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목사의 특별기고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 79개의 다중인격 장애 (Multiple personality disorder, 지금은 ‘해리성 정체감 장애’라고 칭함)를 가진 한 여성이 나왔다. 그 여성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16세까지 받았다고 하는데 그 고통으로 생긴 장애로 인해 아주 오래 동안 치료를 받게 되었고 지금은 그녀의 많은 인격들이 상당히 많이 통합이 되어서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할 수가 있게 되었고 그런 자신의 삶을 글로 써서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한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대부분의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의 너무나도 끔찍한 경험으로 인해 그것을 기억한 채로는 정상적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워 그 기억과 단절된 또 다른 인격을 만들어서 삶에 자신을 적응시켜 나가는 모습이 생긴 것이다 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한 모습은 순간적으로 그것은 자신의 처한 삶의 위기를 극복하게는 도와줄 수 있으나 너무나 다르고 다양한 인격들이 자아 속에 존재하면서 그 존재 간의 단절과 갈등으로 인해 서로를 기억하지 못해 삶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최근 내면 가족체계 이론 (IFS : Internal Family System) 이라고 하는 것이 한국에도 알려져서 관련된 책들이 많이 번역되었는데 이 이론을 연구한 David C. Schwartz박사님은 비단, 다중 인격 장애 즉 해리성 정체감 장애를 가진 사람만 다양한 인격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는 다양한 인격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의 ‘부분 (Part)’ 이라고 지칭한다. 그 다양한 인격은 조화를 이루어서 하나의 체계를 이루며 한 사람의 내면안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는데 다중 인격 장애는 그 인격체들 사이에 극심한 단절이 있다는 차이점이 있고 그래서 인격끼리 서로 소통하지 않고 서로의 존재에 대한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박사님의 말이 어쩌면 맞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왜냐면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사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덜 병리적이고 덜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해리성 정체감 장애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를 가진 사람도 아주 특별하게 이상하게 보기 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있는 다양한 인격의 모습이 그 사람에게는 더 도드라지고 더 단절되고 더 고통을 준다고 할 때 그러한 정신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은 더 열리게 된다. 또한 이런 개념은 오랬 동안 많은 학자들과 임상 심리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된 적도 있었다. 그들은 자아 속에 있는 다양한 다음 자아의 모습을 다른 개념으로 이미 언급한 적이 있다. 예를 들면, 참 자아와 거짓 자아라는 말을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참 자아 (있는 모습 그대로의 진짜인 내 모습)로 살아야 하는데 사회에서 용납될 수 있는 모습으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우리의 많은 모습이 거짓 자아의 모습일 때가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자아가 한 가지 인격이 아니고 여러 인격이 어우러져서 체계를 이루고 있다고 설명을 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심리학의 선구자인 프로이트는 자아를 원초아, 자아, 초자아로 구분을 해서 설명을 했다. 원초아 (id)는 욕망과 충동에 의해서 조정되는 자아의 부분, 초자아 (superego)는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살아가려는 자아의 부분이고 자아 (ego)는 그 중간에서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이 뿐 아니라 교류 분석에서는 한 사람의 자아 속에는 부모자아, 성인 자아, 아동 자아가 있는데 부모의 자아에는 비판적인 부모자아와 양육적인 부모자아가 있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성인 자아가 있다면 자유로운 아동 자아와 적응된 아동 자아도 있다고 본다. 이렇게 볼 때 벌써 자아 안에 다섯가지 다른 모습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람을 이해할 때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또는 이기적인 사람과, 이타적인 사람과 같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가지고 단편적으로 이해하면 때로 그 사람의 모습이 이해가 안 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평소에 너무나도 자상하고 좋았던 남편이 화를 낼 때 우리는 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만 늘 생각을 했을 때 그에게 ‘화’ 라고 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화를 낸 남편은 남편의 참 자아의 모습이 아니라 거절감과 부당함에 속상함을 나타내는 남편 안에 있는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훨씬 더 잘 이해를 하게 된다.
