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보는 성경통독 길라잡이
잠언서 개관: 누구와 식탁을 함께 할 것인가?
『감성지능 EQ』라는 책은 지능지수에 대해 말하면서 지능지수와 감성지능을 비교했다. 이 책은 성경이나 잠언서를 언급하진 않지만 책의 저자인 다니엘 골만이 감성지능의 개념을 묘사하는 설명은 잠언서의 지혜개념과 매우 유사하게 들린다. 지능지수가 높은 사람들은 많은 사실을 알고 있다. 이들은 어려운 수학 방정식을 풀 수 있으며 추론하고 논리를 사용하는 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 반면에 감성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이와는 다른 능력을 갖고 있는데 여기에는 “자제, 열정, 끈기,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능력”등이 포함된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지능지수보다는 감성지능에 훨씬 더 가깝다. 지혜는 설익은 지성인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법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지혜, 즉 “인생을 항해 하는 능력”을 얻기 해 잠언서 읽기를 시작할 차례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생을 항해 하는 능력”인 지혜를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잠언서의 저자들은 말하는가? 잠언서는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말하고 있음에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왜 그럴까? 그것은 저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몰랐었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언약신앙의 원칙을 실제 삶 속에 적용시켜 가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시 말해 우리 삶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과의 언약적 존재로서의 우리가 그 언약을 적용시켜 나아감에 대한 구체적인 방침들을 주신 것이 잠언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잠언서 속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표출되어지는 지혜로운 삶, 즉 수직적 차원의 대신관계(對神関係)가 있는 반면, 다른 사람들이나 자연세계와 맺는 수평적 차원의 대인관계 (對人関係)가 함께 제시된다. 그런데 이런 개인대 개인의 수평적 생활방식도 세상적인 삶의 지혜들을 단편적으로 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과 율법의 맥락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적으로 신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잠언서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의 지혜라는 면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의 지혜를 언약적인 면에서 배울 수 있고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잠언서의 저작자와 연대>
잠언서는 각기 다른 시대의 저작자들이 각기 다른 시대에 쓴 수많은 잠언들의 모음집이다. 솔로몬(1:1; 31:10-31)과 아굴(30:1), 르무엘 왕(31:1), 그리고 지혜있는 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집단(22:17; 24:33)이 언급되는데 솔로몬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이름이 알려진 저작자나 수집자는 솔로몬과 히스기야 시대의 신하들이었다. 아마 잠언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저자겸 수집자는 솔로몬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지혜는 세상의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지혜를 훨씬 초월했고(왕상4:29-31), 그는 3,000잠언과 1,005편의 노래를 지은 사람이다.따라서 우리는 솔로몬이 지혜의 보고인 잠언의 주요저자이며 수집자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또 하나의 알려진 주요한 잠언 수집집단은 히스기야 시대의 신하들이다(25:1). 그들은 왕궁의 후원을 받은 히스기야 시대의 서기관들이었는데 그들의 사역은 각별했다. B.C722년에 북왕국이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하면서 남유다의 문학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북왕국의 멸망이 남왕국의 존립에도 영향을 크게 미치는 상황에서 개혁자 히스기야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것을 인식하고 이것은 당연히 실제 생활에 대한 강력한 강조가 수반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히스기야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과 사람앞의 올바른 관계성을 지목한 신앙적인 가르침을 수집하고 가르쳤음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잠언서는 단순한 격언의 모습이 아니라 상당히 실제적이고 신앙적인 삶의 정황을 그리고 있다는 볼 수 있다. 이렇듯 솔로몬이 성경에 있어서 제1차 지혜운동을 전개했다면 히스기야가 제2차 지혜운동을 전개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잠언서의 구성>
잠언을 조금이라도 자세히 일어보면 크게 두 분분으로 나누어 짐을 보게 된다. 1-9장은 주로 긴 연설형식의 강화들인데 반해 10-31장은 짧은 형식의 잠언들의 모음이다. 사실 전반부인 1-9장인 격언격인 잠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2:1-22의 긴 강화는 격언이 아니라 지혜의 길에서 얻는 유익을 말하고 있고, 5:1-23은 음녀를 파할 것을 권고하는 긴 문장이다.
