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산상수훈과 평지수훈 (마 5:1-2, 눅 6:17)
지난주에는 ‘창세기 1:3, 요한복음 1:14, 요한복음 6:63’의 말씀을 의지하여 ‘말씀이 사건이 되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세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다바르(Davar)와 헬라어 로고스(Logos)그리고 레마(Rhema)입니다. 다바르는 사건이 되는 말씀입니다. 로고스는 사람이 되신 말씀입니다. 레마는 생명이 되는 말씀입니다. 기록된 계시의 말씀인 로고스가 성령의 조명으로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때 그 말씀이 바로 레마입니다.
오늘은 마태복음 5장 1-2절과 누가복음 6:17절의 말씀을 의지하여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가르침으로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과 누가복음의 평지수훈이 있습니다. 두 수훈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신 말씀들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이고, 평지수훈은 예수님께서 평지에 서서 제자들과 많은 백성에게 전하신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 이어지지만, 평지수훈은 누가복음 6장 17절부터 49절까지 비교적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수훈은 장소와 분량, 표현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구조와 핵심은 같습니다. 모두 ‘복’으로 시작하고, 중간에는 ‘황금률’이 있으며, 마지막에는 ‘집을 짓는 비유’로 끝납니다. 두 수훈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반석 위에 집을 세워라’입니다.

첫째, 하나님께 복을 받고,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은 모두 복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마태복음은 말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3) 누가복음은 말씀합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 6:20)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는 여덟 가지 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평지수훈에는 네 가지 복과 네 가지의 화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내면적 가난에 초점을 맞추고, 누가복음은 실제로 가난하고 배고프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현실에 관심을 둡니다.
누가복음은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사마리아인, 과부, 고아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록을 했습니다. 누가복음은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은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오늘 마하나임이 찬양한 ‘두 렙돈’을 드린 과부의 헌신도 누가복음 21장에 등장합니다. 렙돈이란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입니다. 하루 일당이 데나리온인데 데나리온의 1/64이 렙돈입니다.
복은 헬라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로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행복과 은혜의 상태를 뜻합니다.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빌 4:11).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이 말씀은 바울의 자족 신앙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핵심 구절입니다. 그는 가난할 때도, 풍족할 때도, 배고플 때도, 배부를 때도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바로 이어지는 빌립보서 4장 13절에서 밝힙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복은 소유의 많음보다 관계의 깊이에 있으며, 형통한 환경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에 있습니다.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시편 23:4)고 고백했습니다. 골짜기가 없어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의 중간에는 인간관계의 원리를 요약하는 황금률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누가복음도 동일한 말씀을 전합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눅 6:31)
우리는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인간관계에 관한 가장 귀하고 중요한 원칙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관계 원리는 상대방의 행동에 따라 반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해 주면 나도 잘해 주고,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면 나도 그를 무시합니다. 사랑받으면 사랑하고, 미움을 받으면 미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상대방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기준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이 먼저 잘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황금률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는 소극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선을 내가 먼저 행하라”는 적극적인 사랑의 명령입니다.
내가 외로울 때 누군가 찾아와 주기를 바란다면, 외로운 사람을 먼저 찾아가야 합니다. 내가 어려울 때 누군가 도와주기를 바란다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내가 실수했을 때 용서받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의 실수를 먼저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존중받기를 바란다면, 다른 사람을 먼저 존중해야 합니다.
조직심리학자 애덤 그랜트(Adam Grant)가 인간관계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Giver, Taker, Matcher입니다.
Giver는 자신이 받을 보상보다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지식과 시간을 나누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의 성공을 기뻐합니다.
Taker는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자신이 얻는 이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관계를 협력의 장이라기보다 경쟁의 장으로 보고, 자신이 더 많은 인정과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Matcher는 관계의 공평성과 균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도움을 받으면 도움을 돌려주고, 자신이 준 만큼 상대도 보답하기를 기대합니다. “당신이 나를 도와주었으니 나도 당신을 돕겠습니다”라는 상호주의적 태도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Giver가 성공의 사다리에서 가장 아래에도 있고, 가장 위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희생적으로 무조건 주는 Giver는 쉽게 소진되지만, 지혜롭게 주고 협력 관계를 만드는 Giver는 장기적으로 가장 큰 신뢰와 영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가장 건강한 인간관계는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지혜로운 Giver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었지만, 무분별한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셨지만 모든 사람의 요구에 끌려다니지 않으셨고,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 기도하며 자신의 영혼을 돌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바로 가시지 않고 이틀이나 더 머물렀다가 가셨습니다.
