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영화
일사각오 (一死覺悟)
감독) 권혁만 / 주연) 이지형, 정윤서 / 2016년
47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하며 유일하게 남긴 유산은 일사각오 (一死覺悟)라는 네 글자로 대표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거대한 일제 권력에 맞서 싸운 주기철 목사의 신앙과 삶을 생생한 증언과 당시 상황 재연을 통해 감동적으로 소개한다.
○ 제작 / 출연
– 제작진
감독: 권혁만
각본: 임미랑
촬영: 우성주, 김석환
음악: 류형욱
편집: 조재민
미술: 연상모
제작: KBS 한국방송
배급: 파이오니아21
개봉: 2016년 3월 17일
장르: 드라마
국가: 한국
시간: 115분
– 출연진
이지형: 주기철 역
정윤서: 오정모 역
최원: 소년 주광조 역
서광재: 조만식 역
하정훈: 소년 주기철 역
유제상: 김동원 장로 역
정기항: 유계준 장로 역
권오균: 오윤선 장로 역
안현정: 안이숙 역
이예빈: 여집사 역
차영우: 교인1 역
○ 내용
영화의 주요 내용으로는 먼저 식민지 역사를 관통하는 주기철 목사의 삶을 소개한다. 그리고 13살 아들의 눈으로 본 인간 주기철 목사는 어떠했는지, 주기철 목사의 순교신앙이 녹아져 있는’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이야기도 고스란히 담았다.
더불어 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를 소개, 그가 한국교회 가장 존경받는 믿음의 선배가 된 이유를 설명하고, 그 당시의 한국 기독교 상황도 소개한다. 특히 그가 남긴 믿음의 유산, ‘범인류적 양심과 가치’에 초점을 맞춰 영화는 그의 일대기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번 영화에서는 갈등과 투쟁으로 점철됐던 주기철의 삶을 ‘감동적 스토리’로 엮어내기 위해, 역사적 사실 (Fact) 위에 허구적 (Fiction) 상상력을 접목한 팩션 (Faction)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다. 방송 사극에서 <해신>, <불멸의 이순신>, <주몽>, <대조영>, <태왕사신기> 등 역사를 기본으로 한 ‘팩션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었듯이, ‘팩션 시네마’를 지향하는 이번 작품은 새로운 장르 개척을 위한 또 하나의 실험이자 시도가 되고 있다.
더불어 영화에서는 현존 인물들의 생생한 증언과 희귀 기록영상들도 선보인다. 또 지난 2015년 성탄절, 방송 다큐멘터리 <일사각오_주기철>이 KBS ‘다큐1’을 통해 방영되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이번 영화에서는 방송과의 차별화를 위해 미공개 대형 몹씬 (Mob Scene)도 등장한다.
더불어 이어령 교수 (전 문화부 장관), 윤경로 위원장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박명수 교수 (서울신대), 양현혜 교수 (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 등 사회 각계 인사들의 심도 높은 분석 역시 이뤄진다.
영화를 찍은 권혁만 감독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지난 2013년 손양원 목사의 다큐 <그 사람 그 사랑 그 세상>을 제작할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번 <일사각오 주기철> 촬영 때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매 순간 느낄 수 있었다”면서 “촬영 불가능한 상황도 하나님께서 매번 가능케 했다”고 소개했다.
특히 권 감독은 “박관준 장로와 안이숙 권사가 지금의 일본 국회에 해당하는 일본제국중의회에 잠입해,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선언문을 투척하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선 이야기를 재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하고, “일본 국회에서 허락해줄 이유도 없고, 더구나 경비가 어느 때보다 삼엄했기 때문인데, 그때 하나님께서 일본 경비원들의 눈을 가려주셨고, 기적처럼 짧은 순간에 촬영을 할 수 있었다”면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언제나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번 영화를 만들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고 했다.
○ 영화 이모저모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에 반대해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끝까지 저항한 주기철 목사는, 한국기독교의 상징적인 인물인 동시에 가장 대표적인 순교자다.
그가 47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하며 유일하게 남긴 유산은 일사각오 (一死覺悟)라는 네 글자로 대표되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거대한 일제 권력에 맞서 싸운 주기철 목사의 신앙과 삶을 생생한 증언과 당시 상황 재연을 통해 감동적으로 소개한다.
진정한 ‘믿음의 본질’은 무엇이며, ‘신념’은 무엇인가?
①주기철의 삶_ 식민지 역사를 관통하다
13살 주기철은 한일강제합병으로 ‘나라’를 잃고, 그해 성탄절에 처음으로 교회에 나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가 목사 안수를 받던 1925년, 서울 남산엔 조선 신궁이 세워졌다.
