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11월 28일, 이탈리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핵시대의 설계자’ ‘원자폭탄의 설계자’ 엔리코 페르미 (Enrico Fermi, 1901 ~ 1954) 별세
엔리코 퍼미 (이: Enrico Fermi, 1901년 9월 29일 ~ 1954년 11월 28일)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원자물리학자로 “양자전기역학 (量子電氣力學)의 아버지”, “중성자의 마술사”로 불렸으며, 세계 최초의 핵반응로인 시카고파일 1호를 개발하여 “핵시대의 설계자,” “원자폭탄의 설계자”라고도 불린다. 이론과 실험 양면에서 모두 뛰어난 성취를 거둔 드문 물리학자 중 한 명이다.
원자력 이용에 관한 여러 특허를 보유했고 1938년에는 중성자 충격을 통한 유도방사능 연구 및 초우라늄 원소의 발견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페르미는 양자론, 핵물리학, 입자물리학, 통계역학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남겼다.

– 엔리코 페르미 (Enrico Fermi)
.출생: 1901년 9월 29일, 이탈리아 왕국 라치오주 로마
.사망: 1954년 11월 28일 (53세),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국적: 미국, 이탈리아
.분야: 물리학
.소속: Scuola Normale Superiore di Pisa, 괴팅겐 대학교, 레이던 대학교,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출신 대학: Scuola Normale Superiore di Pisa
.지도 교수: 루이지 푸찬티 (이: Luigi Puccianti)
.지도 학생: 리정다오, 에토레 마요라나, 에밀리오 지노 세그레, 제프리 추(Geoffrey Chew)
.주요 업적: 중성자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방사능 원소, 인공적인 핵 연쇄 반응, 페르미-디랙 통계, 베타 붕괴
.수상: 마테우치 메달 (1926), 노벨 물리학상 (1938), Hughes Medal (1942), Rumford Prize (1953)
.배우자: 로라 페르미 (1928 ~ 1954)
.자녀: 줄리오 페르미, 넬라 페르미
페르미의 첫 기여 분야는 통계역학이다. 1925년 볼프강 파울리가 배타 원리를 발견한 뒤 페르미는 그 원리를 이상기체에 적용하여 오늘날 페르미-디랙 통계라고 부르는 통계적 분포를 이끌어냈다. 오늘날 배타 원리를 따르는 입자를 페르미 입자라고 하는데 이는 물론 페르미의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 뒤 페르미는 베타 붕괴가 일어날 때 에너지 보존 법칙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자와 함께 전하가 없는 보이지 않는 입자가 방출된다고 상정하였고 이 생각을 밀고나가 중성미자라는 가상입자 모형을 정립했다. 페르미의 이론은 훗날 페르미 상호작용이라고 불리었고 더욱 뒤에는 약한 상호작용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이는 자연계의 4대 기본 상호작용 중 하나이다. 방사능과 당시 막 발견되었던 중성자를 이용한 실험을 통하여 페르미는 느린 중성자가 빠른 중성자보다 쉽게 포획된다는 것을 발견했고 이 현상을 기술하기 위해 페르미 나이 방정식을 개발했다. 페르미는 토륨과 우라늄에 느린 중성자를 쏘아보냄으로써 새로운 원소를 만들어냈다는 결론을 얻었고, 이것으로 노벨상을 받게 된다. 이렇게 새로이 만들어진 원소들은 그 뒤 핵분열 생성물로 밝혀진다.
이탈리아 인종법이 통과되어 유대계 아내 라우라 카폰이 위험에 처할 것을 우려한 페르미는 1938년 이탈리아를 탈출했다. 미국으로 이민간 페르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페르미는 시카고파일 1호 설계 및 건조 팀을 이끌었으며, 1942년 12월 2일 반응로는 임계점에 도달하여 세계 최초의 지속 가능한 인공적 핵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1943년 임계에 달한 X-10 그래피티 반응로와 그 이듬해의 B 반응로에도 페르미의 도움이 있었다.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페르미는 F부 부장을 지냈다. F부는 에드워드 텔러의 열핵융합 “슈퍼 폭탄” 제작 부서의 일부였다. 페르미는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실험 자리에 동석했으며 폭탄의 효과를 추산하기 위해 자신이 개발한 페르미법을 사용했다.
