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나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빌립보서 3장 12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장 12절
우리는 흔히 신앙을 ‘내가 하나님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릴 때면 “내가 하나님을 더 단단히 붙잡아야 하는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나의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있을 때 자신의 열심에 의지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기준이 자신의 열심이 되면, 자신의 열심이 식을 때 우리의 신앙도 흔들립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의 기준이 하나님의 은혜가 되면, 우리의 열심이 흔들릴 때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택하셔서 자격이 있는 자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여러분에게만 향한 권면이 아닙니다. 37년 3개월이라는 긴 사역의 길을 걸어오며 수없이 흔들리고, 지치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던 저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이 말씀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붙잡으셨습니다.
바울은 그 부르심의 목적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힘입어 달려갔습니다.
오늘 이 순서를 따라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이라는 말씀은 신앙의 출발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의 시작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시스티나 성당(Sistine Chapel)은 바티칸에 있는 교황의 예배당으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제단 벽화 〈최후의 심판〉으로 유명합니다. ‘시스티나’라는 이름은 이 예배당을 재건한 교황 식스토 4세에게서 유래했습니다. 교황을 선출하는 회의인 콘클라베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1512년까지 천장화를 그렸습니다. 천장의 중심에는 빛과 어둠의 분리, 아담의 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 등 창세기의 장면들이 펼쳐집니다. 제단 뒤편의 〈최후의 심판〉은 1536년부터 1541년까지 제작되었으며,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와 부활한 인간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은 〈아담의 창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향해 팔을 뻗으시고, 아담도 하나님을 향해 손을 내밉니다. 두 손가락 사이의 작은 간격이 그림에 긴장감을 줍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 생명을 받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향해 손을 뻗으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생명의 시작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담의 생명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듯이, 바울의 새로운 삶도 그를 먼저 찾아오신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손길보다 먼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은혜의 손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원래 예수님을 믿으려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위협하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6)
바울에게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한다고 해서 반드시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는 열심은 자기 의가 되고, 사랑이 없는 열심은 정죄가 되며, 은혜를 잃은 열심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중심의 열심은 오히려 공동체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런 바울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붙잡으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사울이 박해한 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지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본 적도 없고,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진 적도 없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위협하고, 해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박해를 자신에게 향한 박해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을 자신과 동일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러한 사울을 찾아오셨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바울을 붙잡으셨습니다. 바울의 열심이 그를 사도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를 사도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찾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용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용서하시고 그 용서로 서로를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사랑의 근거도, 용서의 근거도 모두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 같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을 지켜 온 것도 우리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수많은 시험과 실패와 낙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붙잡는 힘은 약하지만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은 강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확신은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단단히 붙잡고 있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신실하게 붙들고 계시는가?”에 있습니다.
지금 믿음이 약해졌다고 느끼십니까? 기도가 예전 같지 않고 마음이 식었다고 느끼십니까? 자신의 부족함만 바라보며 낙심하지 마십시오. 나의 열심은 식을 수 있지만 나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은 식지 않습니다. 내가 흔들릴 수는 있지만 나를 붙드신 하나님의 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자신의 열심에 근거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을 먼저 붙잡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것입니까?

2.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바울은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붙잡으신 ‘그것’, 곧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바울을 위험에서 구해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명을 주기 위해 붙잡으셨습니다.
소명은 ‘부르심’이고, 사명은 ‘보내심’입니다. 부르심은 은혜와 관계가 있고, 보내심은 은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부르셨고, 은사로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신약 27권 중 바울은 13권을 썼다. 서신서의 첫 구절은 대부분 ‘소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롬 1:1)
그는 다메섹까지 가서 성도들을 체포하려고 하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강한 빛 가운데서 만나 시력을 잃습니다. 사울은 3일 동안 보지 못하고 금식하며 다메섹에서 기다립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사울의 악명 때문에 두려워합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는 내가 택한 그릇이다.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에게 내 이름을 전할 자다.”(행 9:15)
인생을 항해하는 사람이 있고 표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해하는 사람은 목적지가 있고, 방향을 선택하며, 바람과 파도를 헤치고 나아갑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다시 나침반을 들고, 길을 수정하며, 끝까지 전진합니다. 삶에 소명과 사명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표류하는 사람은 목적도 방향도 없이 외부의 힘에 떠밀려 갑니다. 상황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며, 선택보다 반응으로 살아갑니다. 삶을 막연한 생존으로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인생을 나그네로 사는 사람과 순례자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그네는 이 땅이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향해 걷는지 명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삶의 덧없음을 느끼지만 방향성은 흐릿한 존재입니다. 순례자는 분명한 목적지, 곧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걷는 사람입니다. 길이 힘들어도 그 길 자체가 은혜의 과정임을 알고, 매 걸음마다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믿고 나아갑니다. 삶을 신앙의 여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회복탄력성(resilience)입니다.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어려움·위기·상실·스트레스 상황을 겪고도 다시 균형을 회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심리적·정서적 능력입니다. 회복탄력성은 단순히 ‘버티는 힘’이 아니라 무너짐을 통과해 다시 서는 힘, 즉 마음의 근력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오뚜기 정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와 상실을 경험하고, 앞길이 보이지 않는 시간을 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우리는 누구에게 속해 있으며 무엇을 향해 살아가는지 붙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주님께서 삶의 방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달음질에는 자신을 먼저 붙잡으신 은혜가 있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푯대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모든 항로를 미리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랑해야 할 사람, 순종해야 할 말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이 땅에 보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생의 출발점이라면, 하나님의 목적은 인생의 방향입니다. 그 은혜에 붙들려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항해입니다.

