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본기 – 권3 신라본기 제3
김부식의 ‘삼국사기 – 권3 신라본기 제3’ 내물이사금, 실성이사금, 눌지마립간, 자비마립간, 소지마립간의 본기다.
권3 신라본기 제3: 내물이사금, 실성이사금, 눌지마립간, 자비마립간, 소지마립간
○ 내물이사금
내물 마립간 (奈勿 麻立干, ? ~ 402년, 재위: 356년~ 402년) 또는 내물 이사금 (奈勿 泥師今)은 신라의 17대 임금으로, 내물왕 (奈勿王)이라고도 한다. 성은 김씨이고, 구도 (仇道) 갈문왕의 자손으로, 아버지는 13대 미추 이사금의 동생인 각간 김말구 (金末仇)요, 어머니는 휴례부인 김씨 (休禮夫人 金氏)이며, 왕후는 보반부인이다. 보반부인이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신뢰하기 어렵다. 다른 이름은 나물 (那勿), 나밀 (那密)이다.
그가 미추 이사금의 조카라는 설과 그의 부인인 보반부인이 미추의 딸이라는 설은 그와 미추의 활동기간의 차이로 신뢰가 어렵다.
내물 이사금 재위 시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 대부분을 차지하는 등 지배세력이 강화되어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석씨 가문의 흘해 이사금에 이어 김씨인 내물 이사금이 등극함으로써 이후 김씨의 왕위 계승이 확립되었다. 이는 왕권이 강화되고 안정되어 여타 집단들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였다.
– 대외 관계
.백제
366년 음력 3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와 동맹을 맺었으며, 368년 봄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명마 두 필을 보내왔다. 373년 백제의 독산 성주가 3백 명의 주민과 함께 투항해오자, 내물 마립간은 이들을 받아들여 진한 6부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이에 근초고왕의 항의가 있었으나 내물 마립간은 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고구려
392년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왔으며, 고구려의 세력이 강성해져 내물 마립간은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399년 백제와 가야 그리고 왜의 연합공격을 받은 내물 마립간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함으로써 광개토왕은 5만 군사를 보내 가야와 왜군을 물리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 영토 안에 머물기도 하였다. 주변국의 잇단 침공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내물 마립간이 몸져눕자 401년 고구려는 볼모로 와있던 실성을 돌려보내 왕위를 잇게 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보다 앞선 고구려의 문화와 고구려를 통한 중국 북조(北朝)의 문화를 도입하며 차차 발전을 하게 되었다.
.왜 (倭)
364년 음력 4월 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신라 군사로 위장하고 들녘에 용병을 매복시켜놓았다. 토함산에 신라 군사가 많은 것으로 믿은 왜군은 곧바로 직진하여 들녘으로 향했으나 신라 복병의 뜻하지 않은 공격을 받고 대패하여 달아났다. 393년 음력 5월 왜인이 다시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았다. 군사들은 마립간에게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지만, 마립간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왜군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농성하여, 마침내 왜군이 퇴각하자 2백 기병으로 퇴로를 막고 보병 1천을 내보내 협공함으로써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진 (前秦)
381년, 위두 (衛頭)를 중국의 진(351년~394년)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진의 황제 부견 (재위 357년~ 385년)이 묻기를 “해동의 사정을 말하매 언어가 예전과 다르니 어찌 된 일인가?” 하는데 위두가 답하기를 “이는 중국과 동일한 현상이라, 시대가 바뀌며 말과 이름이 변하니 오늘의 말이 어찌 옛과 같겠는가?” 하였다.
– 죽음
400년 신라는 국가존망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45년 10월 왕의 어마 (御馬)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울었다.” _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이사금조
신라는 볼모까지 보내며 고구려와 제휴하였고, 고구려와의 항쟁에서 열세에 있던 백제는 신라와 경쟁관계였던 가야를 부추겨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왜의 소국들을 동원해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잇단 천재지변과 왜의 침략으로 국력이 소진된 신라는 남천 가에서 크게 패하고 가야와 왜의 연합군에게 서라벌까지 함몰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다급해진 내물 마립간은 백제와의 전쟁을 위해 평양에 진주해 있던 광개토왕에게 구원을 요청해 그의 도움으로 겨우 가야와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고구려 덕에 신라는 오랜 숙적 가야를 패퇴시키고 낙동강 하구에 이르는 지역을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한동안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변국의 잇단 침공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몸져누운 내물 마립간은 402년 5월에 붕어하여 첨성대 서남쪽으로 그의 능이 조영되었다.
