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구세군의 전인적 통합선교
구세군의 전인적 통합선교 (Holistic Integrated Mission) 본문: 마태복음 9장 35절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지난주에는 ‘욥바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시대에 따라 욥바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욥바는 협력의 항구였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이 욥바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듯이, 하나님의 교회는 서로 다른 은사와 자원을 가진 사람들의 사랑과 협력을 통하여 세워집니다.
요나의 시대에는 욥바는 도피의 항구였습니다. 요나는 원수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욥바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다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 시대는 욥바는 선교의 항구였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환상을 보고 편견의 벽을 넘어 고넬료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순종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복음과 성령의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도피의 배에서 내려, 협력의 길, 용서의 길, 선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남은 용서하지 못하고 분을 품고 있는 것은 마음에 불을 품고 남이 타기를 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9:35절의 말씀을 의지해서 ‘구세군의 전인적 통합선교’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본영에서 “The Salvation Army Multicultural Advisory Group Gathering”이 열렸습니다. 이 모임은 호주 전역에서 다문화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구세군의 다문화 정책과 사역 방향에 대해 자문하는 모임입니다. 감사한 것은 다음 세대를 대표하여 조연수 청년이 참석했다는 것입니다. 조연수 청년은 단순히 자리를 함께한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발표까지 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One Story. One Army”라는 주제로 NSW·ACT 지방 사관과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세미나를 통해 구세군의 정체성과 선교 방향을 다시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세미나를 요약하는 핵심 문장은 ‘존 챔니스’(Colonel John Chamness) 사관님의 말씀이었습니다. “Holistic Integrated Mission is not a new direction; it is a homecoming—it is who we are.” “전인적 통합선교는 새로운 방향이 아니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귀향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Holistic Integrated Mission, 곧 전인적 통합선교는 최근에 만들어진 새로운 선교 전략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보여 주신 선교이며, 구세군이 창립 때부터 지향하는 선교입니다.
전인적 통합선교는 인간을 영·혼·육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전인적 존재로 이해합니다. 구원은 영혼만을 건지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영역을 새롭게 회복시키는 과정입니다. 전인적 통합선교는 인간의 전 존재가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되는 구원을 통합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경험하는 고통도 어느 한 부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육체가 아프면 마음이 약해지고, 관계가 무너지면 영혼도 낙심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정과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줍니다. 반대로 한 사람의 영혼이 복음 안에서 새로워지면 생각이 변화되고, 관계가 회복되며, 삶의 태도와 행동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의 영혼만을 천국으로 옮겨 놓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로 인해 깨어진 인간의 모든 영역을 새롭게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 9장 35절은 예수님의 전인적 사역을 세 가지로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고,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교육과 복음과 치유가 예수님의 사역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중심으로 전인적 통합선교의 의미를 세 가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선교는 전인적 통합선교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가르치는 사역, Teaching입니다.
둘째는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 Preaching입니다.
셋째는 병든 자를 고치는 사역, Healing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한 부분만을 바라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생각을 가르침으로 변화시키셨고,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셨으며, 병든 몸과 상한 마음을 고쳐 주셨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과 산과 들과 바닷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람은 잘못된 생각과 가치관으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자신을 잘못 이해하며, 이웃을 경쟁자나 원수로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아 줍니다. 물질 중심의 삶은 언젠가 물질과 함께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미워하라는 세상의 방식 대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높은 사람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대신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돌보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기독교의 황금률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기독교의 황금률은 내가 받고 싶은 사랑과 존중을 먼저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예수님의 적극적 사랑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과 삶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교육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교 중심에는 언제나 복음이 있었습니다. 교육만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복지와 의료만으로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죄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전인적 통합선교에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을 부르셨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셨으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장 15절)
전인적 통합선교는 복음을 사회봉사로 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과 사회적 돌봄을 서로 분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은 선교의 중심이며, 사랑의 실천은 복음의 열매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사람에게 단지 “영혼이 구원받으면 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셨고, 걷지 못하는 자를 일으키셨으며, 나병 환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을 자유롭게 하셨고, 슬픔에 빠진 사람을 위로하셨으며, 소외된 사람을 공동체 안으로 다시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육체적인 치유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상한 감정과 깨어진 관계와 잃어버린 존엄성을 회복시키는 치유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심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심으로 수치심에 갇힌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심으로 차별과 상처 속에 살아가던 사람의 존엄성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선교에는 말씀과 복음과 치유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전인적 통합선교의 모범입니다.
