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목회단상

이재명 대통령에게 묻는다 — 당신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필자는 조지 오웰(1903~1950)의 소설<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大兄)’라는 절대 권력자가 지배하는
오세아니아라는 가상의 국가, 독재자의 주인공을
빙의(憑依)하여 윤석열大兄을 3번이나 비판한 적이 있다.
또한 작금의 한국 정치상황을 주시하여
이재명 정권을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권력의 마지막 선택을 비교하여 비판한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가 끝내 돌아가고자 했던 곳은 ‘이타카’였다.
그러나 이타카는 단순한 지명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영광의 바깥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는 자리였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었던 오디세우스는
바다를 떠돌며 신들의 유혹을 받고,
괴물과 싸우고, 죽음의 문턱까지 내려간다.
그는 수많은 것을 경험했지만 결국 깨닫는다.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디세이아』는
21세기의 민주주의와 만난다.
오늘 한국 정치에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권력을 가진 인간은
어디까지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권력자는 자신의 권력을
누구의 것으로 생각하는가?’ 라고 질문하는 일이다
1. 전당대회가 축제가 아니라 전쟁터가 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정당의 전당대회는 원래 축제여야 한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고, 경쟁하고, 국민에게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며
지도자를 선택하는 민주주의의 장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당대회가
정책과 비전의 경쟁이 아니라
충성의 경쟁이 되어버린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누가 누구의 편인가?.
누가 대통령과 가까운가?.
누가 대통령의 뜻을 대변하는가?.
누가 반대편에 서 있는가?.
정치가 이렇게 흘러가면
정당은 공동체가 아니라 진영이 된다.
그리고 진영은 곧 ‘敵’을 필요로 한다.
‘우리’를 결속시키기 위해 ‘그들’을 만들어낸다.
그 순간 정치적 경쟁자는
토론의 상대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적이 된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가장 경계해야 할 순간이다.
민주주의는 적을 없애는 제도가 아니라
경쟁자를 공존시키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2. 대통령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반대자가 아니다
대통령에게 가장 위험한 사람은 반대자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위험하다.
왜냐하면 권력은 비판을 받을 때
자신을 돌아보지만, 박수만 받을 때
자신을 절대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비극이
끊임없이 경고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때,
곧 휘브리스(hybris)가 시작된다.
휘브리스는 단순한 교만이 아니다.
자신의 능력과 권력을 과대평가하여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신의 영역을 넘보는 순간
반드시 네메시스(nemesis),
즉 그에 대한 응답과 파국이 뒤따른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권력이 스스로를 제한하지 않으면
결국 권력은 자신을 파괴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위대함은
강한 지도자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강한 지도자도 법과 제도와 비판 앞에
서게 만드는 데 있다.
3. 이재명 대통령에게 묻는다
그래서 나는 이재명 대통령에게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대통령의 이타카가 권력인가?
당권인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인가?
자신의 정치적 성공인가?
아니면 임기가 끝난 뒤
아무런 권력도 갖지 않은 채
다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 돌아가는 자리인가?
이 질문은 이재명 대통령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질문이 결코 아니다.
박정희에게도, 김대중에게도, 노무현에게도,
이명박에게도, 박근혜에게도, 문재인에게도,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모든 대통령에게
동일하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당신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4. 神을 선택할 것인가?, 人間을 선택할 것인가?
여기서 나는 조금 더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신을 선택할 것인가?,
인간을 선택할 것인가?
물론 이것은 종교적 의미에서
신을 믿느냐는 질문이 아니다.
정치에서 ‘신을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내 판단은 옳다.
내가 옳기 때문에 나를 반대하는 사람은 틀렸다.
내가 국민을 대표한다.
내가 역사의 방향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람을 중심으로
정치가 움직여야 한다.
이러한 순간 정치인은
자신도 모르게 신의 자리에 앉고 싶어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인간이 신의 자리에 앉지 못하도록 만든 제도다.
대통령은 절대자가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위임을 받은 사람이다.
정당의 지도자도 절대자가 아니다.
당원들이 잠시 권한을 맡긴 사람일 뿐이다.
국회의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국민 역시 정치 지도자를 신격화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위험한 문장은 이것이다.
“우리 편이니까 옳다.”
정치적 충성은 진실의 기준이 될 수 없다.
5.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내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대통령이 정말 강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주변에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둘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불편한 말을 하는 사람을
쫓아내지 않아야 한다.
자신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을
배신자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당내 경쟁자를 적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 반대는
장애물이 아니라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다.