신라 후기에는 그의 방계 후손들이 왕위를 잇게 된다.
○ 가계
할아버지 : 김구도 갈문왕
아버지 : 각간 김말구(金末仇) 갈문왕
어머니 : 휴례부인 김씨(休禮夫人 金氏)
왕후 : 보반부인 김씨(保反夫人 金氏)
딸 : 아류부인 김씨(阿留夫人)
아들 : 눌지(訥祗) : 417년에 눌지 마립간(訥祗麻立干)(? ~ 458년) 즉위
아들 : 복호(卜好) : 내물 이사금의 둘째 아들
아들 : 미사흔(未斯欣) : 내물 이사금의 셋째 아들(? ~ 433년)
○ 실성이사금
실성 이사금 (實聖 泥師今, ? ~ 417년, 재위 402년~ 417년)은 신라의 제18대 임금이며 김알지의 후손으로 이찬 대서지 (大西知)와 석씨 이리 (伊利) 부인의 아들로, 그의 왕비는 아류부인 김씨 (阿留夫人 金氏)로 내물 이사금 (奈勿泥師今)의 딸이었다. 다른 이름은 실주왕 (實主王), 보주 (寶主), 보금 (寶金)이다.
– 생애
아버지 김대서지는 김알지의 후손이라 하나 정확한 세대는 알수 없고,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미추 이사금의 동생이라 한다. 삼국유사 왕력편의 설을 따르면 그는 미추 이사금및 말구의 동생이고, 구도 (仇道)갈문왕의 아들이 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아버지 대서지는 알지의 먼 후손으로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실성은 키가 7척 5촌이 되었고 사람됨이 똑똑하고 빼어나서 미래를 볼 줄 알았다고 한다.
부인은 내물 이사금의 딸 아루부인 김씨이다.
내물 이사금이 죽고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려 실성이 대신 왕으로 옹립되었다.
원년인 402년 음력 3월 왜와 우호를 맺고 미사흔 (未斯欣)을 볼모로 보냈다. 403년 음력 7월 백제가 침입했으나 기록이 자세하지 않다. 405년 음력 4월 왜가 침입해 명활성을 공격했으나 깨트리지 못했고, 이사금이 기병을 거느리고 퇴로를 막아 3백여 명의 왜군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왜는 407년 음력 3월과 6월에 동쪽과 남쪽으로 다시 침입하여 노략질을 해 일백여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408년 음력 2월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실성 마립간은 선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서불한 미사품이 ” ‘무기란 흉하며, 싸움이란 위험하다’란 말이 있습니다. 하물며 큰 바다를 건너 타국을 치다가 실패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보다 험한 곳에 의지해 관문을 설치해 두었다가 그들이 오면 막아 우리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고, 유리할 때 나가 사로잡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남을 이용하며 이용당하지 않는 계략으로, 대책 가운데 으뜸일 것입니다.” 라고 조언하여 실성 마립간이 그의 말을 좇았다. 이가 곧 신라의 대왜 방위전력이 되었다.
412년 실성 마립간은 내물 마립간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고, 415년 음력 8월 왜인들과 풍도 (風島)에서 싸워 이겼다.
실성마립간은 복호에 이어 내물 마립간의 또 다른 아들 눌지까지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려다 오히려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눌지가 반기를 들어, 결국 눌지에게 처형되고, 눌지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름으로써 김씨의 왕위 계승이 이어지게 되었다.
– 가계
왕비인 아류부인 김씨는 내물 이사금의 딸이라 하며, 일설에는 미추 이사금의 딸이라는 설도 있다.
