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현구 목사의 초대시

어디를 향하여,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가? (성서의 두 기둥, 방향과 관계)
빌립보서 3:12–14, 갈라디아서 3:26–28, 로마서 12: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철학은 오래전부터 이 질문을 던져 왔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했고,
근대철학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이야기했습니다.
현대철학은 인간을 역사적 존재,
실존적 존재, 사회적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서는 인간을 조금 다르게 바라봅니다.
성서는 인간을 단순히
“무엇인가”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묻습니다.
“어디를 향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또 묻습니다.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저는 오늘 이 두 질문이 성서가 말하는
인간 이해의 중요한 두 기둥이라고 생각합니다.
방향과 관계입니다.
1. 인간은 방향을 가진 존재입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놀라운 언어로 표현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에게 인간은 완성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되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되어간다는 것은 방향을 갖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과거에 무엇을 가졌는지를 자랑할 수도 있었습니다.
혈통이 있었습니다.
율법이 있었습니다.
종교적 열심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종교적 정체성에 대해서
누구보다 자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사건 이후 그의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과거에는 율법을 향하여 달렸다면,
이제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과거에는 자신의 의를 세우려 했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이것이 회심입니다.
회심은 단순히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심리적 사건이 아닙니다.
성서적 회심은 더 깊습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2. 죄란 방향을 잃어버린 인간의 상태입니다
우리는 죄를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무엇을 잘못했는가?”
“무슨 규칙을 어겼는가?”
물론 이것도 죄의 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서적으로 보면 죄는 훨씬 깊습니다.
죄란 인간의 방향이 하나님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선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피조물을 섬기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방향이 뒤집힌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향하고,
자신의 영광을 향하고,
자신의 권력을 향하고,
자신의 소유를 향합니다.
그러므로 죄는 단순한 행동의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방향의 문제입니다.
사람이 북쪽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데
남쪽으로 열심히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열심히 걷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방향이 틀렸다면
열심히 걸을수록 목적지에서 멀어집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열심이 있다고
반드시 바른 신앙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반드시 하나님을 향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반드시 복음의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나의 신앙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나의 설교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나의 교회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나의 삶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3. 그런데 바울에게 방향은 혼자 달리는 길이 아닙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은 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혼자 달려가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방향은 언제나 관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 기둥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관계입니다.
4. 인간은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창세기는 인간을 홀로 존재하는 개체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성서적 인간 이해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
창조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발전시킵니다.
갈라디아서 3장 28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바울은 인간의 정체성을 가르는
사회적 경계를 해체합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
당시 사회에서 사람을 구분하고 서열화하던 경계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너희가 하나이다.”
이것이 복음의 관계론입니다.
5. 복음은 인간의 방향뿐 아니라 관계를 바꿉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미워한다면
그 사람의 방향은 과연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요한일서가 매우 강하게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12장에 이르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예배를 이야기한 다음
곧바로 공동체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그리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여기서 바울의 인간 이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나는 혼자서 내가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가는
내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손은 손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몸 안에서 손입니다.
눈도 눈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몸 안에서 눈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공동체와 분리되어 완성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관계 속에서 내가 되고,
관계 속에서 나의 존재가 완성됩니다.
6. 방향 없는 관계는 집착이 되고,
관계 없는 방향은 독선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방향과 관계는 서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방향만 강조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하나님만 바라본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웃을 무시합니다.
그러면 신앙은 독선이 됩니다.
반대로 관계만 강조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 중요하게 됩니다.
그러면 진리와 방향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적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면서 이웃과 함께 걸어가는 인간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는 세로축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방향입니다.
그리고 가로축이 있습니다.
이웃을 향한 관계입니다.
십자가는 방향과 관계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7. 그래서 바울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결혼식에서 읽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물론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3장은
단순한 연애나 결혼의 사랑을 말하는 본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교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은사가 있었습니다.
방언이 있었습니다.
예언이 있었습니다.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왜입니까?
교회의 존재 이유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지식도 관계를 세우지 못하면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은사도 관계를 세우지 못하면 공동체를 분열시킬 수 있습니다.
신앙도 관계를 파괴한다면
복음의 방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8. 오늘 한국교회가 물어야 할 질문
여기에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말합니다.
정통을 말합니다.
교리를 말합니다.
옳고 그름을 말합니다.
죄를 말합니다.
그런데 질문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방향과
이웃을 향한 관계입니다.
그 둘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을 혐오한다면,
복음을 말하면서 약한 사람을 짓밟는다면,
거룩을 말하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면,
성경을 말하면서 관계를 파괴한다면,
우리는 매우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가?”
9. 바울의 인간론은
‘새로운 방향과 새로운 관계’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운”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날의 인간에게 종교적 장식을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의 방향이 달라지고
관계의 구조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나를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이전에는 경쟁자로 사람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형제와 자매로 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나와 다른 사람을 적으로 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성공을 위해 사람을 이용했습니다.
이제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의 것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10. 결국 신앙은
‘어디로’와 ‘누구와’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은 방향을 향해 걷는 존재이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걸었느냐가 아닙니다.
어디를 향해 걸었느냐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혼자 얼마나 멀리 갔느냐가 아닙니다.
누구와 함께 걸었느냐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아마도 우리가 자랑했던 것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았는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을 것입니다.
“너의 삶은 어디를 향하고 있었느냐?”
그리고
“너는 누구와 함께 걸었느냐?”
11. 마지막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돌아봅시다
파라마타 강변을 걸어보면
강물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흐릅니다.
그러나 강은 혼자 흐르지 않습니다.
비를 만나고,
작은 물줄기를 만나고,
나무와 바람을 만나고,
사람들의 그림자를 만나며
마침내 바다를 향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흘러갑니다.
시간도 흐르고,
우리의 생명도 흐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멈추어 과거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방향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혼자 잘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는 일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앞을 향해 가되 혼자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가되 사람을 버리지 마십시오.
진리를 향해 가되 사랑을 잃지 마십시오.
거룩을 향해 가되 타인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향해 가되 관계를 파괴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향하여 걸으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의 손을 잡으십시오.
그것이 성서가 보여주는 인간의 길입니다.
맺는말
성서는 인간에게 두 가지를 묻습니다.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바울에게 이 두 질문의 답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함께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관계 속에 있습니다.
나는 정지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방향을 가진 존재입니다.
나는 과거에 묶인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나는 혼자 그 길을 걷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의 지체이며,
함께 그 길을 걷는 하나의 몸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발걸음이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시고,
우리의 손길이
이웃을 향하게 하시며,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과 이웃을 연결하는
십자가의 길이 되게 하소서. 아멘.

글, 사진 = 전현구 목사
전현구 목사 (시드니조은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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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23 주일설교문
어디를 향하여, 누구와 함께 살아가는가?
(빌3:12-14; 갈3:36-28; 롬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