이후 황국신민화 정책을 내세운 일본은 천황이 사는 곳을 향해 절하는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조선인의 생명과 정신까지 무한 수탈하겠다는 것이 일본의 정책 목표였다.
이에 반대하며 ‘일사각오’의 길을 걸어간 주기철은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마흔 일곱 살의 나이로 순교한다. 침략자의 거대한 권력 앞에 맞선 작은 개인 주기철.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그의 일대기를 다큐드라마로 만난다.
②13살 아들의 눈으로 본 ‘인간 주기철’
아버지 주기철은 나이 13살에 ‘나라’를 잃고 ‘하나님’을 만났지만, 아들 주광조는 나이 13살에 ‘아버지’를 잃고 ‘하나님’을 등졌다.
역사는 주기철을 독립 운동가이자 순교자로 기록하고 있지만, 아들 주광조는 “내 아버지는 그저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역사가 기록하지 못하는 인간 주기철의 고뇌와 번민, 갈등을 13살 아들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③독립운동가 주기철_ “가장 존경받는 ‘믿음의 선배’”
주기철은 순교자이기 전에 독립 운동가였다. 오산학교를 졸업한 주기철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으며, 스승 조만식과 전국을 순회하며 ‘물산장려운동’을 펼쳤다.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현실 앞에서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의 민족정신은 ‘신념’을 잊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일까.
④기독교_ “조선통치상의 ‘암’적인 존재”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조선의 종교단체들은 하나둘씩 신사참배를 수용하기 시작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마저 신사참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일제통치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당시 일제에 맞서다 폐쇄된 교회는 약 200여 개. 목회자와 신도 2천 여 명이 검속되었고, 그 중에 5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종교적 신념을 넘어 범인류적 ‘정의와 신념’의 의미를 묻는, 한국기독교의 독립 운동사를 새롭게 조명한다.
⑤주기철이 남긴 믿음의 유산_ ‘범인류적 양심과 가치’
주기철 그가 떠나고 70년. 우리에겐 ‘일사각오’라는 믿음의 유산이 남았다.
그가 걸어간 ‘신사참배 반대’의 길은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신념을 넘어선 ‘범인류적 양심이자 가치’였다.
자신의 신념을 죽음으로써 지켜낸 주기철의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진정한 신념이란 무엇인가? 죽음과 맞바꿔가며 신념을 지켜내는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오늘날 마음의 중심을 잃어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신념이 있을까?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
○ 언론소개 : 주기철 목사 삶, 영화 ‘일사각오‘로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옥사한 독립운동가이자 개신교 순교자인 주기철 (1897 ~ 1944) 목사의 삶을 다룬 영화가 개봉한다.
KBS에 따르면, 조 목사의 삶과 사상을 담은 ‘일사각오 (一死覺悟)’가 다음달 17일 CGV에서 공개된다. 지난해 KBS 성탄절 특집으로 방송돼 1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일사각오 주기철’을 극장용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러닝타임 115분 중 방송에서 선보인 부분은 20~30여분이며, 드라마적 요소를 덧대 팩션 드라마로 완성했다. 연출자인 권혁만 KBS PD는 “주 목사가 지킨 신념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조명하고 특히 종교를 떠나 신사참배 저항운동이 민족운동사에서 갖는 큰 의미를 조명하는 데 각별한 공을 들였다”고 밝혔다.
KBS 고대영 사장은 20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열린 시사회에 참석한 유족 및 개신교 관계자들에게 “주기철 목사는 우리 사회가 본받아야할 사람”이라며 “주기철 목사의 숭고한 삶을 담은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줬으면 한다. ‘울지마 톤즈’처럼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밝힐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주기철은 경남 창원에서 출생했다. 1916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진학했으나 건강이 악화돼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해 교회의 집사로 신앙생활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듬해 12월에는 경상남도 창원 웅천청년운동단의 대표로 조선청년연합회 창립총회에 참석했고 의사(議事)로 선출되기도 했다.
1936년 장로교의 본산으로 불리던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부임했다.
1938년 2월, 조선총독부가 기독교에 대한 지도 대책을 수립,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그해 9월 전국 장로회 총회가 이에 굴복하자 ‘일사각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신사참배 거부를 교도들에게 호소했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돼 가혹한 고문과 감시를 받았으나 가석방된 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설교를 계속해 1940년 7월 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죄목으로 또다시 체포됐다.
옥고를 치르다 1944년 4월 21일 순국했다. _ 뉴시스, 2016.02.22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