아버지 : 이찬 김대서지(金大西知)
어머니 : 이리부인 석씨(伊利夫人 昔氏) – 아간 석등보(昔登保), 혹은 석등야(昔登也)의 딸
왕후 : 아류부인 김씨(阿留夫人 金氏) – 내물 이사금(奈勿泥師今)의 딸.
딸 : 아로부인 김씨(阿孝夫人 金氏) – 눌지 마립간의 왕비.
외손자 : 자비 마립간
딸 : 치술공주 김씨(鵄述公主 金氏) – 박제상의 아내, 박제상 사후 눌지 마립간의 후궁
외손녀 : 박씨(朴氏), 미사흔(未斯欣)의 처
아들 : 김치휴(金鵄休) – 아간, 이름과 관직만 전하고 행적은 알려져있지 않다.
후궁 : 석씨, 흘해 이사금의 딸 또는 후손
○ 눌지마립간
눌지 마립간 (訥祗 麻立干, ? ~ 458년, 재위 417년~ 458년)은 신라의 제19대 임금이자, 삼국사기에 따르면 최초로 마립간의 칭호를 사용한 임금이다. 신라본기에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하길 “마립간이란 방언으로 말뚝을 이른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는데 관위에 따라 배치했다. 즉 임금의 말뚝을 위주로 신하의 말뚝들을 그 아래 벌였으니 왕호를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생애
내물 이사금이 재위 37년인 392년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를 보냈는데, 실성이 이에 한을 품고 내물의 아들 눌지를 몰아내고 동생 복호와 미사흔을 각각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냈다. 그 뒤 고구려 사람을 시켜 눌지를 살해하려 했으나 오히려 눌지가 실성을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복호와 미사흔은 418년박제상을 시켜 돌아오게 했는데, 이 일화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424년 음력 2월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431년 음력 4월 왜가 동쪽을 침범하고 명활성을 둘러쌌으나 소득 없이 물러났다. 432년 봄에 기근이 발생했다. 433년 미사흔이 죽었는데, 임금이 서불한에 추증했다. 그해 음력 7월 백제와 화친을 맺었다 (나-제 동맹). 나-제 관계가 좋아져 이듬해 434년 비유왕이 음력 2월에 말 두 필을, 음력 9월에 흰 매를 보냈고 음력 10월에 눌지가 황금과 명주를 보내 답례했다.
440년 왜가 두 차례에 걸쳐 남쪽과 동쪽 변경을 침입, 백성들을 납치했다. 444년 음력 4월에는 왜가 보다 대규모로 쳐 와, 금성을 열흘간 에워쌌으나 군량이 떨어져 도망쳤다. 임금이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추격해 독산 동쪽에서 싸웠으나, 신라군 장병 절반이 넘게 죽었다. 임금이 패해 말을 버리고 산 위에 올라, 적들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간신히 왜군의 눈으로부터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450년 음력 7월 고구려의 한 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하슬라성주 삼직이 그를 죽였다. 장수왕이 노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마립간이 사죄하자 그대로 물렀다. 그러나 454년 음력 8월 다시 고구려가 침공했으며, 455년 음력 10월엔 고구려가 백제를 침공하는 것을 마립간이 군사를 보내 구원했다.
– 가계
부왕 : 내물 마립간(奈勿 麻立干, ? ~402 재위:356~402)
모후 : 보반부인 김씨(寶飯夫人 金氏)
왕후 : 아로부인 김씨(阿孝夫人 金氏) – 실성 마립간(實聖 泥師今, ? ~417 재위:402~417)의 딸
아들 : 자비 마립간(慈悲 麻立干, ? ~479 재위:458~479)
딸 : 조생부인(鳥生夫人)
사위 : 김습보(金習寶)
후궁 : 치술공주 김씨(鵄述公主 金氏)
딸 : 황아공주(皇我公主)
○ 자비마립간
자비 마립간 (慈悲 麻立干, ? ~ 479년 3월 12일 / 음력 2월 3일, 재위 458년 ~ 479년 3월 12일)은 신라의 제20대 임금이다.
