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광현 목사의 성경인물 이야기
여성의 지혜로 남성의 힘에 맞서라, 다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따’는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의 한 조사에서 어른들의 직장 사회에서도 왕따 현상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많은 성인들이 왕따를 당하고 왕따를 당하는 사람이 퇴사에 이르기까지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굳이 통계자료를 제시하지 않아도, 남성에 비해 왕따를 당하는 여성들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새삼스럽게 문제되는 일이겠는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들이 따돌림 받는 일이 이제야 표면에 드러났을 뿐이지, 그 사실을 새삼 확인해야만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 사회 공론의 영역에 드러난 여성들의 따돌림 현상은 각양각색이다. 심한 스트레스로 만성위염 같은 육체적 질병의 고통을 호소하는 직장 여성들이 부지기수다. 평범한 직장 여성 또는 ‘아줌마’들이 이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는 현상은 정말 헤아릴 수 없다. 출세한 여성들에게도 그 따돌림과 질시는 예외가 되지 않는다. 여성학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던 어떤 여교수는 복장을 이상하게 하고 다닌다는 둥 컴퓨터 타수가 느리다는 둥, 학생들의 출석을 잘 부르지 않는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해직되었다가 여성계의 성원(‘성원’ 이 아니라 사실은 ‘가열한 투쟁’)으로 복직된 경우도 있다. 국민의 정부 시절 처음으로 등장한 청와대의 여성 대변인에 대한 한 언론의 평 또한 가관이다. ‘신선함은 있으나 아무래도 무게가 떨어진다.’는 평이다. 아마도 비슷한 처지의 남자였다면 사뭇 그 평가가 달랐을 것이다. 예컨대 ‘패기만만하지만 아무래도 경륜이 부족하다’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남성 중심 사회에서 완전히 포위되어 음으로 양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여성들의 처지를 어찌 감히 남성들이 헤아릴 수 있을까? ‘그게 현실 아니야? 여자들이 야근할 수 있어, 당직할 수 있어?’하며 자신들의 안락함에 추호도 손상을 입지 않으려는 태도를 뻣뻣하게 지키는 남성들은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 여성들의 현실에 공감하는 남성이라도, 여성들이 체감하는 현실과 꿈꾸는 세계에 대한 상상력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예컨대 ‘화려한 싱글’을 꿈꾸는 여성들을 다룬 영화 <싱글즈>는 마치 주인공들이 그 꿈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마무리한다. 보나마나 뻔한, 구차한 여성들의 현실을 다루기가 미안해서였을까?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이리저리 치이는 구차한 삶을 겪는 여성들은 도대체 어떤 꿈을 꿀까? 성경의 주인공 다말 이야기는 그 구차함을 강요하는 남성들의 음모를 통쾌하게 뒤집어엎는다.
성(聖)스러운 성경 안에 성(性)스러운 이야기
성경 창세기에는 족장 시대 마지막 거인 요셉 이야기가 장황하게 이어지는데, 그 중간에 느닷없이 해괴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야곱의 손부이자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에 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현대적 상식으로는 말할 것 엾˙거니와, 고대 세계의 상식에 비춰 봐도 해괴한 이야기였다. 고대의 신화적 세계상이 오늘날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것은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의 상식 에서도 어긋났던 것이 틀림없다. 형이 죽으면 그 아우가 형수를 아내로 취하도록 한 시형제결혼법을 전제하더라도, 며느리가 시아버지와 동침해 아이를 낳은 사건은 당시 사람들에게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다는 것을, 그 이야기 자체가 증언하고 있다. 사창가를 찾는 남성들의 행위는 오늘날에도 공공연한 비밀이자 상식으로 통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사실을 공공연하게 거들먹거리지는 않는다. 더욱이 상처한 남정네의 고충을 이해한다하더라도 말이다. ‘창피당할 짓을 했다’는 유다 스스로의 고백이 시사하듯, 고대 사회에서도 그런 사정은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그 민망한 사실을 서슴없이 드러낸다. 며느리 가 ‘창녀 짓’을 하여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었다니 해괴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죽은 남편의 형제가 아니더라도 그 친척이 과부가 된 여인을 거두어들일 수 있기는 했다. 예컨대 룻이 죽은 남편의 친척 보아스와 결혼한 경우이다. 이런 경우를 보면, 다른 아들마저 없는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거두어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말 이야기에서 그런 가능성은 제시되지 않는다. 