3. 달려가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달려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오코(διώκω)는 ‘뒤쫓다, 추구하다, 온 힘을 다해 따라가다’라는 뜻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단어는 ‘박해하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 붙잡힌 후에는 박해자에서 전도자로 바뀌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달음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 달려가노라.”(빌 3:13-14) 바울의 달음질에는 자신을 먼저 붙잡으신 은혜가 있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푯대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린다”는 것은 과거에 매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교회를 박해했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죄책감에 붙잡혀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가진 종교적 경력과 성취를 내세우며 안주하지도 않았습니다. 실패는 주님의 은혜에 맡기고, 성취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영광이나 실패의 끈에 묶여 미래의 바다로 출항하는 데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후회는 과거지향적인 단어이고, 회개는 미래지향적인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후회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닮아 가려는 자세입니다. 바울은 이미 온전히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사역한 사도였지만 여전히 배워야 하고, 자라야 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할 사람임을 고백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신 목적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바울의 시선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나 자신의 업적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과 구원의 완성에 참여할 소망을 품고 달려갔습니다.
이 달음질의 출발점은 앞선 12절에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주님께서 먼저 바울을 붙드셨기에, 바울도 주님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수고를 지탱하는 힘은 자신을 먼저 찾아오신 은혜였습니다.
그날을 알고 오늘을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그곳을 믿고 이곳에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종말론적인 삶이란 그날 그곳의 삶을 오늘 이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결론: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붙잡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힘입어 그 사명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앞으로의 길도 그 은혜를 의지하여 걸어갑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기도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붙잡아 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 여기까지 살아온 것처럼 생각했던 교만을 내려놓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붙잡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붙잡으셨고,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음을 믿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식고 믿음이 흔들릴 때에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열심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소서. 잘못된 방향을 향한 인간적인 열심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과 사랑에 붙들린 거룩한 열심을 품게 하소서.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게 하소서. 아직 얻지 못했고 온전히 이루지 못했지만, 우리를 붙잡으신 주님의 목적을 붙잡고 믿음으로 달려가게 하소서.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추억은 기억이 아니다 (출 23:14-17)
14 너는 매년 세 번 내게 절기를 지킬지니라 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 앞에 나오지 말지니라 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말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17 네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지니라
오늘은 ‘추억은 기억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성경이 말하는 기억의 본질을 과거·현재·미래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추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 뛰놀던 고향, 부모님의 따뜻한 음성, 처음 만난 사람, 함께 울고 웃었던 성도들, 열정적으로 일하고 봉사했던 시절을 떠올립니다. 좋은 추억은 우리에게 미소를 주고, 어려운 추억은 때때로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그러나 추억과 기억은 같지 않습니다. 추억은 지나간 사건을 떠올리며 그때를 그리워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기억은 과거의 사건이 지닌 의미를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내는 것입니다. 추억은 과거를 바라보게 하지만, 기억은 현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추억은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지만, 기억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서울대학교에 뇌인지과학자인 이인아 교수가 있습니다. 뇌인지란 뇌과학과 인지과학을 융합한 학문입니다. 그는 ‘해마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입니다. 해마는 뇌 안쪽에 있는 작은 구조로서 인간의 기억을 형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는 ‘기억은 과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고 예측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를 추억하라고 하지 않고,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겪었던 일을 단순히 떠올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오늘도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단순한 종교 행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신앙의 장치였습니다. 절기를 기억하고 지킴으로써 유대인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킨 것이 아니라 절기가 유대인을 지킨 것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과거를 기억하게 했습니다.
칠칠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십니다” 오늘을 감사하게 했습니다.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미래를 소망하게 했습니다.
3대 절기의 기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의 은혜로 연결되었습니다.