교회도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며, 병들고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을 돌보아야 합니다. 한 영혼의 구원과 한 사람의 삶의 회복을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선교의 현장에는 언제나 Teaching, Preaching, Healing이 함께 있어, 학교와 교회와 병원이 설립됩니다.

2. 구세군의 선교도 전인적 통합선교입니다.
구세군 창립자 윌리엄 부스는 산업혁명 시대 동부 런던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당시 동부 런던에는 가난과 실업, 알코올중독과 범죄, 질병과 주거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윌리엄 부스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굶주린 사람에게 설교만 하고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 천국만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구세군은 사람들의 영적 필요와 함께 현실적인 필요를 돌보았습니다.
이러한 구세군의 전인적 선교정신을 표현하는 말이 3S, 곧 Soup, Soap, Salvation입니다.
첫째, Soup은 육체적 필요를 돌보는 것입니다
Soup은 따뜻한 국과 음식을 의미합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 입을 것을 제공하며, 집이 없는 사람에게 머물 곳을 마련해 주는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굶주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먹이셨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마 14장 16절)
신앙은 배고픈 사람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참된 복음은 이웃의 고통을 바라보게 하고, 그 고통 속으로 들어가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구세군의 상징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가 “한 손에는 빵을, 한 손에는 성경을”이라는 말입니다. 빵만 주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도 온전하지 않으며, 복음만 말하면서 빵을 나누지 않는 것도 온전하지 않습니다.
둘째, Soap은 인간의 존엄과 삶의 환경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Soap은 비누를 의미합니다. 비누로 하는 목욕과 깨끗한 옷은 단순한 위생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누는 더러워진 ‘감정의 상처’와 ‘지성의 무지’를 깨끗이 씻어내며, 사람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Soap의 정신은 사람을 더러운 존재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깨끗하고 존귀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건강한 생활습관을 회복시키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동행하는 것입니다.
구세군은 사람에게 음식만 제공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상담과 교육, 재활과 직업훈련, 가정 회복과 지역사회 돌봄을 통해 한 사람이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1995년 반둥에서 ‘Integrated Mission’을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신 김종원 사관님을 중심으로 몇몇 사관과 병사가 함께 참석했습니다. 이후 한국의 구세군 교회에서는 지역사회에 적합한 병설들이 개설되기 시작했습니다.
셋째, Salvation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Soup과 Soap의 궁극적인 목적은 Salvation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은 물질적인 도움만으로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좋은 교육과 깨끗한 환경과 안정된 직업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장 12절)
그러므로 구세군의 사회봉사는 일반적인 자선사업과 다릅니다. 우리의 봉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며,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3S는 세 개의 분리된 사역이 아닙니다. Soup과 Soap과 Salvation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세군 교회는 많은 교회 중에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닙니다.
1988년 12월 18일 시카고 구세군 교회가 개척될 때, 시카고 교회협의회 회장께서 구세군 교회가 설립되는 것을 환영했습니다. 다른 교회들이 Defence Church라면 구세군 교회는 Offence Church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구세군은 영적 최전선에 배치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들입니다.
육체를 돌보고, 삶의 환경과 존엄성을 회복시키며, 복음을 통해 영혼이 구원받도록 돕는 것이 전인구원의 사역입니다.