다말 이야기는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동침한 사건을 확실히 민망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그 민망한 사건을 버젓이 전하고 있으니 이 이야기는 확실히 해괴하다. 이렇게 거룩하지 못하고 음란한 이야기가 왜 갑자기 한창 진행 중인 요셉의 이야기 가운데 끼어들었을까? 당시 사람들의 통념으로도 쉽사리 용납되지 않는 추문을 전하는 이야기가 거룩한 성경 안에 끼어든 사연은 무엇일까? 이 이야기는 분명히 요셉의 이야기와는 독립되어 떠돌던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유다 정통 왕가의 계보상 누락될 수 없는 인물인 유다의 비중 때문에 간과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피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전승에 남아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모든 가문들 가운데 종가의 정통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이었다면 굳이 당시 사람들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 사실을 덕스럽지 못하게 끼워 넣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 사건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살짝 덮어두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요셉 이야기의 흐름에 걸리적거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이 해괴하고 추잡한 이야기에 담긴 뜻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남성들의 음모를 무너뜨린 역전의 주인공
끼어든 위치로 보아 이 이야기는 남성들로 이어지는 정통 계보상의 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기구하지만 억척스러운 한 여성이 사실상 주인공 역할을 하는 극적인 드라마이다. 이 이야기는 아주 확고한 가부장적 질서를 전제하지만, 오히려 그 질서와 가치관을 까발려놓고 뒤집어엎는 역전의 드라마와도 같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어떻게든 한사코 배제하려 하지만, 거꾸로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최종적인 승자가 되는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도 남성들과 그 체제가 즐겨 쓰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 체제의 허울을 벗겨낸다. 유다의 첫아들 엘이 죽자 그 아내 다말은 과부 처지가 된다. 엘이 어떤 사연으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경은 다만 그가 악했으므로 하나님이 죽게 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남성들의 ‘악한’ 음모를 시사하려는 표현이 아닐까? 시형제결혼법에 따라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이 과부가 된 형수를 아내로 맞아 그 죽은 형의 대를 이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악한 짓을 하고 만다. 오난은 형수와 동침은 했으나 그때마다 형의 아들 낳기를 거부해 정액을 쏟아버리고 만다. 오나니즘(Onanism)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왜 그 짓이 악하다는 것일까? 그 행위가 악하다는 것은, 질외사정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저의가 악하다는 것이다. 오난은 형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주기를 거부했다. 대를 잇는다는 것은 재산, 곧 땅의 소유와 직결된다. 형수 다말에게 아들을 낳아주는 것은 형의 땅을 보전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 땅은 새로 태어날 아들의 땅이 되며 동시에 다말의 땅이 된다. 그것을 거부한 오난의 저의는 분명하다. 임자 없는 땅이 된 형의 땅마저 자신의 땅으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 혼자 재미만 보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오난의 저의는 불순하기 짝이 없다. 결국 오난은 신의 저주를 받아 죽고 만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다말은 유다의 셋째 아들 셀라에게서 죽은 남편의 아들을 낳아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아버지 유다가 문제였다. 유다는 셋째 아들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다말을 친정으로 내보낸다. 임시적 조처라 했지만, 사실상 영구적 조처였을 것이다. 두 아들이 죽어나갔으니, 그 아들들을 죽게 한 다말은 살이 낀 여자라고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유다는 셀라도 그 형들처럼 죽을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하나 남은 아들마저 그 살이 낀 여자 때문에 죽어버린다면 어찌되겠는가? 자신의 대는 거기서 끝나고 만다. 그래서 유다는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다말과 짝지어주지 않았다. 