– 생애
눌지 마립간의 맏아들이며, 실성 이사금의 외손자이다. 왕비 김씨는 서불한 미사흔의 딸로, 재위 4년째인 461년 부인으로 맞았다.
459년 음력 4월 왜인들이 병선 백여 척으로 습격하고 월성을 에워쌌다. 신라군은 마립간의 지휘에 따라 성에서 지키다가 적이 퇴각하는 것을 기다려 추격, 바다 어귀로 몰아 물에 빠져 죽게 한 적병이 절반이 넘었다. 462년 음력 5월 다시 왜가 쳐들어와 활개성을 점령하고 백성 1천여를 생포했다. 이듬해인 463년 음력 2월 또다시 쳐들어와 삽량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립간이 벌지와 덕지에게 명해 매복해 있다가 후퇴하는 왜병을 요격, 크게 이겼다. 이 해 왜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변경에 두 개의 성을 쌓고 음력 7월에 군을 사열하였으며,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했다.
468년 봄, 고구려와 말갈이 실직을 습격하였다. 이해 음력 9월 하슬라 주민중 15세 이상 되는 자들을 징집해 이하에 성을 쌓았다. 마립간은 이후 방위체계 확립에 주력, 469년 음력 4월의 수해 복구를 위해 음력 7월에 신라 전역을 순행했으며, 470년 삼년산성을, 471년 모로성을 쌓고, 473년 명활성을 수리했으며, 474년 일모,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
475년 음력 7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자, 개로왕이 태자 문주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마립간이 백제에 원군을 보냈으나, 신라군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백제가 무너지고 개로왕은 이미 살해되어 있었다. 이 사건은 신라본기에는 474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는 모두 475년으로 기록되어 있어 신라본기의 기록이 잘못된 것으로 간주된다.
476년 음력 6월 왜가 동쪽을 침범하자, 마립간이 덕지에게 명해 격퇴하게 하여 2백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477년 음력 5월에 또다시 크게 군을 일으켜 다섯 갈래로 쳐 왔으나 소득 없이 돌아갔다.
– 가계
부왕 : 눌지 마립간(訥祗 麻立干)
모후 : 아로부인 김씨(阿孝夫人 金氏)
왕후 : 파호부인 김씨(巴胡夫人 金氏), 미사흔의 딸
장남 : 미상
차남 : 미상
아들 : 소지 마립간(炤知 麻立干)
딸: 준명공주 김씨(俊明公主 金氏)
후비 : 김씨, 김물력(金勿力)의 딸
○ 소지마립간
소지 마립간 (炤知 麻立干, ? ~ 500년, 재위; 479년 ~ 500년)은 신라의 제21대 왕이다. 조지 (照知) 마립간 또는 비처(毗處)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소지”나 “비처”가 다 “비치”로 읽은 것이지만, 비처는 원래 쓴 이두자이고, 소지는 불경(佛經)에 맞추어 고쳐 만든 이두자이다. 자비 마립간과 서불한 미사흔의 딸 김씨의 장자이며, 왕비 선혜부인은 이벌찬 내숙의 딸이다.
– 생애
2년(480년) 11월에 말갈이 북쪽을 침범하였다. 이후 신라는 전쟁준비에 들어가 3년(481년) 2월에는 왕이 친히 비열성에 행차해 군사를 정비하기도 했다. 3월에 고구려와 말갈이 함께 북쪽 변경을 침입, 호명성 및 일곱 성을 빼앗고 미질부로 진군했다. 신라는 백제와 가야에 원군을 요청, 고구려와 말갈을 막아내, 퇴각하는 것을 이하 서쪽에서 쳐부수고 1천여를 베었다. 4년(482년) 5월에는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했다.
6년(484년) 7월 고구려가 다시 북쪽을 침공, 백제군과 함께 모산성 아래에서 크게 쳐부쉈다.
7년(485년) 2월에는 구벌성을 쌓아 군사를 정비하고, 8년(486년) 정월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임명하고 일선 지역의 장정 3천을 징발해 삼년산성과 굴산산성을 고쳐 쌓았다. 4월 왜인들이 변경을 침범했고, 침입을 막아낸 8월 낭산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했다.