이렇듯 1-9장까지는 17개의 긴 강화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에 10-31장까지의 후반부는 주로 2행 형식의 시와 같은 격언으로 구성된다. 예를 들면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10:9). 이렇듯 10-31장의 잠언들은 2행으로 구성된 진리로 배열되어 있다(물론 드물게 4행,6행,8행으로 나타나기는 해도 주류는 2행시이다.).
그렇다면 전반부(1-9장)와 후반부(10-31장)의 관계는 어떠한가? 어떤 신학적인 조직이 존재하는가? 만약에 우리가 이 책의 2/3를 차지하는 후반부의 수백개의 독립된 격언들과 갑자기 맞닥뜨리게 되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드넓게 펼쳐진 자갈투성이의 해변을 헤쳐 나아갈 때처럼 방향감각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의 잠언들은 아무런 체계 없이 내 뱉어진 교훈이 아니라 정밀하게 조직된 신학적 방향에 의해서 전개되는 성도들의 삶의 원칙들이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잠언이라 할 수 없는 1-9장의 긴 강화들은 실제적인 잠언들인 10-31장에 대해 해석의 틀을 마련해준다고 보면 틀림이 없다. 쉽게 말해 10장 이후의 “광대한 격언들의 해변”에 도착하기 전에 우리는 감사하게도 읽기 쉬운 아홉장을 통해 후반부 잠언들의 해석을 위한 안내서를 만나서 읽게 됨으로 바른 잠언읽기에 몰입할 수 있다.
<잠언서의 내용>그렇다면 전반부인 1-9장에서의 교훈은 무엇인가? 인생의 길을 찾는 구도자들에게 우리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주지시킨다. 바른길, 곧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과 그른 길, 즉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잠언서에는 독자를 젊은 남자성인으로 상징화하였다. 그렇다면 그가 인생길을 가면서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인물은 누구인가?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밀 여인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가 만날 수 있는 여인은 지혜여인(9:1-6,11)이거나, 우매여인(9:13-18)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여인들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무엇을 드러내기에 잠언서 전체를 결정하는 해석의 틀로 작용하는가? 두 여인 모두 젊은 남자들을 식사와 교제의 자리로 초대한다. 고대근동의 문화에서 누군가와 식사를 한다는 것은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지혜여인과 우매여인은 모두 젊은 남자를 식사의 교제자리로 초대했다. 과연 누구와 식사를 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이 두 여인이 누구를 상징하는지를 알아야 잠언서의 해석의 틀을 바르게 갖출 수 있다. 우선 지혜부터 살펴보자. 지혜의 집은 “성중 높은 곳”에 있다(9:3). 성경이 기록된 당시의 높은 곳에는 신전이 있었다. 이것은 고대 근동지역의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빈대떡처럼 평평한 지역에 살았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까지도 지구라트라라는 피라미드식의 사원을 세웠거나 인공적으로 산을 만들어 그 꼭대기를 신의 거처로 삼았다.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이 사본산에 거한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역시 성전을 시온산에 세우라고 지시하셨다. “성중 높은 곳”이란 집의 위치로 볼 때 지혜여인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매여인 역시 그의 집이 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9:10). 다시 말해 우매여인은 하나님 이외에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우상신들을 말한다. 이 두 여인 즉 지혜의 여인으로 의인화된 여호와 하나님과 우매의 여인인 주변의 우상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향해 식사에 참여해 교제를 나누자고 요청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잠언1-9장을 읽으면서 독자는 잠언을 계속 읽어 내려가기 전에 반드시 한가지 선택을 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누구와 식사를 할 것인가? 이것은 실로 “여호와 하나님인가 아니면 열방의 거짓 신들인가?”하는 선택임을 알게 된다. 먼저 이 두 가지 대안(지혜여인 VS 우매여인)속에서 선택이 바로 되어야만 그 뒤에 나오는 개별 잠언들이 바르게 삶속에 작동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단 1-9장의 프리즘을 지나고 나면 그 이후의 개별 잠언들이 “그저 듣기 좋은 충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바른 선택을 한 사람들이 걸어야 할 실제적 지침임을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이제 10장부터 본격적인 잠언들이 시작되는데 이들은 짧고 독립적으로 쏟아 부어진다. 