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5월 1일,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3 ~ 1873) 별세
데이비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1813년 3월 19일 ~ 1873년 5월 1일)은 스코틀랜드의 조합교회 (Congregationalist) 선교사이자 탐험가이다.
– 데이비드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출생: 1813년 3월 19일, 영국 블랜타이어
.사망: 1873년 5월 1일, 잠비아 치푼두 Livingstone Memorial site
.묘지: 영국 런던 웨스터 민스터 사원
.배우자: 메리 모팻 리빙스턴 (1845년–1862년)
.자녀: 엘리자베스 리빙스턴, 로버트 리빙스턴, 윌리엄 오스웰 리빙스턴, 안나 메리 리빙스턴 등
.형제자매: 아그네스 리빙스턴, 존 리빙스턴, 자넷 리빙스턴
1813년 스코틀랜드에서 전통적인 노동자 계급의 아들로 태어났다. 리빙스턴의 가정은 두세대에 걸쳐 스코틀랜드의 블랜타이어의 방적공장에서 일해 왔으며, 그의 아버지 니일은 차 (茶)를 파는 행상으로 일했다.
18-19세기 영국에서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열정적인 선교활동에 의해 교회 선교회 (Church Mission Society, CMS)나 런던 선교회등의 선교회들이 설립되고 있었는데, 소년 리빙스턴도 중국 의료선교사를 꿈꾸고 있었다. 그는 방적공장에서 일하면서 독학하여, 글래스고의 앤더슨 대학교에 들어가서 신학과 의학을 공부했으나, 아편 전쟁때문에 중국에 선교사로 갈 수 없게 되었다.
아프리카 선교사인 로버트 모펫의 영향으로 1840년 런던 전도 협회의 의료 전도사로서 아프리카로 떠났다. 1841년 남아프리카 보츠와나에 도착하여 니그로 부락에 머무르면서 복음 전도,원주민 문화의 연구 등을 시작하였다. 1849-1856년, 제1회 탐험을 시작하여 칼라하리 사막 횡단, 1849년 느가미 호의 발견, 1851년 잠베지 강 발견, 1855년 빅토리아 폭포 발견 및 아프리카 횡단에 성공하였다. 귀국하여 <전도 여행기>를 발표하였다.
1858년 켈리마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영국 대사가 되었으며, 영국 정부의 원조를 얻어 중앙 아프리카 탐험 대장이 된 그는, 6명의 대원을 이끌고 잠베지 강 유역을 조사하던 중에 포르투갈 사람들의 노예 매매를 보고 이에 간섭하여 수백명의 노예를 해방시켰다. 이 때문에 포르투갈과 영국간에 말썽이 생겨 영국 정부에서 리빙스턴에게 탐험 중지 명령을 내렸다. 1866년 왕립지리학회의 의뢰를 받아 다시 아프리카로 떠나 므웨르 호와 뱅웰루 호 등을 발견한 후, 탕가니카 호반 우지지에 도착하였다.
1871년 여기서 열병에 걸려 사경에 빠졌으나 11월 스탠리의 수색 탐험대를 만나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 후 스탠리 일행과 함께 탕가니카 호 북부 지역을 여행하였다. 이듬해 스탠리와 작별하고 탐험을 계속하였다.