구세군의 전인적 통합선교는 새로운 방향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세군이 본래부터 걸어왔던 길이며, 다시 돌아가야 할 영적 고향입니다.

3. 구세군의 선교 선언문은 3M으로 실천됩니다
구세군은 선교 공동체입니다. 구세군은 교회 안에 머물기 위해 존재하지 않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에는 3종류가 있습니다. 에클레시아의 모이는 교회가 있고, 디아스포라의 흩어지는 교회가 있으며, 바실레이라는 임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는 구원의 방주 역할을 하고, 흩어지는 교회는 구조선의 역할을 하며, 바실레이아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모이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라 흩어지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우리가 사는 곳이 선교지가 되어, 그곳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우리가 탄 구세군 호는 유람선이 아니라 전투함입니다. 우리의 적은 혈과 육이 아니라, 공중 권세를 잡고 역사하는 악한 사탄과 마귀입니다.
우리의 전술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지만, 전인적 통합선교란 전략은 변하지 않습니다. 전략은 방향이고, 전술은 방법입니다. 전략은 방향을 정하는 큰 그림이고, 전술은 전략을 실행하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목적과 목표와 같은 의미입니다. 목적은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것이지만, 목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단계적인 것입니다.ㅣ
구세군의 선교 선언문은 구세군이 누구이며, 무엇을 믿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구세군은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보편적인 기독교 교회에 속한 복음주의 교단이다. 구세군의 메시지는 성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구세군의 사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한다. 구세군의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며 그분의 이름으로 차별 없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있다.”
이 선교 선언문에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 곧 3M이 있습니다. Message, Ministry, Mission입니다.
첫째, 우리의 메시지, Message는 성서에 기반을 둡니다.
구세군의 메시지는 시대의 유행이나 인간의 철학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기초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고 말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면서도 복음의 메시지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도 성경의 진리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문화와 시대는 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장 8절)
전인적 통합선교는 성경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성경이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과 정의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둘째, 우리의 사역, Ministry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구세군의 사역은 단지 인간적인 동정심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장 37절)
요한복음 21장에도 예수님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고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사역보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봉사와 구제와 상담과 돌봄이 하나님 사랑에서 시작되지 않으면 쉽게 지치게 됩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없으면 실망하고, 감사의 말을 듣지 못하면 낙심하며, 결과가 보이지 않으면 포기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섬기는 사람은 사람의 반응을 넘어 계속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정받기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섬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장 14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역의 뿌리이고, 이웃을 향한 사랑이 그 열매입니다.
셋째, 우리의 선교, Mission은 복음을 전하며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구세군의 선교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이름으로 차별 없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복음 전파와 필요 충족은 서로 경쟁하는 일이 아닙니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필요를 돌보고, 필요를 돌보면서 복음을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구세군의 선교에는 차별이 없어야 합니다. 인종과 국적, 언어와 문화, 성별과 나이, 사회적 지위와 종교적 배경을 이유로 사람을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누가 고통받는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셨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말로 전하고,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술로 복음을 전하며 손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음은 하나님께 드리고, 손길은 이웃에게 내밀어야 합니다.
결론: 전인적 통합선교는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인적 통합선교는 교회의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선교이며, 구세군이 처음부터 실천해 온 선교이고, 오늘 우리가 계속 이어가야 할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든 자와 약한 자를 고치셨습니다.
구세군은 Soup을 통해 육체적 필요를 돌보았습니다. Soap을 통해 인간의 존엄과 삶의 환경을 회복시켰습니다. Salvation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구세군의 선교 선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의 메시지, Message는 성서에 기반을 둡니다.
우리의 사역, Ministry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우리의 선교, Mission은 복음을 전하며 차별 없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전인적 통합선교는 새로운 방향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귀향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선교이고, 이것이 구세군의 정체성이며,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면서 몸의 고통을 외면하지 맙시다. 복음을 전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돌봅시다. 예배를 드리면서 세상의 필요를 바라봅시다. 입술로 예수님을 전하고, 손과 발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 줍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손길은 이웃에게 내밉시다.
