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단상
효, 새롭게 바라보기
흔히 부모님 말씀 잘 듣는 것이 효도하는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부모님 뜻을 잘 받들어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는 이 땅의 모든 모범생들은 다 효자효녀들인가? 그리고 공부를 못하거나 안 하는 아이들은 다 불효자들인가?
현대판 효도는 공부 잘하는 것이 으뜸이라며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로 학원으로 몰지만 사실상 그런 효도가 인간성을 얼마나 파괴하는지 우리는 안다. 인간성은 나빠도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조차 있는 이 시대에 효도라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다음 글은 어떤 ‘효녀’가 쓴 편지글인데, 효를 선양한다는 한 홈페이지에서 옮겨온 것이다.
부모님 죄송합니다. 14년 동안 자라오면서 남들처럼 효도다운 효도를 못해드린 것을요.
“○○는 대회에서 대상 타왔는데 넌 뭐하고 있니?” “○○는 1등 해서 장학금 받았다는데 넌 뭐하니?”하고 저와 다른 친구를 비교하실 때는 부모님이 밉고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그때의 부모님 마음을 지금에서야 알고 또 알게 되었습니다. …… 며칠 있지 않으면 집으로 성적표가 오게 되요.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었던 저의 노력이 녹아있는 결과니까 만족하시면 다음에 더욱 노력해서 만족하게 해드리겠으며 만족하지 않으시면 더욱 노력해서 만족하게 해드리겠습니다. 남들에게 효녀인 딸, 부모님께 착한 맏이, 언니, 누나가 되겠습니다.
아마도 어버이날에 학교에서 썼음직한 이런 편지를 받은 부모는 기뻐할지 모르지만, 그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14살 소녀는 친한 친구들을 적으로 삼고 점수 1, 2점에 울고 웃었을 것이다. 아이를 위한답시고 오히려 아이를 망쳐놓는 부모도 문제지만, 그런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효도라고 세뇌시키는 학교와 사회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부모가 부모답지 못해도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말이,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데 으뜸가는 것이 ‘효’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인 윤리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이처럼 피상적인 효도관은 아이들의 삶만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남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통념적인 효도관이 얼마나 진실을 왜곡하는지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대안교육 현장에 있는 어떤 ‘노처녀’ 교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엄마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마음을 알아주고, 무엇보다 엄마를 좋아하니까 엄마는 나더러 효녀라고 해요. 그런데 친척들은 내가 집 나와 살고 있고, 용돈도 못 드리고, 서른 넘도록 결혼도 안 하고 있으니까 불효자식으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효자 효녀 소리 듣는 사촌들을 보면 부모와 관계가 별로인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모님을 굉장히 부담스러워해요. 모시고 살 일도 부담이고, 결혼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것도 크고요.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남자 데리고 와야 한다, 좋은 며느리 데리고 와야 한다 등등 마음이 무거운 거죠.”
도식적인 ‘효’의 조건보다 부모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친밀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그이는 갱년기인 엄마가 많이 우울해하고 가치관의 혼란을 느끼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는 늙은 엄마를 위해 효도 관광이니 번잡스런 잔치를 해드리기보다 엄마를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엄마의 든든한 백이 되어준 것이다. 부모 자식 관계가 제대로 맺어지려면 서로 마음이 통하고 친밀감이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런 것 없이 ‘효’라는 걸 들이미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일 따름이다. 도식화된 ‘효자효녀’는 사회통념상 요구되는 자식 역할에 충실한 것이지 진실로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역할극을 하듯 주어진 역할을 할 뿐이다. 형식적인 효가 아닌 진짜 효는 어쩌면 불효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은 오로지 부모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자식이 있음으로 해서 부모가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효’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부모자식 사이의 그 내밀한 관계는 외부에서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어찌 보면 ‘효’의 본래 모습은 윤리를 넘어서 종교의 영역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부모의 자애(慈愛)가 선악의 기준을 넘어선 영역이듯이 효(孝) 또한 궁극적인 모습은 선악을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 좋은 부모이든 아니든, 부모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내 부모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내 가까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이고, 가장 소중한 장소는 ‘여기’이고,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효’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겠다. 다시 말해 근원적인 인간애에 기초할 때 효의 본래 모습이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
현병호(민들레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