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10월 20일, 미국의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 (Herbert Clark Hoover, 1874 ~ 1964) 타계
허버트 클라크 후버 (Herbert Clark Hoover, 1874년 8월 10일 ~ 1964년 10월 20일)는 미국의 31번째 대통령이다.

– 허버트 클라크 후버 (Herbert Clark Hoover)
.출생: 1874년 8월 10일, 미국 아이오와 웨스트 브랜치
.사망: 1964년 10월 20일, 미국 뉴욕 뉴욕 월도프 애스토리아 뉴욕
.설립 조직: 후버 연구소, Reconstruction Finance Corporation, Federal Bureau of Prisons 등
.수상: 후버 메달, 존 프리츠 메달, Public Welfare Medal
.손주: 앨런 헨리 후버, 앤드류 후버, 루 헨리 후버
.증손: 마가렛 후버
빈곤의 종식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세계 대공황 발발 1년 전인 1928년”
Older men declare war. But it is the youth that must fight and die.
“선전포고하는 것은 늙은이다. 그러나 싸우고 죽어야 하는 것은 젊은이다.”
“미국의 제31대 대통령, 역대 미국 대통령 중 미시시피 강 서부 지역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물이다.”
대공황 시기 대통령이라 경제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비판받기도 하나, 후버 입장에선 예전부터 쌓인 문제가 하필 후버가 취임하자마자 대공황이 되어 터진 셈이니 좀 억울한 측면도 있긴 하다.
물론 이후 뒷수습을 제대로 못해 사태를 더 악화시킨 점은 후버의 책임으로 평가 받는다.
그의 이름을 딴 후버 댐이 유명하다.

