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8년 12월 19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Marie Thérèse Charlotte de France, 1778 ~ 1851) 출생
프랑스의 마리 테레즈 (프: Marie Thérèse Charlotte de France, 1778년 12월 19일 ~ 1851년 10월 19일)은 프랑스의 공주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후일 샤를 10세가 되는 숙부 아르투아 백작의 장남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과 결혼하여 앙굴렘 공작 부인이 되었다.
흔히 마담 루아이얄 (Madame Royale)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왕정 복고 이후 1824년 샤를 10세가 왕이 되면서 왕태자비 (마담 라 도핀, Madame la Dauphine)가 되었다.

–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Marie Thérèse Charlotte de France)
.출생: 1778년 12월 19일, 프랑스 베르사유 베르사유 궁전
.사망: 1851년 10월 19일, 오스트리아 Schloss Frohsdorf
.조부모: 마리아 테레지아, 프란츠 1세, 루이 드 프랑스, 마리아 요제파 폰 작센
.부모: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16세
.배우자: 루이앙투안 다르투아 (1799 ~ 1844)
.형제자매: 루이 17세, 루이 조제프 그자비에,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드 프랑스 왕녀
1789년 10월 5일, 파리 시민들의 베르사유 행진 이후 포위된 왕실은 베르사유를 떠나 강제로 파리 내 튈르리 궁에 격리되었다. 그러나 일부 골수 왕당파들은 생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프랑스에 남아 왕가를 보필하였다. 그 중 한 명이었던 투르젤 후작 부인은 왕비의 친구 랑발르 공작 부인과 함께 탕플에서까지 왕족들의 곁에 남아 있었다. 후작 부인의 딸로 이 당시 마리 테레즈의 친구가 된 폴린 드 투르젤은 혁명의 와중에서도 구사 일생으로 살아나 마리 테레즈의 평생에 걸친 친구가 되었다.
– 왕태자비 시절
프랑스에 되돌아온 부르봉 왕가는 일단 바닥까지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되찾는 일부터 착수하였다. 1815년, 죽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마담 엘리자베트의 시신을 찾아내 왕실 묘소가 있는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시키고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그러나 이 작업이 끝나자마자 엘바 섬에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1815년 2월 26일, 엘바 섬을 탈출, 프랑스에 되돌아오는 데 성공하였다. 겁에 질린 왕족들은 국왕 루이 18세를 시작으로 모두 황급히 도주하였다. 이때 왕족들의 도주에 제어를 걸고 단호히 맞선 유일한 인물은 오직 마리 테레즈 뿐이었다.
당시 보르도에 거주하고 있던 마리 테레즈는 나폴레옹이 돌아온다는 소리에 용감하게 군대를 소집하고 그와 맞서려 했으나, 나폴레옹의 위용을 실제로 보고 들었던 군인들은 공포에 떨며 마리 테레즈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만을 약속했을 뿐 나폴레옹에게 맞서려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폴레옹은 “그녀는 그 가문의 유일한 남자 (only man in her family)”라며 정론보도를 해야할 언론조차도 처음에는 역도가 탈출했다고 보도하다가 나중에는 황제께서 입성했다고 아부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을만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려고 한 여걸 (女傑) 마리 테레즈의 용기에 감탄한 뒤 마리 테레즈가 도망칠 수 있도록 놓아주었다. 결국 대세가 기운 것을 깨달은 마리 테레즈는 국외로 도피하였다.

하지만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쟁의 패배로 나폴레옹이 다시 몰락,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면서 부르봉 왕실은 다시 프랑스에 복귀하였다. 1824년, 루이 18세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동생 아르투아 백작이 샤를 10세로 즉위하였고, 그의 장남 앙굴렘 공작이 왕태자가 되면서 마리 테레즈 또한 왕태자비가 되었다. 많은 민중들은 불행했던 시절과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일한 직계 자손이라는 점이 전설이 된 마리 테레즈를 반겼지만 마리 테레즈는 자신에게 바로 그 불행을 안겨준 민중들을 진심으로 싫어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고, 우아하고 센스 넘치는 여인이었던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와 달리 거만하고 신경질적이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리 테레즈 역시 루이 17세와 관련해 소문이 돌았던 것처럼 탕플에서 바꿔치기 당한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주장도 제기되었으나 오늘날에는 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거의 대부분이다. 또한 샤를 10세와 더불어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그녀의 정치관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경계 대상이 되었다.
– 재 망명과 사망
결국 샤를 10세와 그의 아들 앙굴렘 공작이 7월 혁명으로 축출되면서, 마리 테레즈는 샤를 10세에 이어 앙굴렘 공작이 퇴위 서류에 서명하는 20분 가량만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샤를 10세의 뒤는 오를레앙 가 출신으로 ‘시민 왕’으로 이름 높았던 루이 필리프가 이었다. 불편한 존재가 된 그들은 결국 다시 망명길에 올라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을 떠돌아다녔다. 남편 앙굴렘 공작은 1844년 사망하였다.
자녀가 없었던 마리 테레즈는 시동생 베리 공작의 유복자인 샹보르 백작 앙리를 친자식처럼 키웠고, 루이 필리프의 왕위 계승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탓에 그가 진정한 왕위 계승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녀의 추종자들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 탓에 그들은 그를 앙리 5세라 부르기도 하였다.
마리 테레즈는 1851년 오스트리아의 프로스도르프에서 사망하였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