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줄리어스 시저 : Julius Caesar
감독) 조지프 L. 맹키위츠 / 주연) 말론 브란도, 제임스 메이슨, 존 길구드 / 1953년
줄리어스 시저 (Julius Caesar)는 1953년 개봉한 미국의 서사 영화이다. 조지프 L. 맹키위츠가 감독과 각본을 맡았으며, 셰익스피어의 동명 희곡이 영화의 원작이다. 1953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공동수상작이다.
기원전 44년, 줄리어스 시저는 로마 권력의 절정에 오른다. 카시우스를 비롯한 일군의 정치가들은, 시저를 존경하지만 그의 권력을 위험하게 생각하는 브루투스를 앞세워 암살 계획을 꾸민다. 불길한 꿈을 꾼 아내 칼푸니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시저는 상원으로 향하는데…. 카시우스로 분한 존 길거드, 브루투스의 제임스 메이슨, 안토니우스를 연기하는 말론 브랜도 등 명배우들의 연기가 불을 뿜는 시대극.
○ 제작 / 출연
- 제작진
감독: 조지프 L. 맹키위츠
각본: 조지프 L. 맹키위츠
원작: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줄리어스 시저》
촬영: 조세프 루튼버그
음악: 로저 미클로시
편집: 존 D. 더닝
미술: 에드워드 C. 카르파그노, 세드릭 기븐스
의상: 허쉘 맥코이
배급사: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개봉일: 1953년 6월 4일(미국), 1955년 3월 11일(대한민국)
시간: 121분
국가: 미국
- 출연진
말론 브란도
제임스 메이슨
존 길구드
루이즈 칼헌
에드먼드 오브라이언
그리어 가슨
데버러 카
조지 맥크리디
마이클 페이트
○ 내용
조셉 L. 맨키비츠 감독이 미국의 MGM영화사에서 1953년에 내놓은 영화 “줄리어스 시저”는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였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로마의 공화정 말기, 즉 줄리어스 시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 해전에서 숙적인 폼페이 (폼페이우스)를 무찌르고 로마로 귀환하여 종신 독재관으로 취임한 기원전 44년이다.
시저와 그의 부인은 영화 초반부에 약간 나온다.
이미 모든 주요 직책을 역임한 시저는 같은 해 2월에 있었던 루퍼칼 축제에서 전투에 함께 출전했던 안토니 (안토니우스)가 세 번씩이나 왕관을 바칠 정도로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 물론 그자리에서 세 번 모두 거절했지만.
그러나 한 사람에게 너무나 많은 권력이 집중되고 절대권력을 향한 시저의 야심을 간파한 카시우스, 브루터스 등의 공화주의자들은 공화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저를 제거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시저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이들의 계획은 같은 해 3월 15일에 실행에 옮겨지고 시저는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살해되었다.
영화의 제목은 “줄리어스 시저”지만 영화의 중심축은 시저 살해의 주모자인 카시우스와 브루터스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의 시저 살해 모의과정과 살해후의 브루터스와 시저의 심복이었던 안토니의 대결구도에 있다.
따라서 줄리어스 시저 (루이스 캘헌)는 초반부에 잠깐 등장하고 영화의 실제 주인공인 브루터스 (제임스 메이슨)과 카시우스(존 길러드 분)를 중심으로 한 살해 참여자들의 모의 장면과 살해 장면이 나온다.
운명의 날인 기원전 44년 3월 15일, 나가지 말라는 아내의 충고를 무시하고 로마의 폼페이우스 극장에서 열린 원로원 회의에 나간 시저는 무방비 상태로 카시우스, 부르터스를 중심으로 한 공화정 지지자들에게 살해당한다.
이때 시저가 한 마지막이 말이 “브루터스, 너까지도…”였다고 한다.
문제는 시저가 살해당한 후에 벌어졌다.
시저의 살해에 불안을 느낀 안토니는 브루터스를 찾아와 이들의 뜻을 따르겠다며 시저의 장례식에 자신이 추도 연설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브루터스는 자신이 연설 한 후에 안토니에게 추도사를 하라고 허락한다.
광장에서 행해진 브루터스와 안토니의 연설은 언어의 천재 셰익스피어의 진면목이 그대로 드러나는 명연설이며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다. 먼저 브루터스가 시저를 죽여야할 이유를 이야기 한다.
“이 부루터스가 시저를 사랑하는 마음은 결코 남에게 못지 않았노라고, 그렇다면 왜 부루터스는 시저를 쓰러트렸는가 반문하겠지만, 그 대답은 이렇소. 내가 시저를 덜 사랑한 탓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한 탓이라고.” …. “여러분은 시저 혼자 살고 나머지는 다 노예로서 죽기를 원하는가, 시저가 죽고 만인이 자유인으로 사는 것보다도? 시저는 나를 사랑했기에, 나는 그분을 위해 눈물을 금할 길 없소. 그가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면 나는 기쁘고, 용감했던 시절을 회상하면 나는 찬탄하오. 허나 그가 야심을 품은 것을 알고 나는 그를 찌른 것이오. 시저의 사랑에 대해서는 눈물이, 행운에 대해서는 기쁨이, 용기에 대해서는 존경이, 야심에 대해서는 죽음이 있을 뿐이오.”
