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호 목사의 컬쳐 스테이지(Culture Stage)
대작인가? 창작인가?
-조영남의 ‘그림 대작(代作) 사건’ 을 바라보며
보는 것은 좋아하지만 정말 소질이 없었던 과목이 미술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미술 숙제를 한 번도 제대로 완성한 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때로는 친구가 때로는 동생이 제 작품의 완성을 위하여 헌신(?) 하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머릿속에서 있는 무언가를 눈에 보이는 실재로 만드는 작업은 결코 싶지 않았습니다. 생각은 이렇게 했는데 나온 작품은 저렇게 나오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그래도, 그림을 보는 것을 좋아해서 가끔 미술관에 가기도 했습니다.
요즘 방송인 조영남의 ‘그림 대작(代作) 사건’으로 미술계가 시끄럽습니다. 조영남은 조수가 그려준 화투 그림을 자신의 작품처럼 팔았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까지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현대미술에서 대작과 창작의 한계가 어디까지냐에 대한 논란이 뜨겁게 일고 있습니다.
사실 대작 논란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제자 마성린은(1727∼1798)은 ‘안화당사집’이란 문집에서 “선생님의 제자로 10년 있었는데 하도 대필을 많이 시켜 힘들어서 그만두었다”는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힘이 들긴 했나 봅니다.
사실 조선시대 화가 중에 정선만큼 다작을 남긴 작가도 드물것입니다. 그만큼 수요가 있었다는 증거이고 대필 논란의 대표적인 작가가 된 것입니다. 마성린뿐만이 아니라, 정선의 진경산수 화풍을 물려받아 ‘정선파’로 분류되며 거의 정선 작품과 흡사한 그림을 그린 일부 제자들도 대필 의혹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정선이 남긴 수백 편의 그림 중에 ‘인왕제색도’처럼 작품성이 뛰어난 것과 그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작품이 혼재하는 등 굴곡이 심한 것도 그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정선과는 조금 다른 형태이기는 하지만 단원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1713∼1791)은 대나무 그림 주문이 밀리자 목판을 만들어 그림 대신 찍어 주었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아마도 공장형(?) 구조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구한말의 김준근은 풍속화가로 이름을 날렸는데 외국인들의 주문이 밀리자 아예 공방을 차리고 그림을 대량 생산하며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갔다고도 합니다.
서양에서도 대작으로 의심받을 만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루벤스(1577∼1640)입니다. 루벤스는 여러 화가를 기용해 스케치를 그린 후 옮기는 작가, 얼굴만 그리는 작가, 옷을 그리는 작가 등으로 분업체계를 만들어 운영을 했다고 합니다. 루벤스는 유화만 무려 3000여 점이 돌아다닌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릴 때 제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은 중세 때부터 일반화된 방식이지만 루벤스의 경우는 중세 도제식 공방을 공장식으로 운영했다고 합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대형 조각이나 설치미술, 팝아트의 경우에는 아예 공공연히 조수와의 협업 사실을 밝히기도 합니다. 앤디 워홀은 자신의 작업실을 ‘공방(workshop)’이 아니라 ‘공장(factory)’이라고 불렀고, 데이미언 허스트는 무려 100여 명의 조수를 두고 작업을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미술작품을 건축물처럼 보고 아이디어와 설계를 제공합니다. 그러면 공장의 작업자들이 작품을 완성하는 식이었습니다. 인도의 조각가 애니시 커푸어가 대형 창고 건물에서 수십 명의 조수와 함께 조형물을 만드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는 미켈란젤로(1475∼1564)가 대형 벽화를 그릴 때 조수 10여 명의 도움을 받은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작가가 직접 붓을 들지 않아도 적어도 현장에서 관리 감독을 하며 자신의 계획을 작품에 반영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럼,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조영남의 경우는 어떨까요? 화단에서는 일단 조영남의 작업은 과거의 도제 공방식 작업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작가의 관리 감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인이 그린 그림을 배달받은 것은 ‘작가와 조수의 협업’이라는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은 그림 도매상(?)의 모습과 더 흡사하다고 하겠습니다. 조영남이 ‘미술계의 관행’이란 표현을 썼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조영남의 화투 그림을 복제와 대작이 횡행하는 팝아트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면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평면회화가 작가의 ‘손맛’에 의해 완성되는 작품이라면 팝아트는 ‘생각으로 만드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작가는 일종의 기획자가 됩니다.
미술평론가 최열은 “조영남의 화투 그림은 순수 회화라기보다는 팝아트에 가깝기 때문에 비록 대작을 시켰더라도 그의 창작으로 봐야 한다”며 “본인이 기획, 설계한 작품이라면 분명히 그의 창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조수를 혹사시킨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많습니다. 그동안 조영남의 태도를 되돌이켜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순수 평면회화를 잘 그리는 사람처럼 포장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가수와 화가를 합친 ‘화수(畵手)’로 불러달라고 했으며 화투 그림이 독창적인 자신의 화풍이라고 알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림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도 그림 솜씨가 뛰어난 가수로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명옥 한국미술관협회 회장은 “그 같은 조 씨의 이중성 때문에 설령 그의 그림이 팝아트 계열로 분류된다고 하더라도 많은 미술인과 대중의 공분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조영남의 대작 사건에 대해 대체로 미술계가 일치된 시각을 보여주는 것은 ‘검찰 수사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도덕이나 윤리 차원에서 다뤄야 할 문제를 검찰이 수사선상에 올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습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미술이론과 교수는 “현대미술에서 창작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논의 자체가 진행 중인 상태에서 조 씨 문제는 이를 방임하고 유통시킨 시장에 먼저 책임을 묻고 시장이 해결하도록 기다렸어야 한다”며 “검찰이 너무 성급하게 수사에 나선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만화계(웹툰계)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네이버에 연재 중인 최고 인기 만화 ‘고수’는 국내에서만 200만 부 이상 판매되며 무협만화의 한 획을 그은 ‘용비불패’의 류기운(글), 문정후(그림) 콤비의 작품입니다. 매주 수요일에 업데이트되는 ‘고수’의 타이틀을 보면, 류기운(글) 문정후(그림) 아래에 문명주, 한병훈이라는 두 사람의 이름이 병기돼 있습니다
이는 최근 만화계(웹툰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스템과 인식의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펜 작업을 하든, 채색 작업을 하든, 배경 작업을 돕든, 어시스턴트도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는 스태프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영화 엔딩 크레디트에 제작진 이름이 올라가듯 이들의 이름도 병기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영남 파문으로 사람들이 흔히 유명 만화가의 작업에 문하생들이 대거 참여해 도와주는 경우를 떠올리지만, 만화계는 이미 그런 시대를 지나 어시스턴트들이 공개적으로 참여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창작이 아이디어와 설계를 제공하는 ‘기획’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제작과정과 분리되기 시작한 현대미술에서는 ‘페인팅’에서의 대작도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과거에도 대작이나 대필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이번 조영남 대작 사건을 계시로 대작과 창작의 경계를 놓고 미술계 안팎에서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일의 결론이 어떻게 나오던지 간에 잘못된 관행은 바로 잡고 새로운 시스템은 잘 정착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창작의 시작은 카피에서 나온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음악도 유명한 곡들을 오랜 시간 카피해서 연습을 하다보면 자신의 색깔을 가진 창작이 나오게 됩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작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힘은 대단합니다. 작가의 땀과 노력의 결과는 작품을 대하는 사람들을 겸손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건을 보며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행보다는 진실함에 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