전쟁이 끝난 뒤 페르미는 일반자문위원회의 로버트 오펜하이머 밑에서 일했다. 오펜하이머는 당시 미국 원자력 위원회에 핵문제 및 정책을 조언하고 있었다. 1949년 8월 소련에서 최초의 핵분열 폭탄 개발에 성공하자 그보다 강력한 수소폭탄을 개발하자는 의견이 대두했다. 페르미는 도덕적 및 기술적 견지에서 수폭 개발을 강하게 반대했다. 페르미는 1954년 오펜하이머 보안 청문회에서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오펜하이머의 역성을 들었으나 결국 오펜하이머는 관련 기밀 정보 접근권한을 박탈당했다. 페르미는 입자물리학, 특히 파이 입자와 뮤 입자에 관해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며, 성간공간의 물질이 자기장 속에서 가속될 때 우주선이 발생할 수 있음을 추측하기도 했다. 페르미의 이름을 딴 상, 개념, 연구소가 수없이 많은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엔리코 페르미 상, 엔리코 페르미 연구소, 페르미 국립 가속기연구소, 페르미 감마선 우주망원경, 엔리코 페르미 핵발전소, 합성원소 페르뮴 등이 있다.

○ 생애 및 활동
1901년 철도청 직원인 아버지와 교수 어머니 사이에서 3남매 중 2째로 로마에서 태어났다. 형이 종기 제거 수술 중에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사망하고 누나는 후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개인적인 아픔이 있기도 하다.
1918년 피사대학교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천재적 면모를 드러낸 인물답게 1926년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다. 피사 대학 입학시험 답안지는 박사학위 논문이었으며 『원자물리학 입문』이라는 책을 쓸 때에는 풀밭에 드러누워 쓴 원고를 그대로 출간했을 정도다. 게다가 보통의 물리학자들이 실험과 이론 중 하나에 치우쳐 다른 쪽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반면, 페르미는 이론 물리학자였지만 필요하면 실험도 깔끔하게 잘 해내는 만능형 물리학자였다. 심지어 닐스 보어와는 다르게 논문이나 책을 쓰는 데에도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 이론 물리학자로서의 스타일도 완벽에 가까웠는데, 수학적 기교에서 당대 어느 물리학자에게도 뒤지지 않았지만 수식에 의존하기보다는 직관과 논리에 의해 이론을 펼치고 꼭 필요한 때에만 계산을 했다고 한다. 이
그러나 아내인 라우라 페르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베니토 무솔리니의 전체주의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고, 이 때문에 1938년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받자마자 그대로 미국으로 망명한다. 이후로 미국에서 핵분열 반응을 연구, 1942년 세계 최초의 원자로인 시카고·파일 1호를 완성시켜서 원자핵 분열 연쇄 반응을 제어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런데 이것도 1939년에 시작된 맨하튼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핵분열의 제어야 말로 원자력과 이를 이용한 핵무기의 핵심 기술이기도 하고 플루토늄의 생산은 원자로로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페르미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함께 “핵폭탄의 아버지”로 꼽히게 된다.
핵무기 제조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것이 자발적이었는지, 타인에 의한 것인지는 말이 많다. 하지만 원자폭탄 연구를 시작한 계기가 실라르드 레오 (Szilad Leo)가 페르미에게 독일의 핵무기 연구에 대해서 경고했기 때문 (실라드는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까지 끌어들인다)인 데다, 연구가 한참 진전된 이후에 실라드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다른 과학자들이 “독일은 망해가고 있으니 핵무기 개발은 이제 그만두자”라는 탄원서를 냈을 때 정부 측에 설득되어 연구를 지속한 점, 미국 정부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을 듣자 수소 폭탄 개발을 결정한 점을 보면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해 보인다. 다만 맨해튼 계획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나 해당 프로젝트로의 참여가 자발적인지 아닌지가 의미가 있을 뿐이지 결국 핵무기 개발이 미국만이 아니라 강대국간의 경주 형태로 진행되었고, 당시로서는 나치독일 이후의 국제정세를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이 안 하면 미국도 안 해도 된다는 가정은 큰 의미가 없다.