1873년 5월 1일 극도의 쇠약과 병으로 뱅웰루 호반에서 사망하였으며,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를 미라로 만들었는데, 현재도 그의 심장은 영국 왕립지리학회에서 보존하고 있다는 설이 있으나 잠비아 북부의 치푼두라는 동네의 족장인 치탐보의 집 무푼두 나무 아래에 묻혀있다. 그것은 리빙스턴을 미라로 만들기 위해 그의 장기를 모두 꺼내어야 했고 무푼두 나무아래에 고이 모셨으며 시신은 방부처리를 하고 햇빛에 보름동안 건조, 미라로 만들었다. 그리고 약 2,000Km의 거리를 이동하여 지금의 탄자니아 수도 다르에스살람까지 운구했다. 운구하는 과정에 많은 위험과 어려움, 그리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면서 많은 이들이 도망을 갔지만 오직 잠비아의 두 청년 추마 (Chuma)와 수시 (Susi)는 끝까지 리빙스턴의 시신을 지켰다고 한다. 장례는 성공회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좋은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야 오는 사람들은 필요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길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서도 오는 사람들입니다.” – 데이비드 리빙스턴
○ 생애 및 활동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인들의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초기생애
리빙스턴은 독특한 스코틀랜드 가정 환경 속에서 개인적 신앙심·가난·중노동·교육열·포교정신 등을 체험하며 자랐다. 그의 선조는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의 울바 섬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었으며 어머니 로랜더는 장로회 투사의 집단인 콘베난터스가(家)의 후예였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가난했기 때문에 리빙스턴은 클리드 강변에 있는 면화공장 노동자 아파트의 맨 꼭대기층 단칸방에서 7명의 형제들과 함께 생활했다. 어려운 가계를 도와야 했기 때문에 10세 때부터 면화공장에 나가 일했던 그는 첫 주의 임금을 받아 라틴어 문법책을 샀다. 스코틀랜드 교회의 칼뱅주의 신앙 속에서 자란 그는 성년이 되자 그의 아버지처럼 독립 그리스도교 모임에 참여했다. 그때 이미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정신적·신체적 조건을 갖추었다.
1834년 영국과 미국 교회에서는 중국에 공식 의료 선교단을 파견할 것을 호소했는데, 리빙스턴은 이를 계기로 의료선교단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공장에서 시간제 근무를 계속하면서도 한편으로 선교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글래스고에서 2년간 그리스어·신학·의학 등을 공부했다. 그는 마침내 1838년 런던 선교회에서 인정받게 되었다. 1839~42년의 아편전쟁으로 중국에 갈 꿈은 포기했으나 남아프리카에서 유명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버트 모펏를 만난 뒤 아프리카를 자신이 일할 곳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840년 11월 20일 선교사로 임명된 리빙스턴은 그해 마지막 날 배를 타고 남아프리카로 출발해 1841년 3월 14일 케이프타운에 도착했다.
– 초기탐험
이로부터 15년간 리빙스턴은 계속해서 아프리카 내륙으로 이동했다. 긴 여정 속에서 그는 선교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굳게 다지고 지리적 발견의 즐거움을 느꼈으며, 보어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을 만났을 때에는 아프리카인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비난하기도 했다. 이로써 그는 헌신적인 그리스도교인이자 용감한 탐험가로서, 동시에 열렬한 노예제 폐지 운동가로서 명성을 남겼다. 이처럼 아프리카에 대한 그의 헌신이 너무나 열정적이었던 만큼 남편이나 아버지로서의 의무는 부차적인 문제로 밀려나 있었다.
1841년 7월 31일 케이프 경계의 쿠루만에 있는 모펏 선교구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다시 개종자를 찾기 위해 곧바로 북쪽으로 떠났다. 이곳에는 거주민이 보다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원주민 중개자’를 이용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의 목적에 꼭 알맞는 조건이었다. 1842년 여름에는 백인의 출입이 어려운 칼라하리에서 어느 누구보다 더 북쪽까지 진출했으며 지방어와 문화에도 익숙해졌다. 그의 기질은 1844년 극적인 시험을 받았다. 당시 그는 선교국을 건설하기 위해 마보차로 여행하는 중이었는데 사자에게 상처를 입은 것이다. 이때 입은 왼팔의 상처는 또다른 사건으로 더욱 악화되어 결국 다시는 왼손으로 총신을 받칠 수 없게 되자 왼쪽 어깨에 총을 올려 놓고 왼쪽 눈으로 겨냥해야 했다.