한 손에는 빵을 들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과 마음과 몸과 관계가 회복되는 온전한 구원을 경험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침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마음과 몸과 관계와 삶의 모든 영역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옵소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든 자와 약한 자를 고치셨던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게 하옵소서.
우리의 메시지가 언제나 성경에 기초하게 하시고, 우리의 사역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되게 하시며, 우리의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차별 없이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되게 하옵소서.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고, 상처받은 자를 위로하며,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고, 길을 잃은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손길은 이웃에게 내밀게 하옵소서. 한 손에는 빵을 들고,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세상의 아픔 속으로 담대히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하여 영혼이 구원받고, 마음이 치유되며, 관계가 회복되고, 삶이 새로워지는 온전한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Moore Park 한국전쟁 정전협정 73주년 기념행사
Moore Park 한국전쟁 정전협정 73주년 기념행사
일시: 2026년 7월 27일 월요일 오전 11시
장소: NSW Korean War Memorial, Moore Park, Sydney
주제: Freedom Is Not Free —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오늘 시드니 무어파크의 NSW 한국전쟁참전기념비에서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 73주년 기념식이 거행됩니다.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으로 3년간의 치열한 전투는 멈추었지만, 이는 전쟁을 완전히 종결한 평화협정은 아니었습니다. 호주에서는 이날을 ‘한국전 참전용사의 날’로 지키며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억합니다.
호주는 한국전쟁에 약 1만 7천 명 이상의 장병을 파병했으며, 그 가운데 34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어파크의 한국전쟁 참전기념비는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싸운 호주군과 한국인들을 기리고, 전쟁을 통해 맺어진 한국과 호주의 우정을 상징합니다.
기념식에서는 추모사와 기도, 헌화, 묵념, 양국 국가 제창 등을 통해 전몰장병과 참전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 행사는 과거의 전쟁만을 기억하는 자리가 아니라, 희생으로 지켜진 자유의 가치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이름도 알지 못했던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싸운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들의 용기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워졌으며, 그들의 헌신은 한국과 호주를 잇는 영원한 우정이 되었습니다.
Lest We Forget.

욥바에 서 있는 사람들
서론
지난주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세 개의 기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책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영이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과 함께, 성령과 함께 담대히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욥바에 서 있는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그 증인의 삶을 욥바라는 항구를 통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욥바는 지중해 연안에 자리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항구도시로,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55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푸른 지중해를 품고 있는 이스라엘의 항구도시, 욥바(Joppa)는 성경의 역사 속에서 단순한 지리적 거점을 넘어 영적인 갈림길을 상징하는 특별한 장소입니다.
욥바에는 등대가 있습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과거에 등대지기는 아르메니아인이었습니다. 아르메니아는 주후 301년,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나라입니다. 초기부터 예루살렘에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구 예루살렘은 4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그리고 아르메니아 구역입니다. 2019년 성지순례 때 우리를 안내했던 사람이 아르메니아인이었습니다.