1954년 핵 물리학 관련 실험을 오랫동안 하면서 노출된 방사선에 의해 발병한 암으로 사망했는데, 죽기 직전에도 병상에 누워 링겔의 떨어지는 물방울을 관찰하며 그 유속을 측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언가를 수치화시키는 것을 매우 좋아해, 눈 앞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멀리 산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거나, 심지어는 속도도 측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사후
페르미 사후 발견된 원자번호 100번째 원소는 그의 이름을 기려 페르뮴이라 명명된다. 이외 보즈의 이름을 딴 ‘보손 (Boson)’과 상대되는 개념인 ‘페르미온 (Fermion)’도 그 이름을 땄다. 그리고 그의 명언인 ‘모두 어디 있지?’는 ‘페르미 역설’이라고 불리며, 왜 전 우주에 우리 인간 말고 다른 지성체가 없는지를 증명하는 강력한 논리적 증거로 사용되고 있다.
유명 물리학자인 만큼 본인의 이름을 딴 페르미 감마선 우주 망원경이 2008년 발사되었는데, 엄청난 데이터로 연일 관련 논문을 쏟아내고 있다. 덕분에 죽어서도 이름을 남기는 위엄을 과시하고 있다.
엔비디아가 출시한 GeForce 400과 GeForce 500을 이루는 마이크로아키텍처의 코드네임으로도 쓰인 바 있다.

○ 업적과 영향
1926년 전자에 대한 양자통계법칙 (量子統計法則)을 제기했는데, 이는 같은해 그 양자역학과의 관련이 P. A. M. 디랙에 의해 페르미와는 별도로 밝혀져「페르미-디랙 통계」라고 한다.
또한 이를 금속의 자유전자군 (群)에 적용, 「전자기체 (페르미 가스) 이론」을 세워「토마스-페르미 원자모형 (原子模型)」을 제시했다.
1927년 원자 · 분자의 분광학적 (分光學的)연구로「페르미 공명 (共嗚)」을 발견하고, 입자산란이론 (粒子散亂理論), 원자 · 원자핵 구조론, 양자전기 역학 등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특히 1934년에 발표한「원자핵의 붕괴 이론」은 유카와 히데키 (湯川秀樹)의 중간자론 (中間子論)과 함께 소립자 (小粒子) 물리학을 개척하는 길을 열었으며, 발견 직후의 중성자 (中性子)를 원자핵 실험에 이용,「페르미의 중성자 감속이론」을 전개하여 중성자물리학의 기초를 세웠다.
그해 중성자에 의한 우라늄 충격실험으로,「초 (超) 우라늄원소」를 발견, 후일 O. 한 등에 의한 핵분열현상 발견의 계기를 마련한 업적으로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C. D. 앤더슨, L. 실라드 등의 협력을 얻어 1939년 핵분열연쇄반응현상 (核分裂連銷反應現象)을 발견, 1942년 12월 시카고 대학 야금(冶金)연구소에 원자로를 건설, 제어 (制御)된 핵분열반응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핵 (核)에너지 해방을 실현했다.
그는 이를 계기로 맨해튼 계획에 참가하여 원자폭탄제조에 깊이 관여했으며, 제2차세계대전 후 고에너지 (小粒子) 물리학의 중심과제이던 π중간자-핵자간 (核子間) 상호작용의 연구를 계속,「페르미-얀 모형」을 비롯한 많은 성과를 올렸다.
