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년 6월 26일, 친기독교인 요비아누스 (Flavius Claudius Jovianus, 332 ~ 364) 로마 50대 황제로 등극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요비아누스 (Flavius Claudius Jovianus, 332년경 ~ 364년 2월 17일)은 363년 6월 26일 율리아누스 황제가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하자 그의 부하들에 의해 로마 황제로 선출된 군인이다.

– 요비아누스 (Flavius Claudius Jovianus)
.휘: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요비아누스 (F .C. Jovianus)
.출생: 331년경, 신기두눔 (현,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사망: 364년 2월 17일, 비티니아와 갈라티아의 국경 지역에 있던 다다스타나
*로마 50대 황제
.재위: 363년 6월 26일 ~ 364년 2월 17일
.부친 바로니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2세의 근위대장을 지냈으며, 요비아누스도 율리아누스의 근위대장이 됨. 황제사후 군이 추대
요비아누스의 아버지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황실 경비대장이었다. 요비아누스도 일지감치 군대에 들어가 황실의 경호대에 복무하였고, 율리아누스의 사산조 페르시아 원정에 함께 하였다. 율리아누스가 퇴각하다가 결국 전투 중의 부상으로 죽자 로마 군단은 처음에는 살루스트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그가 끝내 고사하자 요비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요비아누스는 당시 거의 무명이었고 알려진 업적도 없었기에 그의 선출은 우연이나 실수로 간주된다. 일설에 따르면 병사들이 율리아누스의 이름을 외친 것이 와전되어 요비아누스로 잘못 불렸다고 한다.
일단 황제가 된 이후 요비아누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정전협정을 끝내야 했다. 로마군의 안전한 퇴각을 위해 그는 갈레리우스 황제 이후 수복했던 티그리스 강 동쪽의 모든 로마 지역을 사산조에 양보했고, 기독교 왕인 아르샤크 1세가 지배하는 아르메니아왕국의 중립을 보장해야 했다.
아르메니아는 전통적으로 로마의 속국이었으나 이제 사산조와 로마의 분쟁시에 중립을 지켜야 했다. 이와 같은 협정 조건은 로마에게는 굴욕적인 조건이었으나, 요비아누스는 자신의 재위의 안정을 위해 하루라도 빨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야 했다.
요비아누스는 기독교인이었기에 이전 황제 율리아누스의 모든 반기독교적인 조치를 취소하고, 다시 친기독교정책을 폈다. 요비아누스의 짧은 치세에 기독교의 많은 권리들이 인정되었고, 라바룸은 다시 로마군단의 상징이 되었다. 모든 종교적 관용 조치가 다시 폐기되었다.
364년 2월 17일 소아시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오는 길에 요비아누스는 비티니아와 갈라티아의 국경 지역에 있던 다다스타나에서 죽었다. 아마도 독버섯이나 난방을 위해 피운 불에 의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뒤를 이어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황제가 되었다.

○ 생애 및 활동
331년에 신기두눔 (현재는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바로니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근위대장을 지냈으며, 요비아누스 역시 아버지의 뒤를 따라 근위대에 들어간 뒤 율리아누스의 근위대장이 되었다. 이후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원정을 단행하자 종군하였으며, 율리아누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군대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되었다.
율리아누스의 페르시아 원정 당시 요비아누스도 종군했기 때문에 황제가 되자마자 요비아누스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바로 페르시아 원정에 참여했던 군사들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페르시아 황제와의 협상이 잘 돼서 페르시아 군의 추격을 받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으나 그 대가로 도시 앙카라와 티그리스 너머의 로마 영토를 할양해야 했으며, 아울러 아르메니아 왕국에 대한 종주권도 포기해야만 했다. 교회에 헌금하는 것을 허용하고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와 마술을 믿는 것을 금지했으며 이를 어겼을 경우 최고 사형까지 처했을 정도로 기독교를 강력하게 옹호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것은 테오도시우스 1세 때가 아니라 사실상 요비아누스의 치세 때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덕분인지 죽어서 성당에 묻혔다. 상당히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요비아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재정립하기 위해 굴욕적인 강화라는 무리수를 둬 가면서 빠르게 퇴각했으나 끝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퇴각 도중에 다다스타나라는 곳에서 자신의 천막 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중독사였는데, 독버섯을 잘못 먹었다는 말도 있고 가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의 죽음은 당대에도 암살이라고 추정한 사람이 많았을 정도로 의문투성이였다. 그의 치세가 이어진 기간은 겨우 8개월에 불과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