1845년 1월 2일 리빙스턴은 모펏의 딸 메리와 결혼했다. 그는 많은 여행을 아내와 동행했지만 그녀의 건강이 나빠지고 가족의 안전과 교육문제가 시급해지자 마침내 1852년 아내와 4명의 아이들을 영국으로 보냈다. 가족과 처음으로 헤어질 무렵 그는 이미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 소규모 탐험대의 측량사이자 과학자였던 그는 1849년 8월 1일 응가미 호 (湖) 발견을 도운 공로로 영국왕립지리학회로부터 금메달과 상금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평생 이 학회와 관계를 가졌다. 학회는 줄곧 탐험가로서의 그의 야망을 격려했고 영국에 대해 관심을 갖고 활동하도록 지원했다.
– 내륙개발
가족이 안전하게 스코틀랜드에 있었기 때문에 리빙스턴은 마음놓고 남아프리카의 경계를 넘어 북쪽으로, 그리고 내륙의 중심부까지 그리스도교·상업·문명을 전파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이 3가지 전파가 반드시 아프리카를 개발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1853년의 유명한 연설에는 그 목적이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는 연설에서 “나는 내륙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다”라고 선언했다. 1853년 11월 11일 린얀티에서 잠베지 강으로 접근해가면서, 또 그가 선교사업을 하기엔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 마콜롤로인(人)들의 한 가운데를 향해 나아가면서, 그는 장비도 거의 갖추지 않고 단지 몇 명의 아프리카인만을 동반한 채 북서쪽으로 출발했다. 그의 목적은 대서양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었다. 이 길을 개척하여 합법적 상업만을 허가함으로써 노예무역을 근절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또 보어인의 영토를 지나는 길보다도 이 길이 마콜롤로에 도달하기에는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미 1852년 보어인들이 콜로벵에 있는 그의 집을 파괴하고 아프리카인 동료들을 공격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약한 인간이었다면 좌절했을 만큼 힘들었던 긴 여정을 거쳐, 마침내 그들은 1854년 5월 31일 서부 해안 루안다에 도착했다. 리빙스턴은 동료 마콜롤로인을 고향으로 데려다주고 잠베지 강에서의 계속적인 탐험을 위해 건강이 회복되자 곧 귀향여행을 시작했다. 이때는 1854년 9월 20일이었으며 이로부터 1년 뒤인 1855년 9월 11일에는 린얀티에 도착했다. 다시 11월 3일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면서 잠베지 강 유역을 탐험하고 1856년 5월 20일 모잠비크 켈리마네에 도착했다. 1855년 11월 17일 잠베지 강에 도착했을 때, 강에는 뇌성이 울리고 연기가 자욱했는데 이는 대탐험중에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찾은 가장 볼 만한 장관이었다. 이곳에는 폭포가 있었는데, 애국심이 투철했던 리빙스턴은 이를 여왕의 이름을 따 빅토리아 폭포라고 명명했다. 1856년 12월 9일 그는 국가의 영웅으로 추대되어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기 전 3년 동안 그가 직접 전한 소식이나 그에 대해 들려오는 소식들은 전례없이 모든 지역 영어권 주민들의 상상을 자극했다.
