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사관 칼럼
아직도 인간을 믿습니까?
‘죄’란 헬라어로 ‘하마르티아’이다. 의미는 ‘To miss the mark’ 이다. 방향이 잘못되어 ‘과녁에서 빗나가다’란 뜻이다. ‘회개’란 ‘메타노이아’로 ‘방향을 바꾸다’란 뜻이다.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후회는 과거지향적인 단어이고, 회개는 미래지향적인 단어이다.
1. 인간은 죄인이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니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본성이란 동물이나 인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특성이다. 교육이나 환경은 본성을 약화시키거나 강화시킬 수는 있지만, 본성 자체는 바꿀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을 바라보는 3가지 설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성선설’, 악하다고 생각하는 ‘성악설’, 본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성 백지설’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보고 있다. 악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원죄 때문이다. 원죄란 죄의 원뿌리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전 세계를 강타했던 ‘오징어 게임’은 제 2탄을 준비하고 있다. 오징어 게임은 생존게임이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게임이다. 인생 막장을 사는 456명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인생 역전을 노리는 게임이다. 관람하는 사람들은 가면을 쓰지만 그들은 가면을 쓸 수가 없다. 원죄로 타락한 인간의 본능을 숨길 수가 없다. 오징어 게임의 모든 것을 계획했던 1번 오일남 할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주인공인 456번 성기훈(이정재)에게 묻는다. “자네는 아직도 사람을 믿나?” 자신의 인생철학이 옳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하며, 아직도 인간을 믿고 싶은 주인공에게 던진 질문이다.
2.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9:27)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은 선행의 공로를 쌓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살며, 교육이나 철학을 통해서, 또는 종교 의식을 충실히 행하지만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다. 기독교와 타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타종교는 자력종교로 행위를 강조하고, 기독교는 타력종교로 믿음을 강조한다. 타종교의 행위는 구원의 원인이고 조건이고, 기독교의 행위는 구원의 결과이고 믿음의 열매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3) 타종교는 자기 의로 의인이 되려고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의 의로 의인이 될 수 있다. 누가 의인인가? 의로운 분이 의롭다고 칭 할 때만 의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칭의’라고 한다. 어떻게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은 자기 의인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의로워질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이신칭의(以信稱義)’라고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믿음으로 의로워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3. 예수는 생명이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이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죽음이란 하나님과 관계의 단절이고, 생명이란 관계의 회복이다. 단절의 원인은 죄이다. 죄인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회복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일치를 의미한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한 것이다.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되었고, 육의 사람은 죽고 영의 사람이 되었고, 겉사람은 죽고 속사람이 되었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백문일답(百問一答)이란 말이 있다. 질문이 100가지라도 답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 길 중에 하나가 아닌 바로 그 길(The Way)이고, 다양한 진리 중에 하나가 아닌 바로 그 진리(The Truth)이고, 언젠가 사라질 유한한 생명 중에 하나가 아닌 바로 그 생명(The Life)이다. 사과 속의 씨는 셀수 있지만, 씨 속의 사과는 셀수 없다. 씨안에는 생명이 있다.
생수는 생명이다
생수(Living Water)는 구약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덴동산에는 생명의 강이 흘렀고(창 2:10), 에스겔은 척박한 땅을 소생시키는 생수가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환상을 보았다(겔 47:1). 이사야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사 55:1)고 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 오라고 하셨다.
1. 생수(Living Water) – 요 4:10
생수의 ‘생’(하이)은 ‘생명을 주다’(하야)는 말에서 왔다. 생수란 생명을 주는 물이다. 요한복음 4장은 수가성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의 이야기다. 예수께서는 물을 뜨러온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다. 여인은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육신의 물에서 시작하여 영적인 물인 ‘생수’에 대하여 말씀했다. 여인이 이해하지 못하자, 예수님은 여인의 과거에 대하여 말했다. 여인은 놀라며 ‘선지자’라고 했다. 예수께서 예배드리는 장소에 대한 여인의 질문에 답을 하자 여인은 놀라며 가지고온 항아리를 내려놓고 마을로 내려가 ‘그리스도’를 전하였다.