또한 우주선 가속 (페르미 가속) 현상에 대해 이론적 해명을 했으며, 비선형진동자 (非線形振動子)에 관한 「계산기 실험」도 하여「페르미의 재귀현상 (再歸現象)」을 발견했다.
그것은 오늘날 솔리톤 (soliton) 연구의 첫걸음으로서 계산기 실험의 최초의 예가 된다.
페르미의 많은 연구결과들은 양자론, 핵물리, 입자물리, 고체물리, 원자로 물리, 분광학, 통계역학 등 다양한 물리 분야에 그의 이름을 각인 시켜놓았다. 즉 페르미 에너지, 페르미 패러독스, 페르미 상수, 페르미-디랙 분포, 페르뮴 (페르미의 이름을 딴 기본 입자) 등 20세기에 페르미보다 더 많은 이름을 남겨놓은 물리학자를 생각해 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 시카고파일-1
최초의 원자로로, 시카고대학 운동장의 스탠드 아래쪽에 있던 사용하지 않는 스쿼시코트에서 만들어졌다. 6톤의 우라늄과 50톤의 산화우라늄 그리고 감속재 역할을 하는 400톤의 흑연 벽돌을 층층이 쌓아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물건을 차곡차곡 포개놓은 더미라는 뜻의 파일 (pil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설계와 책임을 페르미가 맡았다.
가로와 세로 각각 7미터의 타원형으로 제작된 시카고파일-1은 중성자 흡수재로 카드뮴봉을 사용했다. 카드뮴봉을 원자로 안에 집어넣으면 연쇄반응이 줄어들고, 빼내면 연쇄반응이 강화되는 제어봉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방사선이 인체에 얼마나 해로운지 잘 몰랐기 때문에, 카드뮴봉을 줄에 매달고 사람이 줄을 당겨 인출하고 줄을 내려 원자로에 집어넣었다. 1942년 12월 2일 마침내 세계 최초의 원자로 실험장치를 조작할 수 있는 기계가 준비되었고, 페르미는 카드뮴으로 코팅한 제어봉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자 방사성계수관이 튀었다가 안정되었다. 이후 원자로는 1/2W의 출력 상태로 28분 동안 가동되었고, 실험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이어서 미국의 아르곤원자력연구소에 출력 100kW의 제2의 원자로가, 그리고 워싱턴주 핸포드 지역에 원자폭탄 제조용 플루토늄을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원자로가 건설되었다.
- 중성자 이용해 새로운 동위원소 만들어
1926년 로마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가 될 무렵부터 원자의 양자론을 연구하다 원자핵 연구에 푹 빠진 그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준 건 바로 원자붕괴 실험이었다. 당시 졸리오 퀴리 등은 헬륨핵의 방사선을 이용해 원자를 붕괴시켜 인공 방사능을 만드는 데 성공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은 원자번호 20 이하, 즉 주기율표 상의 가벼운 원소들에만 적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페르미는 중성자를 이용해 무거운 원소까지 쪼개는 데 성공했다. 헬륨의 핵은 전하를 띠고 있어 반발력을 가지는 반면 전하를 띠지 않는 중성자는 어떠한 원자의 핵이라도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실험에 성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페르미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중성자를 수소핵과 충돌시켜 속도가 감소된 ‘느린 중성자’로 만들 경우 훨씬 더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페르미는 느린 중성자를 이용해 거의 모든 원소에서 방사능 동위원소를 만들었다. 심지어 원자번호 92번이자 주기율표 상의 마지막 원소인 우라늄에 적용해 원자번호 93인 넵튜늄과 94인 플루토늄이라는 두 개의 새로운 원소를 만드는 데도 성공했다.