○ 생애 및 활동
아이오와 출신으로, 최초의 서부 출신 대통령이다.
8세에 고아가 되어 오리건주로 이동해 퀘이커교도인 삼촌 슬하에서 자랐으며 캘리포니아의 스탠퍼드 대학교에 진학하여 지질학, 광산공학을 전공, 관련 학위를 취득한 이후 1897년 호주의 영국계 광산기업에 취직하여 2010년대 후반 기준으로 대략 15만 달러의 봉급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1년 만에 중간관리직으로 승진하였고,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결혼을 한 다음에 광산기사와 국제사업가로 세계를 돌면서 놀라운 활약을 펼쳐 30대엔 이미 큰 부자가 되었다. 그 이전인 20대 후반에는 남아공, 호주, 중국 등을 돌면서 큰 사업을 꾸렸는데, 어찌나 바삐 돌아다녔는지 청혼도 호주에 있을 때 아내에게 국제전보를 보내서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광산업으로 크게 성공한 후에 난민 구제위원회를 만들어 활동을 한 박애주의자이자 행정 관료로, 제1차 세계 대전 때 난민 구제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미국의 상무 장관이 되었으며, 1928년에는 미국의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미국의 31대 대통령이 되었다.
후버는 원래 훌륭한 인격을 가진 인물이었고, 취임연설부터 “모든 차고에는 자가용을! 모든 냄비에는 닭고기를!”(A chicken in every pot, a car in every garage)이라 선언하였다.
그러나 경제대공황 시기에 대통령 자리에 있었고, 후버 자신이 잘못된 일을 하자 사람들은 “후버! 후버가 다 망쳐놓았다!”고 하였다.
차기 선거에서는 뉴딜정책을 공약으로 내건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당선되었다.
오래도록 주변인 신세였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 후버와 대공황
1929년 10월 24일 주식 시장이 붕괴하면서 이른바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사실 이 대공황은 후버만의 잘못은 결코 아니었고, 경제 방향적으로 감이 없던 전전임 하딩과 전임 쿨리지 행정부 시절부터 오랫동안 쌓였던 것이 후버의 대에 터진 것이었다.
속내를 들여다보면 하딩 때부터 후버 초기까지 재무장관으로 재임한 앤드루 맬런[8]은 대대적인 감세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로 인해 여유자금이 생긴 기업들 사이에 재테크 열풍이 불면서 주식시장에 돈이 몰려 활황을 가져왔지만, 주식이 영원히 오를 수는 없었던 데다 주식시장의 거품이 과열되는 와중에도 이를 연착륙시킬 대책은 미비해서 사실상 거품은 방치되었는데, 결국 그것이 후버 대에 터져버리고 만 것이었다.
후버로서는 자기만 모든 사태의 주범인냥 욕먹는 점이 억울할 법도 한 부분이다.
하지만 후버 정권은 이에 대한 후속 대책에서 무능함을 보여주는데, 주식시장에 투자한 개인이나 기업이 한둘이 아닌 만큼 수많은 기업, 개인들이 파산의 길로 접어들었고 은행도 동시에 타격을 받았으며 공장은 문을 닫아 주식에 투자하지 않았던 노동자들도 실업자가 되어 상인과 농민들도 수입이 크게 줄어든 판국에, 후버와 그의 참모들은 이런 상황을 시장과 세월이 해결해줄 것이라는 낙관론만 펴며 사실상 방치했다.
후버가 나서서 “이 불경기는 2개월이면 끝날 것입니다.”라고 장담했지만 그의 장담과는 달리 경제 상황은 2개월은 커녕 2년 이상이 넘도록 계속 악화되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에는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주장하는 세이의 법칙이 정설이었고, 더 나아가서 대공황이라는 단어는 당시 경제학의 이론에서는 성립이 될 수가 없는 개념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케인스 학파가 학계에 모습을 드러내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유효수요’라는 개념 역시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결국 공황이 수습될 것이라고 했던 후버의 장담과는 반대로 12월에는 오히려 실업자가 1백만 명을 돌파했고, 임기 3년째가 된 1932년에는 1,300만 명을 돌파하고 말았다.
자연히 실업자들로 이루어진 빈민층이 거리를 메웠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판자집을 세웠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후버마을 (Hooverville, 후버빌)’이라고 이름 붙였을 정도였다.
이 와중에 후버는 그간 쌓아 온 평판을 제대로 땅바닥에 내던지는 일을 저지르고 마는데, 바로 보너스 군대 (Bonus Army) 사건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제대 군인들이 혹독한 불경기를 겪게 되자 1945년에 지급 예정이었던 군인연금 보너스를 미리 달라고 요구하면서 시작된 이 사태는, 제대 군인과 그 가족들이 포함된 2만5천여 명의 인파가 워싱턴 D.C 남서부의 아나코스티아 강변으로 모여들어 쓰레기장에서 주어온 잡동사니로 판자집을 만들어 야영지를 세우고 농성을 벌이는 상황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헌데 당시 언론과 정부는 이들을 공산주의자들의 폭동, 체제를 위협하는 빨갱이들이라고 매도하였다.
이에 후버는 더글러스 맥아더 당시 육군 참모총장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고, 맥아더는 그의 부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지 S. 패튼 소령의 휘하에 있는 제3기병대에 명령해 탱크를 선두로 보병 1개 연대와 기병을 착검돌격시켜 보너스 군대가 머물던 판자촌을 쓸어버렸다.
전차 6대를 이끌고 판자촌을 향해 ‘돌격 앞으로’를 외친 것이다. 전쟁의 미친 개로 불리던 패튼이 시위 진압에 동원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막장이다.
전술했듯 맥아더는 정부의 프로파간다를 충실히 따라 보너스 군대는 공산혁명을 추진하려 하고 실제 퇴역병은 1할밖에 안될 거라고 주장했지만, 나중에 조사한 결과 보너스 군대의 95%가 실제 퇴역병과 그 가족이었다고 밝혀졌다.
어쨌든 이 여파로 5명 이상의 사망자와 1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진압군 측에서도 60여명의 부상자가 났다.
후버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기 전에 공격 중지 명령을 내리고 평화적 해산을 맥아더에게 주문했지만, 맥아더는 명령을 무시하고 시위대를 몰아낸 다음 판자촌을 싸그리 불태워버렸다.
강제 해산된 보너스 군대는 겨울 내내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이 사건의 여파로 맥아더는 예편되고 한직인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가게 된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활약을 펼치게 된다.
결국 언론과 대중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취임한 대통령이 그 언론과 대중에게 나라 경제를 거덜낸 원흉으로 취급받고, 퇴역군인 무력 진압 탓에 대통령으로서의 위신마저 땅에 떨어지게 되자 후버는 뒤늦게나마 일부에서 여러 조치를 취한다.
엄청난 국가 예산을 풀어 부도 직전의 기업에게 나누어 주고 소득세를 인하했으며, 일자리 제공을 위해 공공근로사업을 발주시켰다.

조치를 취하긴 했어도 계속 경기악화가 이어진지라 결국 루스벨트에게 백악관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리고 이후 공화당은 2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야당으로 보내게 되며, 1994년 공화당 혁명 이전까지 하원 다수당이 되는데 난관을 겪었다.
후버는 ‘대공황을 초래한 대통령’으로 불명예스럽게 물러났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정권 때는 저술 활동을 하며 조용히 살았다.
훗날 해리 S 트루먼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후 유럽전쟁물자 수급계획을 조직하는 일을 맡아 38개국을 돌며 그 일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정부행정분야 조직위원회 의장으로 임명되는 등 민주당 트루먼 정권에서도 중용되었고 공화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역시 후버를 중용했다.
이렇게 계속 공직 생활을 하면서 1964년 90세까지 장수했다.
역대 대통령 중 2번째로 오랜기간 ‘전직 대통령’으로 살았던 (31년 7개월) 인물이다.
두번째인 이유는 지미 카터가 2012년 부로 후버의 기록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 외 존 애덤스 이후 90세를 산 대통령에도 해당하며 6번째 장수 대통령이기도 했다.
후버의 장례식은 린든 B. 존슨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정부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국장으로 나름 성대하게 치루어 졌으며, 그는 펜실베이니아 주에 있는 자신의 집 근처에 묻혔다.
후버에 대한 평가는 대공황 대처 미숙으로 인해 여전히 박하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