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선지서 해석(19)
지금은 절개를 구할 때: 호세아서(19)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자꾸 달라 하면 주시겠는가, 주시지 않겠는가. 주실 수도 있고 주시지 않을 수도 있다. 나에게 유익하다 싶으시면 그것을 주시지 않는다. 나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시고 싶으시면 잠시 허락하기도 하신다. 북이스라엘이 왕을 달라 요구하였을 때 (호 13:10) 하나님은 주셨을까 주시지 않으셨을까. 주셨다. 왜 주셨을까.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면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것 같으셔서 주셨을까. 왕을 구한 일이 잘못임을 알게 해 주시려고 왕을 주셨을까. 호 13:11에는 이에 대한 대답이 나온다. “내가 분노함으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사무엘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삼상 8).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 할 때 사무엘이 여호와께 기도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왕이신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이 왕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들어주셨다는 것이다.
왕의 요구와 잡신 숭배가 맞물림
한편 우리는 이스라엘이 왕을 구한 저변에 어떤 마음과 어떤 행위가 있었는가를 추적해 봄이 필요하다. 삼상 8장에 나타나는 위의 구절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을 바라보면 그 근본 동기가 발견된다.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곧 이스라엘이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그들이 원하는 왕을 세운 것과 그들이 잡신을 숭배한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는 사실이다. 사무엘 때의 이러한 정황에 비추어 호세아 선지자의 시대의 정황을 생각해 보라. 호세아 시대에는 어떠했을까. 사무엘 때와 하나도 달라진 점이 없다. 호세아 시대에도 이스라엘이 왕을 구한 행위는 잡신 숭배와 꽉 맞물려 있었다. 왕을 구한 내용의 언저리에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13:1-2)와 애굽에서 구원하신 야웨를 버리고 잡신 숭배 (13:4)했음이 명시적으로 암시적으로 강조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호세아 당시의 왕들 (특히 여로보암 2세)은 이스라엘이 세웠지만 여호와께로서 세우심을 입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8:4).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 (특히 아합)이었고, “오만한 자들과 더불어 악수” (7:5)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왕에 대한 요구는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1) 먼저, 이스라엘이 왕이신 하나님을 버림, (2) 이스라엘이 욕심에 이끌려 잡신 (우상들)을 섬김, (3) 이에 더해, 자기들이 원하는대로의 세상적 왕을 구함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촉발시킴, (4) 하나님이 진노하심으로 그들의 욕심의 기도를 들어주심, (5) 자의적 왕은 세워져 기도 응답은 받았지만 그것은 곧 이스라엘에게 심판으로 작용함, (6) 결국 이스라엘 왕도 망하고 (10:7, 15; 13:11) 백성도 망함 (13:16). 김희보 교수는 이를 다음과 같이 바르게 지적한다.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그 마음과 여기에서 왕을 구하는 그 마음은 그 근본에 있어서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참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떠난 필연적 결과는 우상을 따랐고 왕을 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구약 호세아 주해, 391).
왕을 구한 실제적 동기
그러면 왕을 구한 구체적인 동기는 무엇이었는가. 안으로는 자기들을 다스려줄 자, 밖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대항해 전쟁해 줄 자를 구한 것이었다. 이것도 사무엘 때나 호세아 선지자 때나 다를 바가 없다. 사무엘 때는 특히 블레셋의 공격이 심했고, 호세아 때는 앗수르의 공격이 심했다.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의 위기를 늘 겪으면서 그 절박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줄 왕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마치 인간 왕이 구원해 줄 것처럼 그들이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The ruthless vehemence of Israel’s royal politics was a testimony to their desperate belief that a proper king would save them.” Mays, Hosea, 178). 이는 “네 모든 성읍에서 너를 구원할 자 곧 네 왕이 이제 어디…있느냐?” (13:10)에서 확인된다. 우상숭배자 인간왕이 앗수르의 위협에서 구해줄 수 있는가. 우리가 같은 8세기 선지서인 이사야서를 읽으면 여기에 대한 답이 분명히 드러난다. 먼저는, 아하스도 히스기야도 그 누구도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야웨께서 구원자이심을 우리는 이사야서 (36장이하)에서 확인한다. 둘째는 그 구원자-왕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자가 언약 백성의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왕 제도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신 17:14 이하; 삼상 16), 왕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의 필요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왕인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이 기도하니 하나님은 하루 아침에 십팔만 오천의 앗수르 대군을 치시고 유다에 구원을 베푸신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슬픈 이스라엘 역사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왕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이 없었다. 김희보 교수는 왕과 관련하여 북이스라엘의 슬픈 역사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사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여로보암 1세로부터 마지막 왕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209년간 (931 BC-722 BC), 왕가로서는 전부 아홉 가문, 19왕이 다스렸던 것이다. 그 중에도 5대왕 시므리는 7일 천하로 끝났고, 15대왕 살룸은 1개월로 끝났다 (왕상 16:15, 왕하 15:13). 왕가가 바뀔 때마다 예외 없이 피 흘리는 혁명으로 되었는데 그 횟수는 8회에 이른다.” (구약 이스라엘사, 320이하; 구약 호세아 주해, 390-1)
두 가지 교훈
북이스라엘의 슬픈 역사에서 받는 교훈은 두 가지다. 첫째는, 욕심을 따라 구할 때 받은 응답은 곧 심판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원대로 사울이 세워졌으나 사울도 사울을 구한 자들도 결국 길보아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매일 만나를 주시건만 입맛이 없다고 고기 투정하는 이스라엘에게 메추라기가 트럭으로 배달되었으나 그것은 심판이었다 (키브로트 하타와; 욕심의 무덤들. 민 11; 시 78:26-31). 둘째는, 왕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통령과 정치 지도자들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울 같은 사람, 아합 같은 사람, 므낫세 같은 사람,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는 사람을 세우면 그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백성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잡신숭배자, 성적 방탕자, 알콜중독자를 세우면 그 한 사람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물 위의 거품’처럼 멸망하기 때문이다 (호 10:7).
최영헌 교수 (알파크루시스 신학대학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