페르미는 새로운 방사능 물질과 느린 중성자의 특별한 능력을 발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그는 노벨상을 받자마자 그 상금을 이용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유대인인 아내를 무솔리니의 파시즘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 ‘천 개의 태양보다 밝다’
미국에 도착한 후 컬럼비아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임명된 그는 1939년 초 오토 한 등이 핵분열 현상을 발견하자 2차 중성자 방출과 핵 연쇄 반응의 가능성을 연구했다. 그 연구에 성공함으로써 페르미는 세계 최초로 원자로를 설계해 시카고대학의 지하에서 핵 연쇄반응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가한 그는 1945년 7월에 실시된 최초의 핵폭발 실험 현장에도 있었다. 당시 지름 76m의 웅덩이가 생길 만큼 엄청난 핵폭발을 지켜본 후 그는 ‘천 개의 태양보다 밝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트리니티’라는 암호명으로 행해진 이 실험이 행해지기 직전 및 실험 후 핵폭풍 충격파가 지나갔을 때 페르미는 각각 종이를 떨어뜨려 그 위치 변화로 원자폭탄의 위력을 측정했다. ‘페르미 추정’이라고 불리는 이 과학적인 계산법은 집회에 활용된 공간의 전체 면적을 계산하고 단위 면적당 가능 인원을 계산해 집회에 참여한 전체 인원을 추정하는 방식으로도 응용되고 있다.
이처럼 사소한 것조차 과학적 연구의 한 방법으로 여겼던 그의 생활 방식은 죽는 순간까지도 계속됐다. 암으로 입원한 병실에서마저 자신에게 주입되는 주사제의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스톱워치로 시간을 측정한 것. 하지만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의 핵심 이론을 제공한 위대한 천재는 결국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1954년 11월 28일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미국 정부는 1967년에 설립한 국립가속기연구소를 7년 후 그의 이름을 따서 페르미연구소로 개칭했다. 미국에너지국 산하의 이 연구소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 (CERN)와 함께 세계 최고, 최대의 입자물리연구소로 꼽힌다.
- 페르미통계
페르미는 1926년, 페르미 통계 ―독립적으로 디랙도 같은 결과를 수개월 후에 발표하여 나중에 페르미-디랙 통계라고 부름―라고 알려진 첫 번째 중요한 발견을 하였다. 다수의 전자를 포함하는 계에서 2개 이상의 전자가 같은 양자상태를 취하지 않는다는 파울리 (Wolfgang Pauli)의 배타율을 따르는 입자들을 페르미온 (Fermion)이라고 하는데, 페르미는 이 페르미온들의 성질과 거동을 결정할 수 있는 통계적 방법을 개발하였다.
정수의 스핀 양자수를 갖는 입자 (보스입자: 보존)가 2개 이상 모여 생긴 계의 파동함수는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는 것과 대조적으로 반정수 스핀을 갖는 전자, 양자, 중성자, 혹은 이들 소립자의 홀수개로 되는 모든 입자들 (페르미온)은 페르미-디랙 통계를 따른다.
페르미-디랙 통계는, 원자물리, 핵물리, 그리고 고체상태 이론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예를 들면 금속이나 반도체의 결정 격자 내에서 움직이는 전자들을 페르미 기체로 생각하여 페르미-디랙 통계를 써서 이들의 전기 전도도를 설명할 수 있다. 즉 페르미온들의 에너지 분포를 결정할 수 있으며 수밀도, 온도, 그리고 가능한 에너지상태에 의하여 에너지 분포가 특징지어진다. 물리학자들은 페르미-디랙 통계의 중요성을 즉시 인정하였으며, 페르미는 이론 물리학자들의 국제적 커뮤니티에서 리더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27년, 실험 물리학자인 콜비노 (Orso Mario Corbino)가 열심히 노력하여 이태리에서는 처음으로 로마대학에 이론 물리학 교수 자리가 새로 만들어 졌고 25살의 페르미가 정교수로 초빙되었다.
페르미의 다음 중요한 연구는 1927년 원자모형에 페르미통계를 적용한 것이다. 토마스 (L. H. Thomas)도 독립적으로 같은 결과를 얻어 토마스-페르미 원자모형으로 불리는데,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통계학적 방법으로 핵에 의해 끌리는 완전히 축퇴된 전자가스 분위기로서 핵주위의 전자구름의 밀도를 계산하는 원자모형이다.
