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8년 3월 16일,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로 조선의 병인박해 순교자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Marie-Nicolas-Antoine Daveluy, 1818 ~ 1866) 출생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프: Marie-Nicolas-Antoine Daveluy,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 ~ 1866년 3월 30일, 충청남도 보령)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이며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5대 교구장이다. 조선에 입국하고 21년 동안을 복음을 전파하며 여생을 보냈다. 한국명은 안돈이 (安敦伊)이다.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와 함께 병인박해가 있을 때 순교하였으며, 1984년에 한국의 103위 순교자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Marie-Nicolas-Antoine Daveluy)
.조선교구장, 순교자
.한국명: 안돈이 (安敦伊)
.출생: 1818년 3월 16일, 프랑스 아미앵
.선종: 1866년 3월 30일 (48세), 조선 충청도 보령 갈매못
.매장지: 절두산 순교성지 / 축일: 9월 20일
.교파: 로마 가톨릭 교회
.시복: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
.시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의 좌우명은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가진 자이다.”이다.
성 안토니오 다블뤼의 좌우명은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언제나 큰 힘이 된다.
북프랑스 피카르디 지방의 부유한 명문가에 속했던 그는 어쩌면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겠다며 사제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다.
시메옹프랑수아 베르뇌와 함께 병인박해가 있을 때 순교하였으며, 1984년에 한국의 103위 순교자의 일원으로 시성되었다.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1968년 10월 6일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생애 및 활동
- 신학교육
다블뤼 주교의 아버지는 공장을 소유했으며, 시 의회의 일원이었다. 그의 가족은 종교적인 경건함으로 유명하였다. 다블뤼 주교는 농민의 아들인 모방신부처럼 대다수의 로마 가톨릭 선교사들이 무산계급의 아들이었던 것[3]과 달리 부르주아 계급의 아들이었다는 다른 점이 있다. 7세에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1827년 예수회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다블뤼는 1834년 10월 천주교 사제가 되기를 원하여 그의 고향 인근의 생 쉴피스 (St. Sulpice)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36년 그는 파리의 생 쉴피스 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841년 그는 본당 사제로 임명되었다. 1843년 10월까지 본당 사제로 사목한 뒤,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하게 된다.
- 조선에서의 사목
1844년 그는 6개월의 여행 끝에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천주교 조선교구의 제 3대 대목구장인 페레올 주교는 자신과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으로 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상하이에서 작은 나무배 라파엘 호를 타고 긴 여정 끝에 충청남도의 강경에 도착하였다. 다블뤼는 1846년 조선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2년 만에 1700명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하는 성사 (로마서 8장 참조, 성사는 성례전이라고도 함)인 세례를 주었다. 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지만, 아픈 와중에서도 라틴어를 가르치고, 한국어-프랑스어 사전과 여러 천주교 서적을 집필하였다. 그는 또한 조선 순교사를 집필하고 조선 천주교의 역사를 연구하였다. 페레올 주교를 이어 조선 대목구장이 된 베르뇌 주교가 도착하자 1844년 부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 악카의 명의주교 서품은 1857년 3월 25일 개인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베르뇌 주교가 1866년 2월 순교하자, 다블뤼 주교가 조선 대목구장 승계를 하였다.
- 순교
다블뤼 주교는 1866년 3월 11일 그를 돕던 황석두 루카와 함께 체포되었다. 3월 14일 다블뤼 주교와 다른 두 선교사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는 한양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들은 심문과 고문을 받고, 한양에서 100km 떨어진 갈매못에서 사형을 받게 되었다. 당시의 왕이었던 고종이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에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갈매못에서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와 장주기, 황석두와 함께 참수되었다.
축일은 9월 20일 (103위 성인)이다.
