1913년 – 12월 18일, 독일 북부 뤼베크에서 사생아로 태어남.
1928년 – 인문계 고등 학교 요하네움에 들어감. 이 시절, 사회주의 청년 활동에 참여함.
1930년 – 17세의 나이에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들어감.
1931년 – 신당인 사회주의 노동당(SAP)에 들어감.
1932년 – 대학 입학 자격 시험에 합격함. 선박 중매소에서 일하면서 사회주의 노동당원으로 계속 활동함.
1933년 – 나치 정권의 탄압을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하여, 반나치 운동과 노동 운동을 함.
1937년 – 스페인 내전(1936~1939)에 특파원으로 참여해, 반파시스트 운동에 뛰어듦.
1938년 – 독일 나치 정부에 의해 시민권을 빼앗김.
1940년 – 2차 세계대전(1939~1945)이 일어나, 노르웨이가 독일에 점령되자, 스웨덴으로 탈출함. 이 때, 노르웨이 국적을 얻음.
1942년 – 유럽 사민당계 망명 인사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세계 민주 사회주의 단체’의 서기가 됨.
1944년 – 사민당의 재건에 힘쓰고, 다양한 단체들을 사민당에 통합시키려고 노력함.
1945년 –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노르웨이로 돌아가 활동을 계속함.
1947년 – ‘베를린 연합군 관리 위원회’의 노르웨이 대표단 공보 담당으로 서베를린에 들어옴.
1948년 – 독일 시민권을 다시 얻고 사민당 지도부의 베를린 대표 취임.
1949년 – 5월,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성립. 10월,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성립. 브란트, 독일 연방 의회의 서베를린 시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에 들어감.

1957년 – 서베를린 시장으로 선출됨. 이후 베를린 위기를 극복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음.
1961년 – 8월 13일, 베를린 장벽이 세워짐.
1964년 – 독일 사민당의 대표로 선출됨(~1987).
1966년 – 우파 기민당과 손잡아 대연정 정부를 탄생시키고(~1969), 부총리 겸 외무 장관이 됨.
1969년 – 9월, 자민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연방 총리가 됨. 동방 정책을 공식화하고 동독, 동유럽의 공산 국가들, 소련과 관계 개선을 추진함.’
1970년 – 1월 22일, 동독의 에어푸르트에서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인 빌리 슈토프와 회담을 가짐.
1971년 – 평화 정책의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음.
1974년 – 5월 6일, 보좌관 귄터 기욤이 동독 스파이로 밝혀지자, 총리직에서 물러남.
1976년 –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함.
1977년 – ‘국제 개발 문제 독립 위원회’ 의장을 맡아, 제3세계 발전을 위해 노력함.
1979년 – ‘유럽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유럽 통합을 위해 애씀.
1987년 – 사민당 대표직을 사임하고, 명예 대표로서 후배 정치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남음.
1989년 –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이듬해 독일 통일이 이루어짐.
1992년 – 10월 8일, 세상을 떠남.

○ 수상
노벨 평화상 (1971년)
뉴욕에서 제3세계상 (1984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평화상 (1985년)
○ 어록
“Unter der Last der jüngsten Geschichte tat ich, was Menschen tun, wenn die Worte versagen. So gedachte ich Millionen Ermordeter.” (오늘의 역사의 무게 아래서, 나는 사람들이 그 무게를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때 행하는 바로 그런 행동을 했다. 수백만 명의 사람의 죽음을 나는 그렇게 기렸다.)
“Wir wollen mehr Demokratie wagen.” ?우리는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감행하고자 한다.)
“독일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해도, 서로에겐 외국이 아닙니다. 그들의 관계는 그저 “특별한 관계”일 뿐입니다.” – 1969년 10월 28일, 정부의 정책 발표회 때.
“우리는 신이 아니라 투표자들에게 선택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민주주의에 공헌한 모든 사람들과 대화를 해야 합니다.”
“올해 여름에 신문을 다시 내려놨습니다. 베를린은 살아남을 것이며, 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 1989년 11월 10일, 베를린 시청에서. 그리고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은 통일되었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