잠언부분인 10-31장은 다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지는데 첫째로 일반의인들(개인)을 교훈하는 잠언들(10-24장)과 지도자들을 다듬으시고 교훈하시는 부분(25-31장)으로 구별된다. 1-9장에서 지혜의 근원되신 여호와하나님 경외함을 원칙으로 선포했다면, 10-24장에서는 이 지혜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죄악된 행실을 물리칠 계명의 수용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지혜의 근원이 되신 하나님께서 죄를 멸시하심으로 인해서 그를 따르고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기로 결정한 지혜로운 의인들은 죄를 멀리할 것을 훈계한다. 다시 말해 함께 식탁에 참여하기로 작정한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훈의 잠언들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그들의 존재의미를 완성하는 길로 인도하신다. 이렇듯 잠언서 1-9장의 프리즘을 통과한 후 10장 이후를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창조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의 모습을 선명하게 목도하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갈 때 어떠한 유익이 있는가? 잠언서는 이러한 의로운 삶이 즉각적이고도 확고부동한 축복을 보장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의인들은 악인의 번영(24:1)이 난무하는 세상속에서 살아가지만, 이런 상황속에서 의인에게 임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축복이 아니다. 오히려 불의한 상황과 실패속에서도 일어나서 다시금 주님과 식탁교제를 함으로 하나님이 법을 진실함속에 삶속에 뿌리를 내리고자 분투하는 용기와 능력을 힘입는 특권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가 지혜여인으로 은유된 하나님과 식탁교제를 통해 하나님과의 긴밀한 동반자됨을 선택했다면 설령 악인의 번영과 의인의 고난을 보더라도 하나님과의 그 교제로 인해 만족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식탁교제를 승인하고 우리의 전 인격과 전생애를 하나님께로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다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잠언의 내용(25-31장)은 지도자들을 다듬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다. 25:1은 잠언서 25-29장에 속한 자료모음을 히스기야 시대(주전715-687년)의 작품으로 소개한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히스기야왕은 자신의 통치기간 동안에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려 부단히 노력했던 인물이다(왕하18-20장, 사36-39장). 그러므로 지혜는 개인뿐 아니라 민족으로 하여금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이끌 책임을 맡은 지도자들의 삶속에서도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25-29의 내용이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히스기야왕의 서기관들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30-31장의 자료도 두 지도자들의 잠언으로 소개된다. 아굴과 르무엘 왕이다. 무엇을 발견하는가? 우리가 잠언을 읽을 때 한 개인의 신앙적 성숙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계시의 말씀을 읽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지혜롭고 신실하고 의로운 무리를 창조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 공동체의 건전함을 추구하신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개별적인 삶에 충실해야 되지만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 땅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벧전2:12) 이 땅에 거룩한 소망을 이야기하고 이 시대를 이끌어갈 복음의 함량이 충실한 지도자의 반열에 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잠언 1-9장으로 돌아가 우리 주님과의 식탁교제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삶에 있어서 우매여인의 자리가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이 시대의 우매여인은 바알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보다 더 중하게 여기는 다른 어떤 것들이다. 돈, 권력, 쾌락, 중독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우상 뒤에는 인격적 존재인 사탄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이제 우리는 누구와 함께 식탁을 함께할 것인가? 왕 같은 제사장의 품격을 지나고 살도록 손을 잡고 이끄시는 예수님과 함께 먹을 것인가? 아니면 욕심의 발로를 부추기는 사탄과 함께 식사를 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인생 끝까지 고민해야 할 숙제이고 매일 같이 다짐할 고백이 아닌가?
이연재 목사(라이드예수마음교회 담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