- 한민족의 전통을 존중함
그림책인 ‘조선에서 파리까지 편지 따라 역사 여행’ (조현범 글, 강전희 그림, 너머학교)에 따르면, 다블뤼 주교는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순교할 때까지 21년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입국 –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참수당하여 순교) 동안 살아낸 조선을 아끼고 사랑했다. 다블뤼 주교가 남긴 편지에 따르면, 그는 한국어를 매우 잘했고, 산길 → 중국 →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 프랑스를 거쳐 파리외방전교회에 배달된 편지와 보고서에서 소박한 판소리와 공동체가 서로 돕고 사는 한민족의 전통을 존중했다.그래서 조선의 여성들이 신던 종이신발,부채. 산삼 따위를 편지와 함께 프랑스에 보내어 한민족의 전통을 널리 알렸다. 그가 남긴 기록들은 샤를 달레 신부가 한국 천주교회사를 쓸 때에 사용할 정도로 귀중한 역사 이야기이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다블뤼 주교는 조선 사람들이 밥을 나누어 먹는 공동체 운동에 감동받아서, “이 나라에는 이상한 풍속이 있다. 밥을 나누어 먹는다.”라고 썼다고 한다.
– 유해
3일 동안 시신이 바닷가에 방치되었다가, 가톨릭 신자들에 의해 매장되었다. 1866년 6월 중순, 가톨릭 신자들이 다른 순교자의 시신들과 함께 홍산의 석죽골 (현재는 서짓골 성지로 명명됨)로 이장하였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여러번 옮겨졌다. 1882년에 나가사키로 옮겨졌으며, 1894년 5월 22일 용산 신학교로 옮겨졌다가, 1900년 9월 10일 명동대성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 현재 유해는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치되어 있다.
– 시복과 시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는 1968년 10월 6일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가 집전한 24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 1866년 발생한 조선 천주교인 박해, 병인박해 (丙寅迫害) / 병인사옥 (丙寅邪獄)
병인박해 (丙寅迫害)는 1866년 (고종 3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의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 병인사옥 (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당시 6천여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등이 처형된 사건이다.
1866년 (고종 3)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조선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다.
이 박해는 네 차례에 걸쳐 파동으로 전개되었다. 첫 번째는 1866년 봄에, 두 번째는 1866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 번째는 1868년, 네 번째는 1871년으로 이어져 도합 8,000여 명 이상의 순교자를 내었다.
1868년의 세 번째를 무진사옥, 1871년의 네 번째를 신미사옥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대원군에 의해 계속 추진된 것이므로 병인박해에 포함시키는 것이 통례이다. 따라서 병인박해는 병인년 (丙寅年)인 1866년 한 해의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뒤 6년간에 걸친 박해를 모두 지칭하는 용어이다.
– 원인
- 기해박해
1831년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교구로 선정하여 앙베르, 모방, 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조선의 양반들은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기독교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여 천주교를 금지하였으며, 1839년에는 천주교 박해사건 중 하나인 기해박해를 일으켜 3명의 프랑스 천주교 신부를 처형했다. 하지만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천주교는 확장되었다.
흥선대원군 자신은 본래 천주교를 탄압할 생각은 없었고, 반감도 없었다. 오히려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인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들과 교류할 생각을 했고, 개인적으로도 천주교는 부인 여흥부 대부인 민씨의 종교이기도 했다. 천주교를 이용해서 프랑스와의 주선을 통해, 남하하는 제정 러시아를 막으려고 하였던 것도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묵인한 이유 중 하나이지만 국외 정세에 의해 천주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 – 프랑스군이 청나라의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으로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이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천주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 남하정책
1864년 (고종 1년) 당시 러시아인이 경흥부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였을 때, 대원군 이하 정부 요원들의 놀람과 당황은 대단하였지만, 이에 대한 대책 강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이 반면에 몇몇 천주교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대책을 스스로 생각하여 이를 대원군에게 건의하였다. 즉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업고 한·불·영 3국 동맹이라도 체결할 수 있다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들대로 이것이 성사되면 종교의 자유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대원군으로부터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게 해달라는 청을 받는 데까지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 시기를 놓치고 말았으니 모처럼의 이러한 대원군의 태도에 기민하게 응하지 못하고 시일을 지연시킨 것이었다. 지방에서 전교에 종사하던 다블뤼 주교와 베르뇌 주교가 한양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시기가 너무 늦었다.