1. 과거의 은혜를 기억합시다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은 출애굽의 기억에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자유를 잃고 바로를 섬기던 종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애굽을 빠져나올 수도 없었고,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민족의 역사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종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남은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속량받은 백성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량하셨음을 기억하라.”(신 15:15)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사건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유월절을 지키면서 자신들이 과거에 누구였으며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기억했습니다.
그들은 본래 자유인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바로를 섬기던 종이었습니다. 자기 힘으로 애굽을 떠날 수도 없었고, 스스로를 해방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보셨고, 부르짖음을 들으셨으며, 능력의 손으로 구원하셨습니다.
유월절 식탁에는 출애굽의 기억을 되살리는 상징들이 있었습니다. 어린양은 죽음의 심판에서 그들을 보호한 희생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무교병은 애굽을 급히 떠났던 일을 기억하게 했고, 쓴 나물은 애굽에서 겪었던 종살이의 고통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자녀들이 “이 예식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으면 부모는 출애굽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습니다. “너희의 자녀들이 너희에게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출 12:26–27)
사관학교 때 랍비가 와서 유월절 행사를 직접 시연한 적이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유월절에는 애굽의 고난을 의미하는 쓴 나물과 구운 유월절 어린양, 그리고 발효할 시간이 없어서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의 기억은 개인적인 기억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 전해지고, 한 세대가 경험한 구원의 은혜가 다음 세대의 신앙이 되도록 하는 공동체적인 기억이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라고 현재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조상들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이러한 기억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바로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출애굽을 기억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록한 글이 아닙니다. 역사를 잃은 민족은 정체성을 잃고, 정체성을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습니다.
사람도 기억을 잃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잃어버립니다. 지금 상영 중인 오디세이의 주인공인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았던 ‘본 시리즈 첩보영화’가 있습니다. 본 시리즈는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라, 기억을 잃은 인간이 자신의 과거와 존재 이유를 찾아가는 심리적 여정을 그렸습니다. 첫 번째 영화의 제목은 ‘Bourne Identity’입니다. 주인공은 살인 임무를 수행하다가 예기치 못한 사태로 기억을 잃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영화는 그의 기억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습니다.
치매가 무서운 것은, 치매를 앓게 되면 기억을 잃어버리고, 기억을 잃어버리면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의 종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고난을 슬프게 회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누구였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는가”를 기억하게 합니다.

2. 현재를 감사로 살아갑시다
칠칠절은 유월절 이후 일곱 주가 지난 뒤에 지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렸으므로 맥추절 또는 첫 열매의 절기라고도 불렀습니다. 성서적 기억은 언제나 행동과 연결됩니다. 머리로 기억하면서 삶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은 온전한 기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가난한 사람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신들이 애굽에서 겪었던 고통을 기억하여 약한 사람을 억압하지 말고, 자신들이 받은 하나님의 자비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라는 뜻이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신 16:10)
이스라엘 백성은 칠칠절에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자신들이 거둔 수확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기억했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밭을 갈며 수고했지만, 비와 햇빛을 주시고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했습니다. 첫 열매를 드린다는 것은 남은 모든 열매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칠칠절의 기억은 감사에서 끝나지 않고 나눔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족뿐 아니라 노비와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도 함께 기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과거에 자신들이 애굽에서 종이었던 사실을 기억하여 지금 그들 가운데 있는 약한 사람들을 돌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르게 기억하는 사람은 받은 복을 혼자 소유하지 않습니다. 자신도 은혜로 받은 사람임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나눕니다. 기억은 감사를 낳고, 감사는 나눔을 낳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은혜를 잊으면 감사가 사라지고, 감사가 사라지면 원망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다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칠칠절은 “오늘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으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기억하게 합니다.

3. 미래를 소망하며 나아갑시다
초막절은 한 해의 모든 수확을 거둔 후에 지켰기 때문에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기간에 나뭇가지로 임시 거처를 만들어 그 안에서 생활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사람들에게는 이미 견고한 집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편안한 집을 떠나 불편한 초막에서 지낸 이유는 광야에서 장막을 치며 살았던 조상들의 경험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광야에는 견고한 성벽도 없었고, 안전을 보장해 줄 집도 없었습니다. 내일 먹을 양식도 쌓아 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집이 되어 주셨고, 보호자가 되어 주셨으며, 날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초막은 연약하고 임시적인 거처였습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내리면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초막 안에서 자신들의 안전이 견고한 건물과 많은 재산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초막절은 풍성한 수확을 거둔 후에 지켰습니다. 바로 풍요로울 때 광야를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부족할 때보다 풍요로울 때 하나님을 잊기 쉽기 때문입니다. 창고가 가득 차 있을 때에도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초막절의 기억은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만나를 주신 하나님께서 미래의 양식도 공급하시며, 과거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길도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초막은 이 세상의 삶이 영원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육체와 재산과 지위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정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과거에 신실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기 때문에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제 우리를 보호하신 하나님께서 오늘도 함께하시며, 앞으로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을 믿습니다.
초막절은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결론
추억과 기억은 다릅니다.
추억은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기억은 과거에서 배웁니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지혜가 되고, 현재의 지혜는 미래의 준비가 됩니다.
우리 모두가, 우리 교회가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고, 현재를 감사로 살아가며, 미래를 소망하며 나아가기를 축복합니다.
유월절의 기억은 우리의 정체성을 회복시키고, 칠칠절의 기억은 우리의 감사를 나눔으로 변화시키며, 초막절의 기억은 우리의 두려움을 미래의 소망으로 변화시킵니다.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지나온 세월을 단순한 추억으로만 간직하지 않고, 그 모든 순간에 함께하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소서.
광야의 고통만 기억하지 말고, 만나를 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소서.
용서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용서하게 하시고, 사랑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사랑하게 하시며, 위로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고통받는 이웃을 위로하게 하소서.
앞으로의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지금까지 인도하신 주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게 하시고,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으로 걸어가게 하소서.
우리의 기억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오늘의 감사와 내일의 소망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채스우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