9년(487년) 소지마립간은 신궁(神宮)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497년 2월). 신궁이 설치된 나을(蘿乙)은 시조 혁거세왕이 처음 태어난 곳이라 한다. 3월에는 곳곳 관부에 명해 도로를 수리하게 하고 음력 7월에 월성을 보수했다. 그러나 이 해 10월 또 다시 우레가 있었다.
10년(488년) 정월, 마립간은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2월 일선군에 행차해 빈민을 구제하고 3월에 돌아오면서 지나는 주군의 죄수들을 2대 사형죄를 제하고는 용서했다. 11년(489년) 정월에는 하는 일 없는 백성들을 몰아다 농사를 짓게 하였는데, 신라본기에 기록된 최초의 실업자 대책이었다.
11년(489년) 9월 고구려가 북쪽을 다시 침범해 10월 호산성을 함락시켰다. 12년(490년) 음력 2월 비라성을 재건, 국방을 손보고 음력 3월에 수도에 시장을 개설, 사방의 물자를 유통시켰는데 이는 역시 신라본기에 기록된 최초의 경제진흥책이다.
15년(493년) 3월 백제의 동성왕(東城王)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여,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 결혼동맹을 맺었다. 7월에는 해안에 임해진과 장령진을 설치, 왜로부터의 방비를 강화했다.
17년(495년) 8월에는 고구려가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해 원군을 청해오자, 신라가 군사를 보내 고구려군을 무찔렀다. 18년(496년) 음력 7월 고구려군이 다시 신라의 우산성을 쳤는데, 장군 실죽이 나가 맞아 싸웠다.
19년(497년) 4월에는 왜가, 8월에는 고구려가 침공하였다. 고구려군은 결국 우산성을 점령했다.
22년(500년) 날이군에 행차했다가 벽화부인을 아내로 얻었고, 이 해 11월 죽었다.
– 가계
부왕 : 자비 마립간(慈悲 麻立干)
모후 : 파호부인 김씨(巴胡夫人 金氏)(서불한(舒弗邯) 미사흔(未斯欣)의 딸
왕후 : 선혜부인 김씨(善兮夫人 金氏)(이벌찬(伊伐飡) 내숙(乃宿)의 딸)
딸 : 보도부인(保道夫人 혹은 保刀夫人)
후궁 : 벽화부인(碧花夫人)
아들 : 김산종(金山宗)
후궁 : 벽아부인 김씨(碧我夫人 金氏)(벽화부인(碧花夫人)의 모후
후궁 : 보혜(寶兮)
후궁 : 준명공주 김씨(俊明公主 金氏)(자비마립간(慈悲 麻立干)의 딸
후궁 : 홍수(洪水)
후궁 : 보옥공주(寶玉公主)
후궁 : 묘양(妙陽)
후궁 : 융융공주 김씨 (隆隆公主 金氏) 가야 (伽倻) 공주 (公主)
– 병신갑 전설
《삼국유사》에는 한국의 정월 대보름 풍속에 관련, 비처왕(소지왕)이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비처왕 즉위 10년 무진 (488년), 왕이 천천정 (天泉井)에 거동하였는데,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라고 했다. 왕은 기사 (騎士)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게 했는데, 기사는 남쪽의 피촌 (避村)에서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를 놓치고 말았다. 어쩔 줄을 몰라 그 주변만 맴돌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연못에서 한 노인이 나타나 기사에게 글을 주었다. 그 겉에는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기사가 돌아와 이것을 바치자, 왕은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그냥 열어보지 않고 한 사람만 죽는 것이 낫겠다”며 글을 읽지 않으려 했는데, 일관 (日官)이 “두 사람은 서민을 가리키는 것이고 한 사람은 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라고 진언하였다. 왕이 마침내 그것을 열어 보니, 안에 「사금갑 (射琴匣, 거문고 갑을 쏘아라)」고 적혀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 갑을 쏘자, 거문고 갑 안에서 숨어있던 중과 궁주 (宮主)가 튀어나왔다. 