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소개
정인보의 조선사연구
정인보 / 서원 / 2000.12.31
–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역사학자, 위당 정인보의 ‘조선사 연구’를 새롭게 편역한 책
역사 속에 이어져 내려오는 ‘얼’을 진정학 역사로 여겼던 위당은 그 ‘얼’의 뿌리를 단군조선에서 찾았다.
따라서 그의 상고사 연구는 단군연구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 책은 이러한 위당의 단군 연구를 복원하며 단군 중심으로 고조선사를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먼저 단군의 생존연대와 연원의 문제, 단군의 국도 (國都)와 신화의 문제를 우리 말의 어원과 여러 문헌을 비교하면서 그 동안 잘못 알려진 기록들을 바로잡는다.
특히 눈에 띠는 부분은 조선이 나라 이름이 아니라 ‘소속’이란 의미를 지녔으며 우리 민족 (부여, 예맥, 읍루, 옥저 등)은 어딜 가나 조선이라는 ‘소속’을 가진 민족이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속’ 안에 묶여진 고조선은 지금의 우리나라를 포함한 개원 이북, 흥경 이동과 지금의 동북삼성 (길림성, 봉천성, 흑룡강성)을 모두 다스리는 거대한 강역을 가지고 있었던, 봉건국가 체제를 가진 군사국가였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외에도 책은 시조 단군, 고조선의 큰 줄기, 고조선의 특수한 정치제도, 고조선인의 절개와 기상, 문화와 종교 등의 주제를 전체 6장에 걸쳐 자세히 살펴보며 고조선사와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독자적인 논리로 풀어간다.
책 말미에는 ‘위당 정인보와 조선사연구 해제’라는 해설을 덧붙여 정인보의 삶과 그의 학문 세계, 조선사 연구, 단군 연구 등을 설명함으로써 책의 내용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 목차
- 시조 단군
1) 단군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2) 『삼국유사』기록에 사실 부분이 있다
3) 『세종실록』’지리지’와 권근의 『응제시주』
4) 단군은 어느 때 사람인가
5) 단군은 불교신앙에서 나온 분이 아니다
6) 고조선의 도읍지는 어디인가
7) 단군은 죽어서 신이 되었는가 - 고조선의 큰 줄기
1) 고조선의 강역은 넓었다
2) 고조선인은 진취적이었다
3) 기자동래설은 날조였다
4) 기자는 다름아닌 단군이었다
5) 고조선을 계승한 여러 나라들 - 고조선의 특수한 정치제도
1) 정체와 통치체제
2) 군사와 재정 - 고조선인의 절개와 기상
1) 고조선인은 강인하고 정직하였다
2) 고조선의 가무와 제속 - 고조선의 문화와 종교
1) 전 민족 공통의 교의와 그 종지
2) 교육제도와 학교시설
3) 제사전
4) 여러 가지 제의 - 예문전
1) 고조선의 역사서
2) 고조선의 시가
3) 고조선의 율령과 천문역산
4) 고조선의 문자
덧붙여 하고 싶은 말
해설: 위당 정인보와 조선사연구 해제
부록
정인보 연보
이 책에서 주로 인용된 문헌
찾아보기

○ 저자소개 : 정인보
1893년 5월 6일 서울 종현(鐘峴, 현 종로성당 부근)에서 정은조(鄭誾朝)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열다섯 살이 되었던 1907년 위당은 충북 진천으로 이사했다. 위당 집안은 한국 양명학을 이어 왔던 몇 가운데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위당 자신은 열세 살에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문하로 들어갔던바, 난곡은 당대 한국 양명학을 대표하는 학자였다. 난곡이 별세했던 1939년까지 남다른 사승 관계를 지켜 나갔으니, 위당 사상의 기본좌표는 양명학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열일곱 살 되던 1909년 위당은 단발했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위당은 1911년과 1912년 두 차례에 걸쳐 만주로 건너가서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原堡)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때 삼원보에는 이회영(李會榮) 형제가 주동이 되어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한 신흥 강습소가 세워졌는데, 위당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정리해서 여기에 군자금으로 건넸다. 1913년에는 상해로 건너가서 신채호(申采浩),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독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그렇지만 부인 성씨가 산고(産苦)로 별세한 까닭에 위당은 상해에 머무른 지 7개월 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후 위당은 검은 옷차림으로 일관했던바, 여기에는 부인의 죽음과 더불어 나라 잃은 상황까지 아울러 곡한다는 의미가 겹쳐 있었다. 1922년 4월 연희전문학교에 부임한 뒤에도 그의 상복 차림은 여전히 이어졌다. 1926년 순종이 승하했을 때 유릉지문(裕陵誌文)을 찬술했으며, 이후 중앙불교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도 국학과 동양학을 강의했다.
