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6월 17일, 1953년 동독 봉기 (Aufstand vom 17. Juni 1953) 발발
1953년 동독 봉기 (독: Aufstand vom 17. Juni 1953, 러: События 17 июня 1953 года в ГДР)는 1953년 6월 17일 소련 점령지구인 동독의 수도 동베를린에서 일어난 시위를 뜻하는 말이다.

○ 배경
동독 정부가 건설 노동자의 노르마 (노동의무할당량)를 인상하자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파업이 반정부 운동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 경과
그해 9월의 서독 총선거를 앞두고 전 세계에 파문을 일으켰던 사건이었다.
폭동 사태가 일어나기 6일 전인 6월 11일 동독 정부는 독일 통일의 길을 트기 위하여 종래의 강압적인 공산주의화 정책을 완화하는 새로운 조치를 발표하였으나, 근본적으로 소련군의 점령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동베를린 시민들은 6월 17일 봉기하여 사회주의통일당 본부와 기타 기관을 습격하였다.
이 의거는 동베를린뿐만 아니라 동독 전역으로 파급되었으나 소련군 전차부대의 출동으로 진압되었다.
○ 결과
시민들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후 동독에서는 이 사건을 “파시스트 폭동”으로 규정하게 되었으며 발터 울브리히트가 이끄는 공산주의 체제가 더욱 공고화되었다. 동독 정권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와는 달리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체제를 굳건히 지지했기 때문에 동유럽 혁명 때까지 소련의 가장 중요한 심복으로 남았다.
울브리히트의 동독 공산당 (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정권은 소련의 신속한 진압이 아니었으면 정권이 전복될 뻔했기 때문에 이 사태를 큰 교훈으로 삼게 되었고 이후 동독의 국정 운영 방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동독 정권은 다른 공산정권에 비해 덜 급진적이고 유화적인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이미 봉기가 터지기 2주 전 소련 크렘린이 울브리히트 정권에 농업집단화 보류, 중공업에서 경공업 위주로 전환, 정치국 통제 완화, 기독교 억압 중단 등 기존 정책의 대폭 완화를 지시한 바 있다. 소련은 이미 울브리히트 정권보다 먼저 동독의 상황을 꿰뚫고 있었고 동독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과 차별화된 온건한 사회주의 정책으로 다스려야 함을 알았다.
동독 정권은 표면적으로는 유화정책으로 선회했고 인민들의 생활적 불만을 잠재우는 데 신경썼지만 이면으로는 각 공장과 작업장에 슈타지 등 정보기관을 동원한 촘촘한 감시망을 구축하여 다시는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했으며 아울러 노동자들이 불만을 가지게 된 주 이유가 서독과의 접촉에 따른 비교 때문이라고 여기고 서독 쪽 국경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하지만 수면 밑에서는 반체제 운동이 꾸준히 이어졌고 이는 결국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로 이어졌다.
한편 서독에서는 입으로만 반공주의를 내세우고 실제로 일이 터졌을 때는 방관한다면서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6.25 전쟁 와중에 또 소련이 민중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하자 서독에서 반공주의 여론이 확산되면서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끌던 기민당 정권에 대한 지지가 더욱 높아졌고 반대급부로 서독의 사회주의 계열 정당은 반소련을 명확하게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지지율의 침체를 겪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