시대마다 욥바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성전을 세우는 ‘협력의 항구’였고, 요나 시대에는 하나님의 뜻을 피해 달아나는 ‘도피의 항구’였으며, 베드로 시대에는 이방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선교의 항구’였습니다. 오늘은 욥바의 세 모습을 통해 협력, 용서, 선교의 사명을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1. 욥바는 협력의 항구입니다
다윗은 성전을 짓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많은 전쟁을 치러 손에 피가 묻었다고 말씀하시며 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다윗에게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와 준비를 맡기시고, 실제 성전은 평화의 시대를 사는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짓도록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두로 왕 히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히람은 레바논의 백향목을 베어 뗏목으로 엮은 뒤 바다에 띄워 욥바까지 보내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우리가 레바논에서 당신이 쓰실 만큼 벌목하여 뗏목으로 엮어 바다에 띄워 욥바로 보내리니, 당신은 예루살렘으로 올리소서.”(대하 2:16)
레바논의 백향목이 예루살렘 성전의 재료가 되기까지는 많은 사람의 협력이 필요했습니다. 나무를 베는 사람, 운반하는 사람, 뗏목을 만드는 사람, 바다로 보내는 사람, 욥바에서 목재를 받아 예루살렘까지 옮기는 사람이 모두 필요했습니다. 성전은 솔로몬 한 사람의 능력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뿐 아니라 두로와 시돈의 기술자들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욥바는 이러한 협력의 항구였습니다. 레바논에서 온 백향목이 욥바에 도착한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욥바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자원과 사명을 연결하며, 이방인의 기술과 이스라엘의 믿음을 연결하는 항구였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고, 지체마다 역할은 다르지만 모두 한 몸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교회는 혼자 세울 수 없습니다. 목회자 한 사람이나 특정한 지도자와 부서만으로 세울 수도 없습니다. 어떤 분은 가르치고, 어떤 분은 섬기며, 어떤 분은 기도하고, 어떤 분은 물질로 후원합니다. 은사는 서로 다르지만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은사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세 장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은 삶과 섬김의 은사를, 고린도전서 12장은 성령께서 주시는 다양한 은사를, 에베소서 4장은 교회를 세우는 지도력의 은사를 보여 줍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은사를 받았지만, 서로 비교하고 우월감을 드러내면서 다툼과 분열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마지막 절인 31절에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한 뒤 “가장 좋은 길”을 보여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13장은 바로 사랑장입니다. 방언과 예언과 지식과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사랑이 없으면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은사를 사용하는 기준이며, 모든 은사를 완성하는 길입니다.
협력은 각자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고, 사랑은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다른 은사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욥바와 같은 교회 안에서 만나게 하시고,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게 하십니다.

2. 욥바는 도피의 항구입니다
솔로몬 시대의 욥바가 성전 건축을 위한 재료가 도착한 항구였다면, 요나 시대의 욥바는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 달아나는 항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셨지만, 요나는 정반대 방향에 있는 다시스로 가기 위하여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발견하고 배삯을 지불한 뒤 올라탔습니다.
요나가 도망친 이유는 단순히 두려웠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 제국의 중심 도시였고,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며 고통을 주던 잔인한 민족이었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 사람들은 용서받아서는 안 되는 원수였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애가 크신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실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는 바로 그 용서를 받아들이기 싫어서 도망친 것입니다.
요나의 마음은 마치 일제강점기에 가족과 나라를 잃은 한국인에게 일본의 수도로 가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라고 선포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요나의 입장에서는 원수의 회개보다 심판을 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는 안 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까지 이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용서를 받은 것은 우리의 자격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우리를 먼저 용서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용서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체험이 깊으면 깊을수록 남을 더 깊이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거나 정의를 포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악의 악순환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보복보다 선을 선택하고, 다툼보다 화목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 12:17-18),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참된 용서는 내가 재판관이 되어 판결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 판결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되 결과와 최종 판단은 하나님께 의탁하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용서는 억지 행동이 아니라 믿음의 순종이 됩니다.
2019년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Yad Vashem)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 56장 5절의 “기념물과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야드 바셈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곳인 동시에, 목숨을 걸고 유대인들을 숨기고 보호했던 사람들의 용기와 희생도 함께 기억하는 장소입니다.
그러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네덜란드 사람인 ‘코리 텐 붐’ 여사입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언니 베치를 잃었고,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참혹한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7년, 코리는 독일 뮌헨의 한 교회에서 하나님의 용서에 관하여 말씀을 전했습니다. 집회가 끝났을 때 한 남자가 다가왔습니다. 그는 코리가 수감되어 있던 강제수용소의 전직 SS 경비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나님께 죄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며, 코리에게도 자신을 용서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코리는 그의 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수용소에서 당한 수치와 고통, 언니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용서하고 싶은 감정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 순간 코리는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저는 제 손을 내밀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은 주님께서 주십시오.”