언젠가 자존감이 낮고 대인관계에서 힘들어하는 한 내담자에게 종이에 한 사람의 형태를 그린 다음 그 사람 안에 있는 아주 많은 다양한 장점들과 좋은 인격적 모습들을 그려 놓은 다음에 “소극적이고 사람들과 관계를 당신은 어려워하는데 실제로 그런 당신의 모습은 당신의 전부가 아니라 많은 다른 좋은 점과 함께 당신에게 존재하는 한 부분일 뿐이네요. “라고 말을 해주었다. 내담자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많은 것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분은 지금까지는 자신이 사회적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 때문에 그 부분이 확대되어 다른 자신의 긍적적 자아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내면 안에 여러 부분의 자아가 있다라고 하는 개념은 인간 내면의 복잡함과 다양성을 수용하게 해주며 한 사람에게 어떤 특정한 프레임을 씌워서 그 사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을 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다.

내면 가족 체계 이론에서는 크게 자아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를 한다. 한 자아는 ‘참 자아’의 모습이다. 이 자아는 다른 모든 부분의 자아를 통합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리더십을 가지고 소통하며 체계를 이루어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수 있는 순기능을 하는 자아다. 내면아이치료로 잘 알려진 존 브레드 쇼는 어린 아이들은 이런 순기능을 하는 자아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성장하면서 상처를 받음으로 그 자아의 모습이 손상된다고 보아서 성장하지 못하고 상처로 인해 머물러 있는 내면의 아이를 잘 돌봐 줌으로 다시 성장하고 성숙한 어른으로 발달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참 자아의 모습 외에 내면 가족 체계 이론에서는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자아의 모습이 있다고 한다. 사회에서 잘 기능하고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지 않도록 여러가지 모양으로 채찍질하며 이끌어 주는 역할이다. 그리고 소방관의 역할을 하는 자아가 있다. 이 자아는 자아가 정서적으로 힘들어서 불이 난 것처럼 많이 힘들 때 빨리 그 불을 끄는 역할을 해주는 자아의 모습이다. 그것은 중독과 같은 일시적인 만족을 주는 방법 등을 사용하게 한다.
그리고 유배자의 역할이 있다. 유배자의 모습을 띤 자아의 부분은 상처받고 유약한 자아의 부분이라 보호자나 소방관에 의해서 조정되고 겉으로는 잘 나타내 보이지 않게 하는 자아의 모습이다. 이런 자아의 부분들이 한 사람이 생존해가는데 어떤 역할을 하고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 살아갈 수 있는 지를 탐색하고 알아가는 일을 통해 참 자아가 모두를 통합하여 스스로가 자신에게 바람직한 삶의 선택과 방법들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 안에 있는 다양한 부분들이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이는 보호자의 파트만 과도하게 역할을 하여 늘 자신을 쉬지 못하고 엄격하게 다루고 완벽주의로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자아의 부분은 내면 깊은 곳에 숨겨놓은 채 말이다. 우리는 건강해지기 위해서 내 안에 있는 모든 부분들을 수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그 안에서 참자아가 연약한 나의 부분을 돌볼 수 있는 힘과 에너지가 생겨날 수 있게 된다. 남들이 보기에 좋은 부분만 나의 부분인 것처럼 살지 말고 나의 모든 부분을 건강하게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삶의 지혜와 방법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잊지 말자.
인생은 불공평하다
우리는 어릴 때 학교에서 또는 교회와 가정에서 정의로운 삶과 사랑,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해서 배운다. 그래서 자라면서 사람에 따라서 사회는 반드시 공평해야 하고 모든 사람의 권리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하기에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믿으며 성장한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성장한 사람들이 성인이 된 이후에 직장과 사회에서 만나는 불의함과 불공평함을 경험하게 되면 적잖게 당황하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선진국인 호주에 오면 사회의 불의함과 불공평함이 없을 줄로 생각하고 호주에 왔는데 한국 사회와 비슷한 것들을 지역 사회에서 또는 직장 생활에서 경험하면서 힘들어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한 남자 분은 호주에 와서 가까운 사람의 사별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던 중 일들을 처리하다가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 그런 중에 너무나 큰 분노와 상실감을 경험하면서 호주의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되고 사람들에 대한 불신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나 제한적인 것을 보면서 억울함과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 또 한 여자 분은 집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불의한 중계인과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변호사의 태도들을 보면서 심한 마음의 상처를 받고 몸도 마음도 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이러한 불의함 들을 처리하고 싶지만 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없어 답답하고 힘들다고 한다.