사마리아 여인이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는 ‘유대인'(9절)이라고 부르다가,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말하자 놀라며 ‘선지자'(19절)라고 칭호를 바꾸고,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질문했을 때 진정한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물동이를 내려 놓고 마을로 가서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상처받은 자’에서 ‘예배자’로, ‘예배자’에서 ‘사명자’로 바뀌었다.
2. 생수의 강(The stream of living water) –요 7:38-39
예수께서는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말씀을 전하셨다. 초막절은 광야의 40년 생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고 말씀하셨다. ‘배’로 번역된 헬라어 ‘코일리아’는 신체의 한 부위로서의 ‘배’를 의미한다. ‘배’는 중심 부분으로, 내면의 중심인 ‘내적자아’를 의미한다. 예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생수의 강’은 성령이다. 성령께서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아서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을 해결하여 주신다. 성령은 보혜사이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Helper, Counselor, Comforter, Advocate가 되신다.
고향인 흑석동은 한강보다 수위가 낮다. 엄청난 장마비가 내리면 한강물이 역류하여 홍수가 난다. 홍수가 날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마실 물이다. 물은 많지만 마실 물이 없고, 친구는 많지만 고독하고, 물질은 풍부하지만 영은 빈곤하다. 군중 속의 고독이고, 풍요 속의 빈곤이다. 말세가 되면 마실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고, 먹을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기근이고 기갈이라고 했다.
3. 생수의 근원(The spring of living water) – 예레미야 2:13
하나님은 유다의 두 가지 죄악을 지적하고 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13절) 생수의 근원은 하나님이다. ‘터진 웅덩이’란 ‘밑 빠진 독’으로 아무리 물을 퍼 넣어도 물을 채울 수가 없다. 학개서 1장 6절에 이를 ‘구멍 뚫어진 전대’와 같다고도 했다. 많은 씨를 뿌렸지만 수확은 적고, 많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삯을 받아도 그 돈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은 것처럼 다 사라져 버렸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생수의 근원을 대체할 무엇인가를 찾게 되어 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파지만 터진 웅덩이다.
존재의 목마름은 명예나 소유, 행위나 권력 등으로 채울 수 없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해갈할 다른 방법이 없다. 인간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 곁에 있을 때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서 살 수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때문에가 아니라 덕분에
바울은 금수저였다. 이스라엘 사람으로 혈통으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 흠 없는 바리새인이요, 학문으로는 당대 최고의 석학 가말리엘의 제자였고, 더구나 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모든 것을 다 ‘배설물’로(빌3:8) 여겼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참 많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다.
1. 육체의 가시 (7절)
성서는 육체에 가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학자들은 안질, 두통, 간질 등의 육체적인 질병으로 본다. 이중 ‘안질’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하늘로부터 강한 빛을 본 일로 인해 눈이 멀었었는데, 아나니아의 안수로 낫기는 했지만, 그 후로도 안질로 고생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바울이 ‘사단의 사자’이라고 한 것을 보면, 가시 때문에 바울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다.
2. 세 번 간구 (8잘)
바울의 가시는 바울을 기도의 자리로 인도했다. 바울은 자신의 육신의 가시를 해결하기 위해 간절하게 3번씩이나 하나님께 간구했다. 바울은 가시가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나님의 생각은 바울의 생각과 달랐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55:8-9) 하나님은 가시를 빼주는 대신, 바울을 더 겸손하게 하였다.
3. 약한 때 강함 (10절)
바울은 가시 때문에가 아닌 덕분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네가 약한 그 때에 강하여 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가시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의지하면 할수록 바울은 더 강하여 졌다. 바울은 이 비밀을 깨닫고,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기까지 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 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우리의 연약함이 주님의 은혜를 담는 그릇이 된다. 우리가 두 손 들고 주께 나갈 때, 주의 강한 손이 우리의 손을 잡아주신다. 가시 때문에가 아닌 덕분에, 우리가 약한 그 때에 강하여 진다.
사진 = 김환기 사관
김환기 사관 (구세군라이드한인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