- 천주교에 대한 입장변화
더구나 베르뇌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사실상 외교적인 이용 가치가 없었고, 그동안 조정에서 그렇게도 시끄럽던 러시아인의 월경 행위와 통상 요구도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지나친 기우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배층들이 “천국과 지옥을 주장하며 혹세무민하는 사학 (邪學)”으로 여기던 천주교의 교세 확장에 대한 반발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천주교도의 굼뜬 조치·무능한 주선 (周旋)과 무책임한 발설로 “운현궁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라는 소문만 장안에 퍼지니, 대원군도 소기의 성과는 도저히 거둘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의 출세를 적극 지지해 준 조대비 이하 요로 (要路) 대관들도 천주교의 책동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청나라에서도 천주교 탄압이 다시 고개를 들어, 대원군으로서도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위태롭게 하는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는 심정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천주교도에 대한 일체의 기대를 포기하고 목전의 여론에 솔선 순응함이 상책이라고 결심하게 되었고, 초기의 묵인 정책에서 탄압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서구 열강들의 중국 침략 행위도 중화사대적인 사상을 갖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천주교 탄압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천주교 탄압령이 단시일 내에 준비되고, 이것이 전국을 휩쓸게 되었다.
– 경과
1866년 (고종 3) 정월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교령 (敎令)이 포고되자, 이로써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된 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동안에 국내 천주교 신도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산속으로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림에 쓰러지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으며, 이 통에 신도도 아닌 자들이 박해당한 예도 허다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정부는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3명의 프랑스 천주교 신부의 행방을 추적하였다.
– 순교자 명단
(이름 및 세례명, 신분, 순교일 및 순교 동기)
.유정률 베드로, 비서, 1866년 2월 17일, 장살
.베르뇌 시몬스, 교주, 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랑페르 유스토, 신부, 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도리 헨리코, 신부, 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 1866년 3월 7일, 군문 효수형
.남종삼 세례자 요한, 승지, 1866년 3월 7일, 참수형
.전장운 세례자 요한, 상인, 1866년 3월 9일, 참수형
.최형 베드로, 회장, 1866년 3월 9일, 참수형
.정의배 마르코, 회장, 1866년 3월 11일, 군문 효수형
.우세영 알렉시오, 역관(번역가), 1866년 3월 11일, 군문 효수형
.다블뤼 안토니오 제5대 조선교구장, 주교, 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위앵 마르티노 루카, 신부, 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장주기 요셉, 회장, 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황석두 루카, 회장, 1866년 3월 30일, 군문 교수형
.손자선 토마스, 농부, 1866년 5월 18일, 교수형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원님,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조화서 베드로, 농부,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손선지 베드로, 회장,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이명서 베드로, 농부,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한재권 요셉, 회장,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정원지 베드로, 농부, 1866년 12월 13일, 참수형
.조윤호 요셉, 농부, 1866년 12월 23일, 참수형
.이윤일 요한, 회장, 1867년 1월 21일, 참수형
– 사건의 여파와 평가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살아남은 리델은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고 이는 그해 11월 발생한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 병인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인 사제 9명
성(聖)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1814-1866)
성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1818-1866)
성 위앵 민 루카 신부(1836-1866)
성 오매트르 오 베드로 신부(1837-1866)
성 브르트니에르 백 유스토 신부(1838-1866)
성 도리 김 헨리코 신부(1839-1866)
성 볼리외 서 루도비코 신부(1840-1866)
푸르티에 신 요한 신부(1830-1866)
프티니콜라 박 미카엘 신부(1828-1866)
- 1866년 3월 7일, 조선 가톨릭 순교자들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남종삼.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프랑스인 신부 도리 베드로.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프랑스인 신부 베르뇌.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프랑스인 신부 볼리외.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프랑스인 신부 브르트니에르.

