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5월 20일, 이스라엘의 군인•정치인 모세 다얀 / 모셰 다얀 (Moshe Dayan, 1915 ~ 1981) 출생
모셰 다얀 (Moshe Dayan, 1915년 5월 20일 ~ 1981년 10월 16일) 은 이스라엘의 군인이다. 1929년, 농민 자위대에 들어가 반영 운동에 참가하고, 1939년에 지하 활동 중에 체포되어 약 2년간 감옥살이를 하였다. 1941년 석방되어 프랑스 비시 정부 때 시리아 진공 작전에 참가하여 한쪽 눈을 잃었다.

– 모세 다얀 (Moshe Dayan)
.출생: 1915년 5월 20일, 오스만 제국 아크라
.사망: 1981년 10월 16일 (66세), 이스라엘 텔아비브
.배우자: 레이첼 다얀 (1973 ~ 1981년), 루스 다얀 (1935 ~ 1971년)
.자녀: 아씨 다얀, 야엘 다얀, 에후드 다얀
.소속: 하가나, 영국 육군, 이스라엘 방위군
.정당: 이스라엘 영토 노동당, 라피당, 이스라엘 노동당
.이스라엘 군 복무기간: 1929 ~ 1974년
.근무: 이스라엘 육군
.최종계급: 알루프
.지휘: 참모총장, 남부사령부, 북부사령부
.참전: 제1차 중동 전쟁, 수에즈 위기, 6일 전쟁, 욤키푸르 전쟁
*이스라엘의 5대 외무부 장관
.임기: 1977년 6월 20일 ~ 1979년 10월 23일
.전임: 이갈 알론 / 후임: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의 4대 국방부 장관
.임기: 1967년 6월 5일 ~ 1974년 7월 3일
.전임: 레비 에슈콜 / 후임: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의 7대 농업부 장관
.임기: 1959년 12월 17일 ~ 1964년 11월 4일
.전임: 카디시 루츠 / 후임: 하임 즈바티
*이스라엘의 4대 참모총장
.임기: 1953년 ~ 1958년
.전임: 모데차이 마클레프 / 후임 : 하임 라스코프
제 1차 중동전쟁 (이스라엘 독립전쟁/팔레스타인 전쟁) 때 이스라엘 군의 예루살렘 총사령관으로 활약하였다.
1953 ~ 1959년 이스라엘 총참모총장을 지냈었고, 제 2차 중동전쟁 (수에즈 전쟁) 당시 시나이반도 전 사령관으로 아랍 연합군에 대승하였다.
1959년 이스라엘의 좌익 정당인 마파이당에 입당했으며, 각종 시온 사회주의 운동, 노동운동에 관여하다가, 벤구리온 내각에서 1967년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1973년 제 4차 중동전쟁 (10월 전쟁 / 욤 키푸르 전쟁) 때의 전세 회복 지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77년 메나헴 베긴 내각의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가 1980년 사임하였다.

○ 생애 및 활동
팔레스타인 갈릴리 근방의 ‘데가냐’ 키부츠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우크라이나 (당시 러시아 제국) 자시키우 (Жашків, Zhashkiv) 출신의 유대인 이민자였다.
1929년 농민 자위대에 들어가 반영 운동에 참가하고, 1939년 지하 활동 중에 체포되어 약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1941년에 석방되어 비시 프랑스 정부 때 시리아 진공 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이때 한쪽 눈을 잃었다.
그가 쌍안경으로 적장을 살피고 있을 때 총탄이 날아와 쌍안경을 치면서 깨진 유리조각과 철제 파편이 왼쪽 눈 속을 뚫고 들어가 의안을 넣을 뼈대조차 없는 중상을 입혔던 것이다.
이후 왼쪽 눈을 감싼 검은 안대는 모셰 다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1948년 5월 마침내 영국군이 철수하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을 때, 모셰 다얀은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요르단 계곡을 방어하는 임무를 받아 수적으로 우세한 시리아 군을 물리치고 자신의 고향 데가냐를 사수했다. 석 달 뒤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휴전협정 조인을 위한 협상에 참여해 군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가로서의 자질도 발휘한다.
제1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이었지만 국가의 기틀, 특히 저마다 출신 배경이 각양각색인 이스라엘 방위군 (IDF)을 재정비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는 1953년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직에 올랐다. 오를 당시 38세로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 참모총장이 된 그는 대대적인 군 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젊고 공격적인 장교들을 파격적으로 고위 지휘관에 임명하였다. 또한 기갑부대와 공수부대 등 실제 전투를 치루는 공세적 성격의 부대들을 강화해 나가는 반면, 행정과 지원부대 등의 군살은 빼나간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바로 나타나는데, 1967년 6월 5일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승리로 입증이 되었다. 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다얀은 총참모장 이츠하크 라빈 등과 함께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의 압도적인 병력 포위를 공군력과 기갑 전력을 동원한 선제 기습으로 분쇄했고,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 등을 점령하여 기존 영토에 대한 완충지대를 확보했다.
1969년 레비 에슈콜 총리가 급사하자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이스라엘 노동당의 반대를 받았고 부총리 겸 이민장관 이갈 아론과의 갈등으로 인해 골다 메이어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줘야 했다. 허나 국방장관으로 누구보다도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고, 골다 메이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에도 국방장관에 유임되었다.

그러나 6일 전쟁의 최고 영웅은 엄밀히 말해서 이츠하크 라빈이었고 국방장관에 임명된 지 4일밖에 되지 않았던 다얀은 솔직히 말해서 숟가락 얹은 면이 강했다.
그리고 다얀은 자신의 군사적 업적과 이스라엘 정보기구의 능력에 도취되어 아랍 국가들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군 일선의 모든 경고를 무시했다.
그 결과,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10월 전쟁/욤 키푸르 전쟁)에서는 이집트, 시리아의 침공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적 기습에 대한 초기 대처의 실패와 전세 회복 지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77년엔 메나헴 베긴 내각의 외무부 장관이 되었는데, 이때 이집트와의 평화 협상 작업에 착수,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과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그 뒤 1980년에 수상 베긴과 심하게 대립하다가 대장암에 걸려 건강이 악화되어 사임하였고, 1981년 66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 가족
가족으로는 첫째 부인 루트 다얀에게서 낳은 2남 1녀와 두 번째 부인 라헬 다얀이 있다.

참고 = 위키백과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