리빙스턴은 자신이 이룩한 성과들을 겸손하게 그러나 효과적으로 기록에 남겼다. 그 기록은 〈남아프리카에서의 선교여행과 조사 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1857)라는 책으로 출간된 뒤 7만 부 이상 팔려 탐험과 선교노력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출판 역사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그에게는 명예가 잇따라 주어지고 수입도 풍부해졌다. 그의 가족은 영국으로 돌아온 뒤 줄곧 가난한 생활을 해왔는데 이젠 필요한 것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그는 런던 선교회에서도 독립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을 완성한 뒤에는 6개월간 영국 곳곳을 다니며 강연을 했다. 리빙스턴은 1857년 12월 4일 케임브리지대학교 이사회관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자신은 아프리카에서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젊은 대학인들에게 자신이 시작한 일을 계속해 줄 것을 부탁했다. 〈리빙스턴 박사의 케임브리지 강연 Dr. Livingstone’s Cambridge Lectures〉(1858)은 그의 다른 저서들 만큼이나 흥미를 끌었다. 케임브리지 방문이 끝난 뒤인 1860년 대학생 선교단의 중앙아프리카 파견 문제가 대두되자 그는 자신의 2차 아프리카 탐험중의 희망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 잠베지 탐험
리빙스턴은 1858년 3월 12일 다시 영국을 떠나 1864년 7월 23일까지 여행을 계속했다. 그는 원래 켈리마네에 영국 영사로 떠난 것이었는데, 이는 동부해안 및 내륙의 독립구(獨立區)를 관할하고 아프리카 동부·중앙부를 탐험하는 탐험대의 지휘자로서 노예무역을 폐지하기 위해 상업과 문명을 확산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탐험은 그가 행한 이전의 외로운 여행들보다는 훨씬 더 조직적이었다. 외륜선을 갖추었으며 많은 물품들을 비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엔 10명의 아프리카인과 6명의 유럽인이 동행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그의 동생 찰스와 에든버러의 의사 존 커크도 있었다. 그때까지 전설적이었던 리빙스턴의 지도력은 곧 한계를 드러냈다. 유럽인들 가운데 싸움이 일어나 몇 사람이 해고당한 것이다. 탐험대의 대원들을 비롯해, 중앙아프리카까지 그들을 따라왔던 미성숙한 대학 선교단원들 사이에서는 리빙스턴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환멸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배를 타고 잠베지 강을 순항하는 것은 불가능함이 밝혀졌고, 또 포르투갈 영역을 우회하는 로부마 강을 따라 니아사 호 (말라위 호) 주변지역으로 가는 길을 찾으려고 2차례의 시도를 했으나 그것 역시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1859년 9월 17일 리빙스턴과 대원들은 식민화가 약속된 이 구역에 영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도착했다. 많은 어려움들을 겪었던 리빙스턴은 아내까지 잃고 말았다. 다시 함께 아프리카에 오자고 약속했던 그의 아내는 1862년 4월 27일 잠베지 강 수팡가에서 죽었다. 첫째 아들 로버트는 1863년 아버지 리빙스턴과 합류하기로 했으나 결국 그에게 오지 못하고 미국으로 가 1864년 12월 5일 남북전쟁에서 북군으로 싸우다 전사했다.
영국정부는 1863년에 탐험대를 소환했다. 당시 잠베지 지역의 경제적·정치적 발달에 대한 리빙스턴의 낙관은 성급한 판단이었으나 리빙스턴은 자신의 끈질긴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훈련되지 않은 선원들과 얼마 안 되는 연료만을 싣고 인도양으로 떠났다. 작은 배 ‘레이디 니아사’를 이끌고 약 400km 가량의 위험한 항해를 감행한 뒤 봄베이에서 이 배마저 팔아버려, 이후 30년간 잠베지 강 탐험은 재난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의 탐험은 귀중한 과학지식을 축적했으며, 니아사 호 지역과 관련한 그의 명성과 그가 상상했던 식민화의 전망 등은 1893년 영국이 중앙아프리카 보호령을 이루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지역은 1907년 니아살랜드로 되었다가 1966년 말라위 공화국이 되었다.
1864년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동생 찰스와 함께 2번째 책을 썼는데, 제목은 〈잠베지 강과 그 지류 탐험에 대한 이야기 Narrative of an Expedition to the Zambesi and Its Tributaries〉(1865)였다. 당시 그는 첫번째 아프리카 여행 이후로 자신을 괴롭혔던 치질 때문에 외과수술이 필요하다는 충고를 받았지만 거절했는데, 가장 규모가 컸던 3차 아프리카 여행을 마치면서 그가 죽은 것도 아마 출혈이 심했던 치질 때문으로 추정된다.