○ 조선의 천주교 박해사
조선왕조는 기본적으로 유교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못박고 그 외의 종교와 사상들은 싫어하며 억압하였다. 이를 숭유억불로 흔히 설명되지만, 주요 포인트는 ‘숭유’에 있었다. 즉 불교뿐 아니라 도교, 무교 등도 당시 교세가 불교만큼 크지 않아 덜 부각될 뿐 조선왕조에서는 유교 이외의 사상은 모두 억압의 대상이었다. 뒤늦게 들어온 천주교도 그런 맥락에서 일정 이상 퍼지지 못하도록 박해를 가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천주교 박해는 꾸준히 있었는데, 대규모 박해는 총 4번 있었으며 이 4번의 박해로 수많은 천주교인이 학살당하며 순교를 하게 된다.
- 신해박해 : 정조 15년
천주교는 17세기 즈음 ‘서학 (西學)’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고 책으로 소개되었던 데다 양반 일부층에게만 알려졌기 때문에 그 세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후기 사회 동요와 각종 정치적 파란 때문에 점차 현실 사회의 한계에 지친 비주류 양반층에게 널리 알려졌고, 몇몇 양반층이 평민들에게도 이를 소개하면서 파급력은 갑자기 불어났다. 영,정조의 탕평책과 중흥 정책으로 아무리 노력한들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영향력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고, 인간평등 성리학 전통 사회의 모순을 비판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천주교를 암암리에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승훈이 청나라에서 한국 최초로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이승훈 베드로를 바탕으로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설립되었지만, 성리학 외 타 학문 (교리) 배제라는 현실상 절대로 쉽게 인정되기 어려웠고,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초기 한국 천주교 포교 방식은 어디 모여서 그냥 모임이나 기도만 하는 것이었고 사회 혼란을 유발하거나 왕실에게 적대적인 행동은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야무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1791년 신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행동으로 인해 천주교 포교와 실체가 드러났고 이는 박해로 이어졌다. 윤지충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보통은 유교식 장례로 하면 아주 일반적이었지만 윤지충과 그의 외사촌동생 권상연은 천주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신주를 태우고 가톨릭식 장례를 지냈다 (오늘날 가톨릭에서도 신주는 허용하지 않는다). 조선에서 신주를 태운다는 것은 불효, 즉 삼강오륜 중 부위자강 (父爲子綱)을 어기는 역모죄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강상죄 (綱常罪)를 저지른다는 뜻이었기에 국가에서 처벌할 정도로 엄격하게 다스렸다.
소문이 퍼지자 당연히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조사하고 윤지충과 권상연을 처형하고, 이들에게 천주교를 포교한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유배시켰지만 그 이상의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한 터에는 전동성당이 세워졌고, 이들은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시복된다.
일부 학계에서는 이를 가지고 당시 왕이었던 정조가 천주교에 관대하거나 관심이 있었다고 하지만, 실제론 당시 정조는 당사자들만 조치를 취했지 근본적인 색출은 하지 않았다. 이는 천주교를 완전히 끄집어내고 탄압하는 순간 대규모 사회 혼란이 오는 건 당연했고, 반대로 정조 스스로가 천주교에 긍정적 관심을 가지는 순간 성리학을 바탕으로 세워진 조선을 왕 스스로가 이를 부정하는 꼴이 되니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어느쪽으로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닌 당장의 불을 끄는데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정조와 세도가들의 예측과는 다르게 천주교는 더욱더 퍼져나가자, 이후 4번의 대규모 박해를 겪게 되었다.