또 어떤 분은 남은 여생을 살기 위해 호주의 바닷가 근처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 곳의 사람들이 너무나 텃세가 심하고 새로 이사온 사람들에 대한 불친절함으로 인해 전혀 적응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비인간적으로 대할 수 있는가를 경험하면서 마음이 무너지고 사람에 대한 심한 환멸감마저 경험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 분은 성인이 된 이후로 호주에 왔기 때문에 직장에서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반면 훨씬 능력이 없어도 영어로 의사소통을 잘 하는 직원은 팀리더로부터 더 인정을 받는 것을 보면서 불의하고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없는 현실의 직장생활에서 힘들어 하고 계신다.
이렇게 이상과 이론이 다른 세상의 현실을 접하면서 누군가는 타협하며 “세상은 원래 이런 곳이야! 정의와 사랑과 긍휼은 철학이나 종교에서나 이야기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아”라고 생각하며 자신도 적당히 세상의 불의함과 불공평함에 편승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그에 비해서 이런 불의하고 불공평한 세상을 원망하며 싸움닭처럼 대항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사회 정의를 추구한다고 목소리를 내며 끝까지 매사에 자신의 권리와 정의를 위해 싸우기도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세상의 불의함과 불공평에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가야 할까?
요즘 한국 드라마에서 인기가 있는 주제가 ‘심판’, ‘복수’ 와 같은 것들이다. 나쁜 사람만 골라서 아주 잔인하게 죽이는 사이코 패스이야기,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울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원수를 갚아주는 ‘모범 택시’ 이야기 사람들은 은근히 나쁜 사람들을 악하게 괴롭히고 죽이는 것을 통해서 대리 만족을 느끼며 통쾌함을 경험하고 당연한 결과라고 느끼는 것을 보게 된다.
과연, 불의를 행한 사람에 대한 복수는 정당한 것인가? 그것이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악이 사라져야 하고 악이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이 저지르는 악은 이유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역설적인데 이런 주제를 담은 드라마들이 한창 인기다. 재미는 있으나 악을 정당화시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위험하다 생각된다.

스캇 펙은 그의 책 ‘거짓의 사람들’에서 인간들 중에서 정말 악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여러 사례들을 설명한다. 그렇다고 그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심판하며 죽여야 한다고 결코 말하지 않는다. 악한 동기를 가지고 행동한 사람에게 악으로 갚아주는 것이 정당하다고 말할 때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고 말한다.
너무나 곧게 살면 꺾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불의와 불공평함이 하나도 없어야 해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견딜 수 없는 일이야”라고 생각하며 세상의 불공평과 불의를 전혀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갈등과 다툼을 경험하게 되어서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로운 삶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가지 못하고 좌절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더 좋은 방법은 세상의 불의함과 불공평이 조금이나마 사라질 수 있도록 사회 운동이나 사회에 소외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관심을 가지면서 개인의 삶에서 건강하게 기여하며 살아가며 동시에 세상에는 불의함과 불공평함이 공공연하게 많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고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사람들이나 사회에서 실망을 덜하며 힘을 내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의와 사랑 실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불공평한 경험을 했을 때 또는 사기를 당했을 때, 억울한 일을 겪었을 때 우리는 쉽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나는 잘 살았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힘들어질 때가 있다. 그런데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의하고 불공평한 세상이기에 그것을 보편적인 경험으로 인정하고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군!”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이런 일이 줄어드는 데 작은 기여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불공평함을 이겨내는 지혜로운 방법일 것이다. 코비드로 인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 인생의 불공평함과 인간사의 불공정함에 원한이 맺힌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이럴 때 일수록 어려운 인생살이를 인정해주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서로가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사람들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들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대우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회 정의입니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들려는 국가 정책은 결국 사람들을 매우 불공평하게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 하이에크 –

김훈 박사 (호주기독교대학 학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