친정으로 돌아가 있으라는 것은 스스로 포기하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다말은 그렇게 남성들에게 농락당하고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혼자 당하고 분을 삭이며 세월을 보냈더라면 다말이라는 여인의 이름은 기억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제 농락당한 다말의 대반격이 시작된다. 다말은 창녀 행세를 하고 상처한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한다. 유다는 길거리의 창녀로 알았을 뿐 자기 며느리이리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다말과 잠자리에 든다. 다말은 용의주도하게 유다를 옭아맨다. 화대로 염소 한 마리를 약속받았지만, 그것을 받기 전까지 담보물을 내놓으라 한다. 도장과 허리끈과 지팡이가 그 담보물이었다. 기가 막힌 담보물들이다 도장은 남성적 질서의 상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주의 도장이 꽝 찍혀야만 가족 관계의 일이 최종 재가를 받았다. 허리끈은 남성적 힘의 상징이다. 오늘날 남성들의 농담 가운데서 허리는 ‘남성’을 상징한다. 허리 아프다고 말하면 대번에 ‘너 큰일 났다’고 동정을 받는다. 지팡이는 권위의 상징이다. 요즘에야 몸이 불편한 노인들의 보조 장치 정도로 생각하지만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그것은 확고한 권위의 상징이었다. 지팡이는 아무나 누구에게든 선물하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가 원로들에게 주는 선물로, 위계적 질서와 권위를 상징했던 것이다. 신사도의 상징도 지팡이가 아닌가? 한마디로 말해, 남성들에게 농락당한 여인 다말은 그 모든 남성적 힘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 남성들을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이다. 자기를 밀쳐냈던 그 모든 남성적인 힘을 무력화시킨 다말의 지혜다. 도리 없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담보물로 내맡겼던 유다는 친구를 통해 약속한 염소 한 마리를 보내고 그 담보물들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창녀는 그 길거리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망연자실해진 유다는 “가질 테면 가지라지.” 하고 포기하지만, 끝내 자신의 위신마저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자신은 약속을 지키려 했지만 당사자를 찾을 수 없어 지키지 못했다고 위안을 삼지만, ‘까닥하다간 창피만 당하겠다.’고 푸념한다. 그런데 석 달쯤 지난 뒤에 민망한 소문이 떠돈다. 자기 며느리 다말이 창녀 짓을 하여 아이를 뱄다는 소문이었다. 사실은 내쫓은 며느리였지만 아직 자기 가문에 속해 있는 며느리가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짓을 한 사실을 알고 유다는 노발대발한다. 당장 화형에 처하라고 외쳤다. 이 얼마나 뻔뻔한 남성들의 위선인가! 시아버지가 노발대발하는 바로 그 순간에 현명한 여인 다말은 유다가 맡긴 담보물들을 내놓는다. “저는 이 물건 임자의 아이를 배었습니다.” 통쾌한 역전의 순간이다 기세등등했던 유다는 결국 모든 것이 자신의 죄과임을 깨닫고 며느리 앞에 승복한다. “그 아이가 나보다 옳다!” 결국 다말은 쌍둥이를 얻는다. 그 사실은 다말이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전혀 손상당하지 않고 고스란히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들이 그렇게 밀쳐냈음에도 다말은 오히려 그 남성들을 부끄럽게 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몫을 찾는다.
밀려난 이들의 지혜
이 이야기는 길이길이 기억되었고, 그 주인공의 이름은 당당히 유다 정통 왕가의 계보에 기록되었다. 유다 왕가 족보에 기록된 이례적인 세 여인 가운데 다말은 그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남자들이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들이라고 했다. 그 말이 남성들의 지배를 받는 여성의 현실을 호도하는 사탕발림이라면 마땅히 되뇌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남성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와 전혀 다른 여성의 지혜를 이르는 말이라면 다시 되새겨봄직하다. 남성들의 세계에서 볼 때 다말은 매우 도발적이다. 어떻게 그런 민망한 짓을 서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혜로운 여인 다말은 자신이 빼앗긴 땅을 되찾고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전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오히려 남성들을 민망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남성들의 법칙은 무력하게 되고 만다. 여성들은 남성들의 시선에 또 얼마나 주눅 들어 있는가? ‘아서라, 그러다가는 큰 코 다친다.’ 남성들은 끝까지 자신들이 정해놓은 질서 안에서 여성들이 고분고분하기를 바랄 뿐이다. 다말의 이야기는 그 시선에 주눅 들어 있는 한, 여성들이 남성들의 세계에서 얻어갈 것이 없다는 것을 웅변해준다. 이것이 다말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다.
한광현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