두 사람은 왕 모르게 거문고 갑 안에 숨어서 간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은 그들을 사형에 처했고, 이후 신라에서는 해마다 정월 상해일 (上亥日) · 상자일 (上子日) · 상오일 (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으며 특히 15일을 오기일 (烏忌日)이라 하여 찰밥 (약밥)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이것을 신라에서는 「모든 일을 특별히 조심하고 꺼린다」는 뜻의 달도 (怛忉)라 불렀으며, 오늘날 한국의 정월 대보름 절식(節食)의 하나로서 약밥을 먹는 풍속의 유래가 되었다. 또한 노인이 나타나 편지를 전해주었다는 연못을 서출지 (書出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설화는 신라의 전통적인 토속 신앙과 불교 (佛敎) 사이의 갈등, 불교의 수용을 둘러싼 신라 왕실과 귀족 집단의 대립의 표현, 내지는 김씨 왕족의 소지왕에 반대하는 왕실 내부 세력에 대한 제거를 반영하고 있다는 해석이 있다. 한편 소지왕 9년 (487년)에 새로 지었던 신궁 (神宮) 설치와 관련된 갈등을 알려주는 설화라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소지왕이 거동하였던 천천정에 대해서 나희라는 「천천 (天泉)」이란 신궁이 지어진 곳, 즉 시조 혁거세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태어났다는 나정 (蘿井)과 관련이 있는 건물이며, 시조의 탄생이 하늘과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은 이름으로서 나정이 「천천」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소지왕은 신궁을 설치하고 난 뒤 이곳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거동하였으며 제사에서 받은 신탁으로 궁내의 중요한 문제를 처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채미하에 따르면 신라에 신궁이 지어지기 전에는 시조 혁거세왕을 모시는 「시조묘 (始祖廟)」가 존재했고 이것은 박씨 이후 석씨와 김씨가 함께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게 된 시대에도 박씨 왕족의 「족조 (族祖)」로서뿐 아니라 「사로국 (신라)」이라는 국가 전체의 「건국조」,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의 아들이자 「천신(天神)」으로서 신라 전체의 숭모를 받았고, 사로국이 주변 소국을 통합한 왕국으로 성장하면서 기존 소국들의 제천이 사로국의 제천으로 통합된 뒤에는 기존 시조묘 제사의 대상이던 혁거세왕의 격이 사로국뿐 아니라 신라 연맹체 전체의 국조로서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시조묘 제사는 당시 정치세력 집단의 제사체계를 초월해 신라 전체의 소속 구성원의 일체감과 단결의 구심점이었으며, 새로이 즉위한 왕들은 시조묘 제사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입증하고 그의 통치가 정당한 것임을 안팎에 공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 성씨가 교대로 왕위를 계승하던 시대가 끝나고 내물왕 (내물 마립간) 이후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게 되면서, 내물왕에서 소지왕에 이르기까지 부계 장자 계승이 실현되고, 이들 왕비 역시 김씨 출신에서 나오는가 하면 부왕(副王)이라고 할 수 있는 갈문왕의 지위 역시 왕의 형제나 가까운 부계 친족이 부자 세습을 하는 등 김씨 왕실의 정치 권력이 강화된다. 정국을 주도하게 된 김씨 왕실은 국조 혁거세왕에 대한 제사도 독점하고자 했고, 시조묘와 구별되는 새로운 제사 체계를 구상하는 와중에 소지왕에 의해 신궁이 세워지게 되었다. 기존의 혁거세왕의 능 또는 능 인근에 세워졌다고 추정되는 시조묘와는 달리 혁거세왕이 처음으로 태어난 곳, 탄강(誕降)한 곳에 세워졌는데, 시조묘 제사가 왕실뿐 아니라 여러 세력 집단의 장들이 다함께 국조이자 천신인 혁거세왕에 대해 올리는 제사였다면 신궁은 김씨 왕실만이 올리는 제사였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신궁 설치를 놓고 소지왕과 대립하였으며 이러한 양상이 사금갑 설화에 반영되어 나타났다는 것이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