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20년 1월 25일, 로마 제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세 번째 아내 메살리나 (Valeria Messalina, 17/20 ~ 48) 출생
메살리나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셋째 아내이다. 황제 네로의 사촌이자 황제 칼리굴라의 둘째 사촌이다. 지나친 성행위으로 유명세를 떨친 강하고 영향력있는 여성이었다. 남편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대한 공모 혐의로 사형에 처해졌다.
– 메살리나 (Valeria Messalina)
.출생: 17 / 20년 1월 25일, 이탈리아 로마
.사망: 48년, 이탈리아 로마 Gardens of Lucullus
.부모: 도미티아 레피다, Marcus Valerius Messalla Barbatus
.형제자매: 파우스투스 코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배우자: 클라우디우스 (38 ~ 48년)
.자녀: 브리타니쿠스,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로마 제국의 제4대 임페라토르 클라우디우스 1세의 셋째 부인이자 황후. 본명은 발레리아 메살리나 (Valeria Messalina)이나, 흔히 메살리나로 불린다.
로마 제국의 제5대 임페라토르 네로의 사촌누이로,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타 중 최초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여러 악행과 그 최후 때문에 당대부터 사촌동생 네로와 함께 사생활이 난잡하고 악랄한 행적으로 악명을 떨쳤다.
사실 이런 난잡하고 악랄한 행적도 문제지만 로마 아우구스타 최초로 황제에게 반역을 꾀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기록말살형은 어찌보면 당연했다고 할 수 있다.
○ 생애 및 활동
메살리나 (Messalina, Valerius, 17/20 ~ 48)는 명문가 귀족 출신으로 클라우디우스 (Tiberius Claudius Nero Germanicus, BC 10 ~ AD 54, 칼리큘라에 이어 4번째 황제로 등극) 로마황제의 세 번째 아내다.
클라우디우스는 어릴적 소아마비를 앓다 약 잘못 먹고 정신이 오락가락 했던 그가 또 이혼하고 맞이한 세번째 아내가 바로 15세의 메살리나다.
그 때의 황제 나이가 50대. 메살리나가 처음부터 권력과 성욕에 굶주린 여성은 아니었다. 명문 귀족집안에서 착실한 공부와 수업을 받은 그녀는 미모까지 겸비한 재기발랄한 여성이었으나 남자의 무관심이 빚어낸 비극의 산물이 된다. 황제는 결혼후 황후에게 무관심 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무관심에 대한 욕구불만이 처음에는 권력욕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그녀는 영민한 머리와 자신의 미모를 십분 발휘하여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황실을 장악한다. 공포정치를 향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또는 장악 이후 눈을 돌린 곳은 남자였다.
그녀의 유혹을 거절하다간 죽게 된다. ‘아피우스 시라누스’라는 귀족이 그였다. 거절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황실내에서 그녀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심지어 쾌락의 신선함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본격적으로 매춘업을 한다.
로마시내 한 복판에 “류키스카”라는 매춘굴을 만들어 밤이면 나가서 온갖 쾌락을 즐기다가 새벽이면 황궁으로 돌아오곤 했다. 거기서 만난 “네스타”라는 자의 동상까지 황궁 곳곳에 세워 놓기까지 하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였다. 도가 넘어선 그녀는 “황제는 몇 명의 여자를 두는데 왜 황후는 안되냐?”는 것이다.
단지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실행에 옮겼다. 대상은 원로원 의원이며 집정관 예정자인 “가이우스 시리우스 (Caius Silius)인데, 당시 유부남인 그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황제가 지방 순시의 틈을 타 황궁에서 온갖 귀족들을 다 모아 놓은 자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이를 보고, 그 동안의 음란, 퇴폐 행각에도 눈감아 주었던 신하와 백성들은 드디어 들고 일어난다. 로마인들은 두 남녀를 엄벌에 처하도록 황제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메살리나의 행각을 반신반의하던 황제는 실리우스에게는 사형 선고를 내렸지만 메살리나의 애원에 자꾸만 처벌을 미뤘다. 황제의 결단을 기다리다 지친 측근들은 클라우디우스와 몰래 공모하여 별장에 숨어 있던 황후를 찾아내 칼로 찔러 죽였다 (시리우스와 함께 목이 잘렸다는 설도 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28세 였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는 황제의 암살시도였다. 자신의 애인 시리우스와 결혼이후 황제 암살을 시도했고,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48년 황제의 명에 의해 살해된다. 먼저 시리우스를 죽이고, Gardens of Lucullus라는 모친의 집에서 황제에게 탄원서를 준비하던 중 황제의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그녀의 죽음의 순간, 황제는 저녁 식사 중이었고, 그녀의 죽음 소식을 들은 황제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와인을 더 주문하며 맛있게 식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녀의 사후 황실내에서 그녀에 관한 모든 자료와 동상 등이 지워지기 시작한다. 남겨진 두 아이들만 슬픔에 잠겨있지만 황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로운 여인 아그리피나 (Agrippina the Younger, 네로의 모친)와 이듬해 새해 첫날에 거창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녀의 딸 ‘옥타비아’는 이후 네로의 아내가 된다.
○ 평가
메살리나로 대변되는 초기 로마 제국의 성적 타락상은 미술사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는 쿠튀르 (Couture, Thomas, 1815 ~ 1879)의 ‘퇴폐기의 로마인들’ (The Romans of the Decadence)이 유명하다.
술과 쾌락에 젖은 로마인들의 유흥 장면을 통해 대제국의 타락상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1847년 살롱전에 출품한 ‘퇴폐기의 로마인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쿠튀르는 일약 유명 화가의 반열에 올라섰으며, 그의 아틀리에 (atelier)는 촉망받는 젊은 화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화실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메살리나는 로마의 성적 타락을 상징하는 존재요, 허영심과 물욕, 성욕의 화신이다.” 라고 메살리나 관련 글에서 메살리나를 악녀로만 정의하는데, 나름대로 시대와 상황적, 정신분석적 접근도 필요하다.
첫째로 당시 성적관념은 지금과는 달리 일종의 스포츠와 같은 개념이었다. 테니스를, 축구를 누구와도 할 수 있듯이 성적상대가 동성이든, 이성이든 관계없이 그 벽과 경계선이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신을 냉대한 남편에 대한 복수심과 채울 수 없는 빈 가슴을 성으로 해소를 하려고 하였고, 이러한 공허한 정신상태에서 성적 불만족 또는 도착증 증세가 아닌가 한다. 물론 그녀의 행위 자체는 황후로서 당연히 부도덕하고 품위떨어지는 행위지만, 젊은 부인을 외면한 황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그녀가 이러한 일을 벌인 배경은 분명, 황제에 대한 일종의 반항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메살리나는 실제로 37~38년 사이에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했으니 그녀의 나이는 당시 17~20살 정도로 추정되며 클라우디우스는 아직까지 황제의 위에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칼리큘라가 가족들과 함께 살해된 것이 41년이니 그녀와 결혼 후에 황제위에 올랐으며, 사실 그녀와의 결혼도 칼리큘라 사후 황권 강화차원이 강했다.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따르면, 현대 이탈리아어에서 메살리나라는 이름은 ‘아무 남자와 동침하는, 몸가짐이 헤픈 여자’의 대명사로 쓰인다고 한다.
실제로 서양권에서 여성을 메살리나라고 부르는 것은 음험하고 성적으로 탐욕스러운 성격을 나타낸다.
참고 = 위키백과, 나무위키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