자동차의 브레이크는 자동차의 적이 아니다.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에 자동차가 달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야당과 언론과 사법부와
시민사회와 당내 비판세력은 대통령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권력이 폭주하지 않도록 하는
민주주의의 브레이크다.
브레이크가 없는 권력은
처음에는 빠르게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사고를 일으킨다.
6. 오디세우스는 왜 신이 되지 않았는가?
『오디세이아』의 매력은
오디세우스가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는 지혜롭지만 실수한다.
용감하지만 두려워한다.
승리하지만 상처 입는다.
신들의 도움을 받지만 신이 되지는 않는다.
그는 끝까지 인간이다.
그래서 그의 귀환이 중요하다.
이타카에 도착한다는 것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진정한 성공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복종시켰느냐에 있지 않다.
얼마나 많은 권력을 집중시켰느냐에도 있지 않다.
얼마나 오랫동안 자신의 사람들이
권력을 유지했느냐에도 있지 않다.
진정한 성공은 권력을 내려놓은 뒤에도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가에 있다.
7. 대통령의 가장 위대한 순간은 퇴임하는 순간이다
대통령이 취임하는 순간은 화려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대통령의 정치적 품격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오히려 퇴임하는 날이다.
그날 자신이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는가.
후임자를 인정할 수 있는가.
자신을 비판했던 사람도
민주주의의 시민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자신의 당이 패배하더라도
헌정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바로 그때 그 사람의 민주주의가 시험된다.
권력을 잡는 것은 능력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을 내려놓는 것은 철학의 문제다.
8. 이재명의 진짜 이타카는 어디인가?
이재명에게도
언젠가는 이타카로 돌아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이타카는 대통령 집무실이 아닐 것이다.
민주당 당사도 아닐 것이다.
자신을 따르는 정치인들의 행렬도 아닐 것이다.
그것은 결국 권력을 내려놓은
한 인간이 국민 앞에 서는 자리일 것이다.
그때 국민이 묻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당신은 얼마나 강한 대통령이었는가?”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당신은 그 강한 권력을 가지고도 인간으로 남았는가?”
9. 마지막 질문 하나가 있다
그러므로 지금 이재명 대통령에게
필자는 한 가지 질문만 던지고 싶다.
오디세이아에서 질문했던 질문!!
당신은 神을 선택할 것이가?,
어나면 人間을 선택할 것인가?
신의 자리에 앉은 정치인은
자신의 사람을 만들지만,
인간의 자리에 선 정치인은
국민을 만난다.
신의 자리에 앉은 정치인은
반대자를 적으로 만들지만,
인간의 자리에 선 정치인은
반대자를 민주주의의 동반자로 인정한다.
신의 자리에 앉은 정치인은
자신의 승리를 역사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자리에 선 정치인은
자신 역시 역사의 한 장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충성자가 아니다.
더 많은 비판자일지도 모른다.
더 강한 당 장악력이 아니다.
더 강한 자기 절제일지도 모른다.
더 많은 권력이 아니다.
권력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10. 오디세우스의 이타카는 결국 ‘인간’이다
『오디세이아』가 우리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오디세우스는 결국 이타카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타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인간으로 돌아왔느냐이다.
오늘 작금의 한국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권력의 영웅이 아니다.
신처럼 군림하는 지도자도 아니다.
자신의 사람들만으로 둘러싸인 정치인도 아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아는 인간이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인간.
반대자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인간.
권력을 자신의 소유물이 아니라
국민에게 잠시 위탁받은 것으로 이해하는 인간.
그리고 마침내 권력을 내려놓고
국민에게 돌아갈 수 있는 인간이다.
이재명 대통령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의 이타카는 어디인가?
권력인가?
당권인가?
당신의 사람들인가?
아니면 국민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는다.
신이 되려 하는가?, 인간으로 남겠는가?
정치의 성공은 권력을
얼마나 오래 붙잡았느냐로 결정되지 않는다.
권력을 가진 채
얼마나 인간으로 남았느냐로 결정된다.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승리는
트로이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의 마지막 승리는 이타카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이재명 대통령에게도
언젠가 이타카로 돌아갈 시간이 올 것이다.
그때 이타카가 권력이 아니라 국민이기를 바란다.
그것이 대통령의 마지막 선택이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마지막 질문이다.
*배경음악/ 시벨리우스 – 투오넬라의 백조.
Sibelius / Swan of Tuonela op.22 [Karajan, Berlin phil]
https://www.youtube.com/watch?v=dkRYUUCS4D8
20260808
교회 서재에서
匍越의 [시간과 공간 사이] 중에서

글, 사진 = 전현구 목사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