어리석은 Giver는 거절하지 못한 채 계속 베풀다가 자신은 탈진되고, 상대방에게는 의타심과 무책임을 더 크게 만들어 놓습니다. 그러나 성숙한 Giver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돕는 사람입니다. 상담의 상황에서, 상담자는 내담자의 문제를 대신 풀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 함께도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반석 위에 집을 세워야 합니다.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은 모두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로 끝납니다. 마태복음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 7:24) 누가복음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눅 6:48)
두 사람이 각각 집을 지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집이 비슷했을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지붕을 만들고 문과 창문을 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았고, 다른 사람은 기초 없이 흙 위에 집을 지었습니다.
날씨가 평온할 때는 두 집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바람이 불어 집에 부딪치자 기초의 차이가 나타났습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모래 위에 지은 집은 크게 무너졌습니다.
인생에도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며, 바람이 불 때가 있습니다. 질병의 비가 내리고, 경제적인 어려움의 홍수가 밀려오며, 관계의 갈등과 상실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그때서야 우리가 무엇 위에 우리의 인생을 세웠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늦기 전에 삶의 기초를 점검해야 합니다. 건강과 재물과 사람은 소중하지만 영원한 반석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만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입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2026년 네팔 홍수의 직접 원인은 히말라야 고지대에서 발생한 대규모 빙하·암석 붕괴였습니다. 폭우가 내리지 않았음에도, 빙하와 기반암이 한꺼번에 무너져 거대한 토석류가 계곡을 따라 하류까지 쓸어내리며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네팔 북부의 주변 건물들이 급류에 휩쓸리는 가운데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가족의 생명을 지켜 낸 ‘청록색 주택’이 있습니다. 수많은 집과 도로, 다리와 차량이 휩쓸려 갔지만, 피아쿠렐 가족이 살던 청록색 집은 거센 물살 속에서도 골조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집을 ‘기적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집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단단한 암반 위에 깊고 튼튼한 기초를 놓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의 집’은 홍수가 나지 않은 집이 아니라, 홍수 한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은 집입니다.
신앙은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아 고난을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믿으며 순종할 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인생이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집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은 ‘복’으로 시작하여 ‘황금률’을 거쳐 ‘집을 짓는 비유’로 끝납니다.
이 구조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신앙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성장하며,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참된 복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이웃을 대접해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복을 받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반석 위에 집을 세우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을 받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며, 반석 위에 집을 세우자”
이것이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입니다.
기도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산상수훈과 평지수훈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길을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의 성공과 소유만을 복으로 여기지 않게 하시고,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참된 복을 누리게 하소서. 가난하고 배고프며 눈물 흘리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께 받은 위로와 사랑을 함께 나누게 하소서.
다른 사람이 먼저 다가오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손을 내밀게 하소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며, 미움 대신 사랑을, 저주 대신 축복을, 정죄 대신 자비를 선택하게 하소서.
말씀을 듣고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삶으로 순종하게 하시며,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일터와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 위에 굳게 세우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이 사건이 되다 (창세기 1:3, 요한복음 1:14, 요한복음 6:6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6:63
서론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사람의 말은 우리를 위로하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어떤 말은 잠시 기억되지만,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 잊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정보나 교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능력이 있어서 창조하고, 구원하고,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세 단어가 있습니다.
히브리어 다바르(Davar)와 헬라어 로고스(Logos)그리고 레마(Rhema)입니다.
다바르는 사건이 되는 말씀입니다. 로고스는 사람이 되신 말씀입니다. 레마는 생명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세 종류의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한 말씀이 창조와 역사 속에서 사건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며, 성령을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세 가지 차원을 보여줍니다.

첫째, 다바르는 사건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3
히브리어 다바르는 ‘말씀’이라는 뜻과 함께 ‘일’과 ‘사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은 단순한 소리로 끝나지 않고 현실 속에서 사건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바르’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여기서 ‘창조하시니라’에 해당하는 말이 ‘바라’입니다. 성경에서 ‘바라’의 주어는 하나님이며,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창조 행위를 나타냅니다.
‘바라’는 우주의 시작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과 역사를 새롭게 하시는 일에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죄로 무너진 마음을 새롭게 하고, 절망 가운데 새로운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까지 나타냅니다.
바라는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바르’로 ‘바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빛을 설명하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빛을 창조한 것입니다.
사람은 일어난 사건을 보고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심으로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사람의 말은 현실을 설명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자 새로운 믿음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모세에게 말씀하시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시자 민족과 나라의 역사가 움직였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길이 보이지 않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 어릴 때 주일학교에서 부르던 찬양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바디메오가 눈을 떴다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대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거친 파도가 잠잠해졌다네. 예수님 예수님 나에게 말씀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시켜 주소서.”