위당의 이력에서 ≪시대일보≫, ≪동아일보≫ 논설위원 활동도 빼놓기가 곤란하다. 빼어난 논설을 연이어 발표함으로써 최남선, 이광수와 더불어 한국의 3대 천재로 이름을 날렸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저술인 ≪조선 고전 해제≫라든가 ≪양명학 연론≫, ≪오천 년간 조선의 얼≫ 등을 남긴 것도 이 시기다. 1931년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가 경매물로 나오자, 이를 민족의 수치로 여겨 충무공의 유적을 보존하는 한편 현충사를 조성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으며, 1935년에는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조선학 운동의 일환으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與猶堂全書)≫를 교열·간행함으로써 실학 연구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1938년 일제가 조선어 강좌를 폐지하고, 조선학(국학)을 탄압하자 위당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직을 사임했고, 자신을 향한 일제의 회유와 압박이 거세지자 경기도 양주군으로 낙향했다가 1943년에는 전라북도 익산의 산속으로 거주지를 옮겨 은둔에 들어갔다.
해방을 맞이하자 국학대학 설립에 나섰고, 1947년 국학대학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새로운 국가 수립을 위해서는 민족의 얼이 올곧게 세워져야 한다는 소신에 따른 판단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1년여간 감찰 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때 지위 고하를 따지지 않는 그의 날카로운 사정(司正) 활동에 의해 1949년 2월 조봉암 농림장관이 물러나게 되었고, 6월에는 임영신 상공장관이 경질되었다. 임영신 장관의 처리를 두고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게 되자 위당은 감찰 위원장 자리를 사임했다. 사임 후 국학 연구에 매진했던 위당은 1950년 7월 31일 서울에 진주한 북한군에게 피랍(被拉)당했고, 납북 중 58세를 일기로 10월 24일 병사했다. 위당의 시신은 현재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으며, 1990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위당이 평생의 신념으로 삼았던 바는 “내 뜻을 굽히지 않고 내 몸을 더럽히지 않는다(不降其志 不辱其身)”였다고 한다.
– 편역자 : 박성수
1931년 전북 무주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과 고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성균관대학교 문과대 부교수와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교수를 지냈으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실장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장을 역임하였다. 일본 역사 교과서에 한국사가 왜곡된 부분이 많아 단군 연구를 시작하였다는 그는 끊임없이 단군에 대한 연구를 지면에 발표하는 역사학계의 대표적인 사학자이다. 주요 저서로『역사학 개론』『독립운동사 연구』『역사 이해와 비판의식』『한국 근대사』『일본 역사 교과서와 한국사의 왜곡』『민족사의 맥을 찾아서』『새로운 한국사』『한국 독립운동사론』『조선의 부정부패 그 멸망에 이른 역사』『단군문화기행』등 다수가 있다.

○ 책 속으로
지금 한반도에 처음 정착한 우리 조상들 즉 고조선족을 살펴볼 때 대체로 세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노령연해주와 함경도의 읍루와 옥저를 따라 동해안을 남진한 갈래가 있었고, 둘째는 백두산 이북의 부여를 따라 평북, 평남으로 남진한 갈래가 있었다. 셋째는 요하 서쪽의 예족을 따라 동쪽으로 이동하여 압록강을 건너 들어온 갈래가 있었다.
이들 고조선인들은 옛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이르는 곳마다 옛 제도를 본 따서 용강에다 점선신사를 세우고 대동강 유역에다 평양 또는 낙랑이라는 요동의 옛 지명을 붙였다.
사실이 이러한 것을 후세 사가들의 역사적 안식이 너무 없어 백지 몇 장 위에다 천리 고조선의 강역을 엉뚱한 곳으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p. 58
○ 출판사 서평
역사를 정치 이념의 도구로 삼지 않았던 순수 한국적 민족주의자 위당 정인보의 독자적 역사 세계를 살핀다.
위당의 난해한 문장과 단군 역사에 관해 철저했던 그만의 역사관으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조선사연구’를 일부 번역해 소개한다.

- 조선사연구 (朝鮮史硏究) 개관
조선사연구 (朝鮮史硏究)는 정인보가 지은 역사책이다.