코리는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팔을 지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은 놀라운 경험을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순종하여 손을 내밀었을 때 성령께서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코리 텐 붐의 이야기는 용서가 감정에서 시작되지 않고 순종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상처와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먼저 손을 내밀 때, 성령께서 우리의 굳은 마음을 만지시고 미움에서 자유롭게 하십니다.
최용덕 선교사가 작사·작곡한 찬양 ‘오늘 나는’의 배경에도 잘 나타납니다. 이 찬양은 첫 소절 때문에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라는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최용덕 선교사는 고향 교회의 가까운 동료 집사와 사소한 일로 다투었습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몇 달 동안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집사가 먼저 찾아와 용서를 구했고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집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 후 고인의 부인은 일기장에서, 남편이 최용덕 선교사를 자신에게 예수님을 전해 준 존경하는 사람으로 기록한 내용을 발견하여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귀하게 여기던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지 못했던 옹졸함과 자존심을 깊이 부끄러워했습니다. 밤새 울며 회개한 그의 고백이 찬양 ‘오늘 나는’이 되었습니다.
“내가 먼저 손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 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이제 ‘오늘 나는’을 함께 찬양하며, 우리가 먼저 손 내미는 사람이 되기를 결단했으면 좋겠습니다.

3. 욥바는 선교의 항구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욥바는 다시 중요한 장소로 등장합니다. 이곳에는 다비다라는 여제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선행과 구제에 힘쓰던 사람이었습니다. 다비다가 병들어 죽자 성도들은 베드로를 초청했고, 베드로가 기도하자 그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피혁공) 시몬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던 중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오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유대인의 율법으로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동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5)
같은 시간, 가이사랴에 있던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도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에게 사람을 욥바로 보내 베드로를 초청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출발하여 고넬료의 집으로 갔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이방인들에게도 임하셨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 세계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었고 고넬료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이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는 일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장벽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음식에 대한 편견만 깨뜨리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편견도 깨뜨리셨습니다.
선교는 단지 국경선을 넘어 해외로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선교는 먼저 내 마음속의 편견의 경계선을 넘는 일입니다. 인종과 문화, 언어와 세대, 사회적 지위와 익숙함의 경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깨달음은 초대교회 선교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욥바에서 시작된 베드로의 깨달음은 훗날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도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를 통하여 이방인들이 믿었습니다. 1차 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니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일부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 주신 것과 같이 이방인에게도 성령을 주셨다는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어찌하여 이방인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고 말했습니다. 복음은 사람을 유대인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다름을 틀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차이가 차별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다양성이며, 차이는 차별이 아니라 풍성함입니다.
영어의 Unity와 Uniformity는 둘 다 일치라는 뜻입니다. Uniformity는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획일성을 뜻하지만, Unity는 서로 다름에도 하나의 목적과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일치를 뜻합니다. 요철의 원리와 같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만드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입니다.
결론
욥바는 하나의 항구이지만 성경 속에서는 세 가지 다른 의미를 보여 줍니다.
첫째, 욥바는 협력의 항구입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이 욥바를 통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듯이, 하나님의 교회는 서로 다른 은사와 자원을 가진 사람들의 사랑과 협력을 통하여 세워집니다.
둘째, 욥바는 도피의 항구입니다. 요나는 원수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여 욥바에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용서받은 사람이 용서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다시 부르셨습니다.
셋째, 욥바는 선교의 항구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서 환상을 보고 편견의 벽을 넘어 고넬료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순종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복음과 성령의 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회의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사랑으로 협력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의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원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미움에서 자유롭게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교의 증인’으로 부르십니다. 마음속의 모든 경계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욥바에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 도피의 배에서 내려 협력의 길, 용서의 길, 선교의 길로 나아가십시오.
오늘 우리의 욥바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출발점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