동심으로 돌아가서 다 같이 불러 보겠습니다.

둘째, 로고스는 사람이 되신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구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말씀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느라”
여기에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넣어서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와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다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시간의 시작을 의미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조 이전의 영원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말씀은 헬라어로 ‘로고스’입니다.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최초로 번역한 칠십인역에서는 ‘다바르’를 ‘로고스’로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놀라운 사건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은 영원하신 분이 시간 속으로, 무한하신 분이 유한한 세상으로, 거룩하신 분이 죄인들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성육신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말이 아니라 삶과 사건이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인간의 육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우리가 자력으로 올라갈 수 없기에 하나님이 내려오신 것입니다. 죄인이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기에,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3일 만에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는 줄로 믿습니다.
원래 Logos란 단어는 헬라 철학에서는 ‘이성’이란 뜻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을 설득하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이토스(Ethos)입니다. 로고스가 부족하면 설득력을 잃고, 파토스가 부족하면 공감력이 없고, 이토스가 부족하면 아무리 옳고 감동적인 말이라도 신뢰받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먼저 “이 말이 논리적인가?”보다 “이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가?”를 먼저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설득은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사는 것입니다.

셋째, 레마는 생명이 되는 말씀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Rhema)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레마는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어떤 말씀이 갑자기 마음 깊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여러 번 읽었던 말씀인데도 어느 날 새롭게 들립니다. 그 말씀이 나를 위로하고, 책망하며, 방향을 제시하고, 다시 일어설 힘을 줍니다.
이것은 성령께서 말씀을 조명하셔서 오늘 나에게 영과 생명이 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조명’이란 기록된 성경 말씀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삶에 적용하도록 도우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말씀을 읽을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셔서 그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하십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말씀이 마음에 들리게 하시고, 과거의 기록된 말씀이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게 하십니다. 또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위로와 소망을 주시며, 깨달은 말씀에 순종할 힘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령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말씀 없는 성령 체험은 주관적인 감정으로 흐르기 쉽고, 성령의 조명 없는 말씀은 지식에 머물기 쉽습니다. 성령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일하시며, 그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생명과 능력이 되게 하십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13)
모든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에, 성령의 조명을 받을 때 올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성령은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기 전에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 말씀을 밝히 비추어 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믿고 순종하여 삶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두려움에 빠진 사람에게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생명이 됩니다. 죄책감에 눌린 사람에게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이 자유가 됩니다. 지친 사람에게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이 안식이 됩니다.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이 방향이 됩니다.
에스겔 골짜기 사건은 에스겔 37장에 기록된 ‘마른 뼈들의 환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마른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데려가셨습니다. 그 뼈들은 매우 많았고 심히 말라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물으셨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겔 37:3)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 37:5)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에스겔이 마른 뼈들에게 말씀을 대언하자, 뼈들이 서로 맞춰지고 그 위에 힘줄과 살과 가죽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아직 그 안에는 생기가 없었습니다. 에스겔이 다시 생기를 향해 대언하자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들은 살아나 일어나서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죽은 영혼을 살리고, 무너진 믿음을 회복하며, 메마른 심령을 새롭게 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레마는 성령을 통하여 오늘 우리 안에 들어와 믿음을 일으키고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이 되는 말씀입니다.
결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이지만, 우리에게 세 가지 차원으로 다가옵니다.
첫째, 다바르는 사건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어둠 속에 빛이 생기고 혼돈 속에 질서가 세워집니다.
둘째, 로고스는 사람이 되신 말씀입니다.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셋째, 레마는 생명이 되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기록된 말씀을 깨닫게 하실 때 그 말씀은 오늘 우리를 살리고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 속에서 사건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었으며, 성령을 통하여 오늘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됩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에서 사건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지식으로만 간직하지 말고 말씀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데서 끝내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어둠에 빛이 되고, 우리의 방황에 길이 되며, 메마른 영혼에 생명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혼돈과 어둠을 향하여 다시 말씀하여 주옵소서. “빛이 있으라”고 하신 창조의 말씀이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로운 사건이 되게 하옵소서.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사랑하며 따르게 하시고,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와 진리가 나타나게 하옵소서.
성령님, 기록된 말씀을 밝히 깨닫게 하시며,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영과 생명이 되게 하옵소서. 말씀을 듣기만 하지 않고 믿음으로 받아 순종하게 하시며,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삶이 새로워지게 하옵소서.
사건이 되는 말씀, 사람이 되신 말씀, 생명이 되는 말씀으로 우리를 날마다 변화시켜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