1946∼7년에 간행되었으며,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다.
그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일제에 의한 한국사의 왜곡이었고, 한국 역사학자들이 줏대없이 역사를 연구하여 일제의 식민지 문화정책에 동조하고 있음을 개탄한 데서이다.
이 책은 식민정책의 가열로 인해서 처음 계획과는 달리 고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역사과정을 서술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이 시기의 전 역사를 민족사라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큰 성과였다.
.정의
개항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생존한 학자 정인보가 단군으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특정한 주제를 설정해 통사 형식으로 저술한 역사서.학술서.
.편찬/발간 경의
원래 1935년 1월 1일부터 1936년 8월 29일, 『동아일보』가 정간될 때까지 「오천년간 조선의 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것을 서울신문사에서 상(1946.9)·하(1947.7) 두 권으로 간행하였다.

.내용
저자는 박은식(朴殷植)과 신채호(申采浩)를 잇는 민족주의 사학자의 한 사람으로 원래 경학과 양명학을 공부한 한학자였다.
국치 후에는 한때 중국에 망명해 동제사운동(同濟社運動)에 참여하는 등 민족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하였다. 『성호사설』과 『여유당전서』의 교열 · 간행 작업에도 참여해 일제강점기에 실학과 조선학의 배양에 헌신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대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에 의해 한국사, 특히 고대사가 왜곡되어가는 학문적 풍토를 좌시할 수 없어 한국사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 무렵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가 준 자극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것을 보고 일본 학자의 조선사에 대한 고증이 저의 총독정책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을 더욱 깊이 알아 ‘언제든지 깡그리 부셔버리리라.’하였다.
그 뒤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가 들어와 그 안식 (眼識)을 탄복하는 일면에 …”라고 하였다. 뒤늦게나마 국사 연구에 착수하게 된 동기가 식민주의 사학의 타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얼’ 중심의 정신사적인 역사관을 강조하고 있다. 그가 주장하는 ‘얼’은 민족정신을 말한다.
‘얼’의 반영으로 나타나는 것이 곧 역사요, 역사의 대척주(大脊柱)를 찾는 것은 역사의 밑바닥에서 천추만대를 일관하는 ‘얼’을 찾는 작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역사학이란 역사의 대척주인 ‘얼’을 추색(推索)하는 학문으로서, 역사가는 개개의 역사적 사실을 탐구해 궁극적으로는 역사의 대척주인 ‘얼’의 큰 줄기를 찾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얼’을 빼놓은 당시의 역사학은 그것이 일제관학자의 것이든 줏대 없이 총독부의 식민지 문화정책에 동조하는 학자들의 것이든, 쓸데없는 것이요,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것으로 보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당시 문헌고증학을 내세우며 한국 고대사를 난도질하는 식민주의 사학에 정면으로 투쟁하고 있다. 우선 단군을 시조로 인식하였다.
단군의 향수(享壽)에 관한 기록은 단군조선의 전세(傳世)로 파악했으며, 단군의 연원 문제는 단군과 천(天)을 연결시키려는 의식의 반영으로 보았다. 단군의 발상지를 백두산으로, 국도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신채호의 사학을 계승·보완·심화하였다. 즉 신채호의 ‘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체계’와 ‘백제의 요서경략설 (遼西經略說)’ 및 ‘한사군의 반도 외 존재설’ 등이 그것이다.
신채호의 백제의 요서경략설을 ‘백제의 해상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하고 있다. 특히 그의 ‘한사군의 반도 외 존재’를 입증하는 논리는 명쾌하다.
당시 일제관학자들은 평양과 그 부근에서 ‘낙랑태수인 (樂浪太守印)’ 등의 명문이 든 봉니 (封泥)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하여 평양 근처가 바로 옛 낙랑지역임을 증명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봉니가 평양 주변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곧 평양이 낙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봉니 조각은 비밀문서를 받는 쪽에서 남겨지는 것인데, 평양 지역에서 이러한 봉니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평양이 곧 낙랑의 문서를 받은 곳임을 의미하는 것이지, 평양이 문서를 보낸 주체가 되는 낙랑으로는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의의와 평가
『조선사연구』에 나타난 그의 역사학은 전통적인 한학에서 출발해 고고학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광범위한 학문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한계도 없지 않다. 그것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것으로 ‘문헌고증’에 대한 한계와 역사를 지나치게 정신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것 등이라고 하겠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