– 나일 강 탐험
리빙스턴은 다시 한번 봄베이를 잠시 들른 뒤, 1866년 1월 2일 공·사 단체의 지지와 함께 영국 영사의 지위를 맡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왔다. 그의 기본적인 목표는 복음을 확장하고 아프리카 동부 연안의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이었지만 새로운 목표는 중앙아프리카 분수계 (分水界)를 탐험하고 나일 강의 근원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이번엔 유럽인 부하를 거느리지 않고 오직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들만 동행했다. 그러나 또다시 부하대원들 사이에서는 문제가 발생했고, 오랜 탐험의 역경으로 일찍 노쇠해 있었던 그는 이에 대처하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동부 연안 미킨다니에서는 힘차게 전진했지만 이번엔 응고니의 습격 때문에, 포르투갈 영토를 피하고 니아사 호 북부를 가로질러 탕가니카 호 주변으로 가려던 계획은 결국 포기해야 했다. 탐험대는 남쪽으로 향했고 9월에는 대원 몇 명이 그를 버리고 떠났다. 그 대원들은 잔지바르에 도착한 뒤 처벌이 두려워 리빙스턴이 응고니에게 살해당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비록 다음해에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지만, 탐험에 대한 소문은 더 부풀려진 채 해외까지 퍼졌다.
그가 니아사 호 남단에서 다시 북쪽으로 이동했을 때 소문은 극에 달했고, 1867년초에는 한 도망자가 의료상자까지 가져가버렸지만, 그는 계속 중앙아프리카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1867년 11월 8일 므웨루 호를 발견하고 1868년 7월 18일엔 방궤울루 호를 발견했으며, 마침내 1869년 2월 아랍 무역상의 도움으로 탕가니카 호에 도착했다. 그는 몸이 점점 약해지는 것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전진해 1871년 3월 29일 북서부의 마지막 목표지점 니앙궤에 도달했다. 니앙궤의 위치는 콩고 강으로 들어가는 루알라바 강 유역이었다. 결국 그들은 아프리카에 간 유럽인들 가운데 가장 서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것이었다.
1871년 10월 23일 탕가니카 호 동쪽 기슭 우지지에 이르렀을 때 리빙스턴은 병들고 말았다. 이때 그를 찾기 위해 파견된 〈뉴욕 헤럴드 New York Herald〉의 특파원 헨리 M. 스탠리가 도착해 당시 절박하게 필요했던 식량과 의약품을 전해주었다. 리빙스턴은 탕가니카 호 북부유역을 탐험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해졌다고 느껴 동쪽으로 320㎞ 떨어진 우니아니엠베까지 스탠리와 함께 동행했다. 스탠리는 그에게 아프리카를 함께 떠나자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하자 1872년 3월 14일 데이비드 리빙스턴에 대한 무용담을 쓰기 위해 신문기자의 열정으로 영국으로 떠났다.
스탠리가 공급해준 물품들로 새롭게 준비를 갖춘 리빙스턴은 다시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으며, 나일강의 근원을 찾고 노예무역을 폐지하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병마로 1873년 5월 그는 현재 잠비아에 해당하는 일랄라 지역 치탐보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 아프리카 하인이 그를 찾아냈을 때 그는 침대 곁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은 채 죽어 있었다. 그의 시체를 썩지 않게 보존하기 위해 심장과 내장을 제거한 뒤 아프리카 땅에 묻었다. 그뒤 사람들은 9개월의 힘든 여행 끝에 그의 시체를 해안까지 운반해 영국으로 옮겨가서 성대한 빅토리아 풍의 장례식을 치르고 1874년 4월 18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었다. 그 해에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마지막 일지 The Last Journals of David Livingstone〉가 출간되었다.
– 영향
30년간 남부·중앙·동부 아프리카에서 펼친 그의 여행과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은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의 태도에 전례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탐험한 지역은 유럽인의 발길이 1번도 닿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의 지리적·기술적·의학적·사회적 발견은 다양한 지식을 제공해 아직도 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는 가족주의와 빅토리아조 풍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아프리카가 근대사회로 발전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믿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의 유럽 제국주의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민족주의에서도 선구자였다.
○ 저서
주요저서로 《남아프리카 전도여행기: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 《잠베지강과 그 지류:Zambesi and its Tributaries》,《중앙아프리카에서의 리빙스턴의 최후 일지:The Last Journals of David Livingstone in Central Africa》등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