절대권력을 향한 시저의 야심이 결국은 그의 죽음을 불렀고 로마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시저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고 군중들의 이성에 호소한 것이다.
브루터스가 추도사에서 시저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한 후 시저의 시신을 들고 들어와 추도사를 하는 안토니 브루터스의 연설에 공감한 군중들은 시저의 살해를 수긍한다.
다음에 시저의 시신을 들고 등장한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민중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 놓는데…
“시저는 수많은 포로들을 로마에 데리고 왔으며, 그 포로들의 석방 보석금으로 국고를 채웠소. 어찌 이것이 시저가 야심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단 말입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울면 시저도 울었습니다. 야심이란 분명 이보다 더 냉혹한 성질로 이루어졌을 겁니다. 하지만 브루터스는 시저가 야심을 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브루터스 공은 고결한 분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보셨습니다. 루퍼칼 축제에서 내가 세 번이나 시저에게 왕관을 바쳤지만, 그는 세 번이나 그 왕관을 거절했습니다. 이게 야심이란 말입니까?”
안토니는 시저의 선행을 강조하면서 시저에 대한 브루터스의 비난을 열거할 때는 꼭 고결한 브루터스라고 강조함으로써 민중들에게 브루터스의 이중성을 느끼게 한다.
부루터스가 시저의 야심 때문에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대의명분에 안토니는 시저의 민중을 위하는 위대한 행동이 왜 야심이냐고 반문하면서 민중들의 감성에 호소한다.
마지막으로 끝까지 민중들을 위해 돈을 내놓고 자신의 정원을 기부한 시저의 유언장을 발표한 안토니의 연설은 민중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 민중들은 거의 폭도로 변해 브루터스 일당은 로마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그리스 북부 필리피 지방. 카시우스의 군대와 안토니의 군대는 안토니와 옥타비우스 (시저의 양자로 훗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의 군대에게 쫓겨 결국 둘 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젊은 시절의 말론 브란도를 볼 수 있는 “줄리어스 시저”는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미술상을 수상했고 영국 아카데미 영화제에서는 남우 주연상 (존 길거드)과 외국인 남우 주연상 (말론 브란도)을 수상했다.
○ 영화 이모저모
이 영화의 원작자 셰익스피어가 1599년 경 발표한 것으로 알려진 “줄리어스 시저”는 비슷한 시기에 영국에서 출간된 “플루타코스 영웅전-위대한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의 생애”에서 줄거리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작품의 골격은 “플루타크 영웅전”에서 가져왔지만 등장인물의 성격은 셰익스피어 자신이 창조한 것으로 플루타코스가 그린 인물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셰익스피어는 시저를 플루타코스보다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브루터스에 대해서는 더 많은 애정을 보이고 있다.
시저가 간질이 있다거나 부인이 불임에서 벗어나도록 루퍼칼 축제에서 경기도중 아내를 스쳐 지나가라고 안토니에게 부탁하는 등 미신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처럼 묘사하고 카시우스를 통해서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는 인물임을 묘사하는 장면이 그동안 카이사르가 이룬 업적과는 많이 동떨어져 보이게 한다.
그러나 브루투스에 대해서는 그가 시저를 제거하기로 모의한 날 밤에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가를 위해 시저를 죽여야 한다는 명분을 강조하고 이성적으로 민중을 향해 설득하는 민주적인 인물로 그렸다.
그밖에도 브루터스는 시저와 함께 안토니도 죽여야 한다는 카시우스의 주장에 로마인의 자유를 위해서는 시저 하나면 된다면서 안토니를 살려주는 인도적인 인물로 묘사했다.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브루터스의 추도사와 안토니의 추도사를 통해 시저의 살해자들과 시저의 추종자들의 입장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면서 민중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묻고 있다.
영어로 된 연설문 중에서 아직까지도 명문으로 꼽히는 두사람의 연설문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한다.
카이사르가 살해된 후, 그가 유언장에서 후계자로 지정하고 양자로 입양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새로운 삼두 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카이사르의 복수를 시작한다.
공화정을 지지한 정치가들이 학살 당하기 시작하여 원로원 의원만도 100명 이상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기원전 42년, 그리스의 북쪽 필리피에서 안토니우스는 공화주의자들을 완전히 무찔렀다.
이때 카시우스와 브루터스는 자결했다.
결국 한 사람의 독재자를 막기 위해 카이사르 살해에 가담한 공화주의자들의 거사는 오히려 로마에서 공화주의자들의 입지를 더욱 좁혔고 결과적으로 공화정의 종식을 재촉했다.
카이사르 살해 후 계속된 내전은 카이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1년 그리스의 악티움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승리한 후에 절대 권력의 길에 들어서게 했다.
기원전 27년 1월, 로마 원로원은 그를 프린켑스, 즉 제1인자로 선언함으로서 그는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실제적으로 제정 (帝政)이 시작되었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