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9년 2월 18일, 제6차 십자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아이유브 술탄국의 알카밀이 10년 간의 휴전과 십자군측에게 예루살렘 반환 합의
제6차 십자군 (Sixth Crusade, 1228 ~ 1229)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 (Friedrich II, 1194년 12월 26일 ~ 1250년 12월 13일)에 의해 조직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십자군 원정을 조건으로 황제대관을 받았으나 원정을 미뤄 파문되자 억지로 실시한 것인데, 그는 이슬람 세계와 관련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절대 전투를 하지 않고 상대방과의 교류를 통해 1229년 2월 18일 조약으로 예루살렘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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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차 십자군 원정
1225년 여름이 되어서도 프리드리히 2세는 출정을 준비하지 않았다. 이에 호노리오 3세가 분노하였고, 프리드리히 2세는 2년의 시간을 더 주면 1천의 기사를 더 모집하겠다고 교황을 설득하였다.
1225년 7월 20일, 몬테카시노에서 산 제르마노 조약이 체결되었고 프리드리히는 1227년에도 출정하지 않는다면 10만닢의 금화를 벌금으로 내거나 파문을 당하겠다고 서약하였다. 이로써 교황령 일부를 장악하던 독일군이 철수하였고 시칠리아 왕국 내 교황 재산도 환수되었다.
호노리오 3세는 프리드리히의 십자군 종군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와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과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둘은 1225년 11월 9일 브린디시 성당에서 결혼하였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동시에 예루살렘 국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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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탈리아에서 법에 의한 절대정치를 시행했다. 그는 콘실리어리 (조언자)인 피에르 드 비녜 (1190 ~ 1249년)의 도움으로 나폴리 대학교를 설립하였고 1231년에 멜피 헌법을 제정하는 등 시칠리아 왕국의 발전을 이끌었다. 한편으로는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편지를 주고 받았고, 알 카밀에게 천체 관측기를 선물로 받을 만큼 이슬람 세계와 활발한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개방적인 태도, 특히 이슬람과의 교류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그레고리오 9세는 이전의 십자군 전쟁이 잇달아 실패하자 교황권을 다시 세우기 위해 다시 대규모 십자군 원정을 기획하고 이번에는 확실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 황제가 직접 출정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비종교적인 성향인데다가 이슬람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자신이 출병하게 되면 그 틈을 타 교황이 독일에서 세력을 넓힐 것이 뻔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출병을 미루고 있었다.
이에 교황은 출병하지 않으면 파문에 처하겠다고 협박했고, 이에 프리드리히 2세는 1227년 마지못해 원정길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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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탈리아를 채 떠나기도 전에 병사들 사이에 장티푸스가 퍼졌고 황제 자신도 장티푸스에 걸려 어쩔 수 없이 회군해야 했다. 그러나 교황은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파문을 선언해버렸다.
파문당한 프리드리히 2세는 한동안 시칠리아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파문 철회를 받기 위해서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러나 무력으로 탈취할 생각은 없었고 외교를 통해 원만히 예루살렘을 확보하려 했다. 마침내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5]과 협상을 한 끝에 성전산에 대한 이슬람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예루살렘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얻는데 성공하여 1228년,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이양 받아 예루살렘 왕에 등극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지만 권위 없는 왕이었다.
황제는 성지 탈환에 성공하여 의기양양하게 귀국했으나, 교황은 이슬람과 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격렬히 분노했다. 그러나 성지를 탈환한 공로는 부인할 수 없었기에 교황은 여론에 떠밀려 아나니에서 그를 만나 파문을 철회했다 (1230년). 교황은 그를 ‘무함마드의 추종자’라 부른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교회를 사랑하는 아들’로 불렀다.
프리드리히의 6차 십자군은 군사적 우위나 교황의 도움 없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예시를 남기게 되었다.
한편 1244년 예루살렘의 3분의 2는 이집트군에 의해서 다시 점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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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