- 신유박해 : 순조 원년
1801년 발생한 대규모 천주교 박해로 신유사옥 (辛酉邪獄)이라고 하기도 한다. 조선왕조의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대대적 박해다. 순조 즉위와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을 계기로, 그녀를 중심으로 한 노론 강경세력이 박해를 주도하였다. 그들에게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으니, 정조 재위시기 유력하게 성장한 남인계 인사들을 찍어 내려는 것. 박해의 결과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를 포함한 300여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였으며, 남인 세력은 치명상을 입었다.
- 기해박해 : 헌종 5년
1839년 (헌종 5년)에 일어난 박해로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프랑스인 성직자인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나 베드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 그 외 수많은 조선인 신자들이 순교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천주교 포교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지만 이후 홍경래의 난과 세도정치의 문란, 임술민란 등 대규모 사회혼란이 연달아 터지면서 조선 사회는 급속도로 불안해졌고 이 덕분에 다시 천주교는 다시 한번 평민들 사이로 포교가 확대되었다. 여기에 더해 프랑스인 주교 앵베르, 신부 모방, 샤스탕이 조선으로 몰래 입국해서 본격적으로 포교에 나서자 그 세는 신유박해 전보다 더욱 더 커졌다. 그리고 신유박해 때 대규모 확대로 번지지 않기를 바랬던 정순왕후의 박해 중단 때문에 양반들 위주로 박해당했지 평민들은 피해가 크지 않아서 포교가 확대되었던 영향이 크다. 그리고 안동 김씨 세도가가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았던 것이 크다. 애초에 안동 김씨들 일부가 천주교 세례를 받았으니 말 다했다.
하지만 1834년 순조가 사망하고 헌종이 즉위하자, 세도 정치 구도는 일단은 안동 김씨가 우세했지만 1839년 천주교에 적대적이었던 우의정 이지연이 상소를 올리면서 다시 한번 박해가 일어난다. 30년 전보다 그 인원은 더 많았으며, 이번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논란이 커지자, 신자들의 박해를 그냥 볼 수는 없던 프랑스인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는 자수를 했고, 조선 조정에서는 신유박해 때 청나라인 주문모 신부의 사례와 똑같이 적용해 이들과 천주교인 대부분을 처형했다. 그리고 순교당한 양반들 일부가 안동 김씨와 연루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1839년 때 남인 시파를 제거하면서 박해 때 가장 영향력을 발휘한 풍양 조씨가 세도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안동 김씨는 철종 즉위전까지 잠시 밀려나게 된다.
총 70명의 순교자들이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때 성인품에 올랐다.
- 병오박해 : 헌종 12년
1846년 (헌종 12년)에 일어난 박해로 다른 박해들에 비교하면 순교당한 사람들은 적지만,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가 순교한 사건이기 때문에 다른 박해들과 급을 같이 한다.
신유박해 때와 다르게 기해박해 이후로 풍양 조씨의 천주교 박해가 심해졌고, 앵베르 주교의 후임으로 조선에 온 천주교 조선교구 주교 장 조제프 페레올 (1808~1853)은 포교 활동에 지장을 받게 되자 김대건 사제를 육로 대신 해로로 통해 포교 활동을 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김대건이 순위도에서 붙잡히면서 사제라는 직책 때문에 그 심각함이 조정에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프랑스 함대 사령관 장 밥티스트 세실 제독이 외연도에 군함 3척을 끌고 오면서 기해박해 때 죽은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의 순교를 가만히 보고 있지 않겠다 하고 통상을 요구하자, 조선은 더욱더 통상 수교 거부와 천주교 박해에 열을 올려야겠다 판단해 김대건의 처형일자를 앞당긴다. 한편 조정에서는 김대건에게 배교를 요구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헌종실록 13권 참고).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를 비롯한 9명이 성인품에 올랐다.
- 병인박해 : 고종 3년
1866년 (고종 3년)에 일어난 박해로 조선의 마지막 천주교 박해이지만, 조선의 천주교 박해 중 가장 규모가 컸으며, 총 24명의 순교자가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이 박해로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된다.

참고 = 위키백과, 가톨릭평화신문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