그뿐만 아니라 페르미는 원자, 분자 및 핵 분광학, 입자산란이론, 원자 및 핵구조, 그리고 양자전기역학 같은 물리에서의 폭넓은 다양한 문제들에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가령 디랙은 양자전기역학에 대하여 근본적이나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논문을 발표했는데, 페르미는 그의 논문을 읽은 후 좀 더 친숙한 방법들을 가지고 똑같은 결과를 재 공식화하여 물리학자들이 양자전기역학을 쉽게 이해할수 있도록 기여하였다.
1928년 페르미는 이태리 해군장성의 딸, 라우라 케이폰 (Laura Capon)과 결혼하여 슬하에 두 자녀를 두었다. 이태리 수상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는 1929년 이태리의 첫 번째 이론물리학자이며 유럽의 떠오르는 스타, 페르미를 1929년 이태리 왕립 아카데미의 첫 30명 학술회 회원 중 최연소이며 유일한 물리 회원으로 지명하였다. 왕립아카데미 회원에겐 일반 대학교수보다 훨씬 많은 봉급과 예복과 각하 (Excellency)라는 호칭이 포함되는 매우 영예로운 자리이다.
- 업적 요약
그의 중요한 업적들을 대략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1)양자전기역학 (QED)에 대한 최초의 이해하기 쉬운 총설을 씀
2)페르미 통계 (또는 Fermi-Dirac 통계)와 고체이론
3)원자의 Thomas-Fermi 모델
4)베타 붕괴이론과 약한 핵력 (核力)
5)중성자에 의해 유발된 인공 방사능
6)핵분열의 확인 및 중성자 수량의 측정
7)핵반응이 지속가능한 최초의 원자로
8)원자로 디자인과 특허-원자력시대를 염
9) 고체물리에 중성자회절 응용
10)핵폭탄 개발에 참여
11)파이 중간자 (파이온) 빔 디자인
12)메이어가 핵 껍질 모형을 발견하는데 일조
13)파이온-양성자 탄성 산란
14)페르미 공명
15) 양성자의 L=1 여기상태 발견
16)입자 생산의 통계학적 모델,
페르미의 많은 연구결과들은 양자론, 핵물리, 입자물리, 고체물리, 원자로 물리, 분광학, 통계역학 등 다양한 물리 분야에 그의 이름을 각인 시켜놓았다. 즉 페르미 에너지, 페르미 패러독스, 페르미 상수, 페르미-디랙 분포, 페르뮴(페르미의 이름을 딴 기본 입자) 등등, 20세기에 페르미보다 더 많은 이름을 남겨놓은 물리학자를 생각해 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 저서
주요저서로 『원자물리학 입문』외 페르미의 많은 연구결과들은 양자론, 핵물리, 입자물리, 고체물리, 원자로 물리, 분광학, 통계역학 등 다양한 물리 분야에 그의 이름을 각인 시켜놓았다. 즉 페르미 에너지, 페르미 패러독스, 페르미 상수, 페르미-디랙 분포, 페르뮴 (페르미의 이름을 딴 기본 입자) 등 20세기에 페르미보다 더 많은 이름을 남겨놓은 물리학자를 생각해 내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 Publications
Introduzione alla Fisica Atomica (in Italian). Bologna: N. Zanichelli. 1928.
Fisica per i Licei (in Italian). Bologna: N. Zanichelli. 1929.
Molecole e cristalli (in Italian). Bologna: N. Zanichelli. 1934.
Thermodynamics. New York: Prentice Hall. 1937..
Fisica per Istituti Tecnici (in Italian). Bologna: N. Zanichelli. 1938.
Fisica per Licei Scientifici (in Italian). Bologna: N. Zanichelli. 1938. (with Edoardo Amaldi)
Elementary particles.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1951.
Notes on Quantum Mechanics. Chicago: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1.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