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9월 1일, 만해 한용운 (韓龍雲)이 월간지 ‘유심’ (惟心) 창간
월간지 ‘유심’ (惟心)은 1918년 9월 1일, 만해 한용운 (韓龍雲)이 정신문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발행한 잡지이다.
같은 해 12월 1일, 제3호로 종간되었다.
편집 겸 발행인은 한용운 (韓龍雲)이다.
집필진은 대부분 불교도로서, 한용운 (韓龍雲)· 최린 (崔麟)· 최남선 (崔南善)· 유근 (柳瑾)· 이광종 (李光鍾)· 이능우 (李能雨)· 김남천 (金南泉)· 강도봉 (康道峰)· 서광전 (徐光前)· 김문연 (金文演)· 임규 (林圭)· 박한영 (朴漢永)· 백용성 (白龍城)· 권상로 (權相老)· 현상윤 (玄相允)· 홍남표 (洪南杓) 등이다.
현상문예에 김순석 (金淳奭)의 논문 「인생의 진로」, 한용운의 소설 「고학생」 등이 당선되었고, 국여 (菊如)의 소설 「오 (悟)」가 연재되었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 이전의 문학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이룩한 잡지로 평가된다.

– 유심 (惟心)
.대한민국 최초의 불교 월간 교양잡지
.위치: 서울 종로구 계동 43번지 (유심사)
.기간: 1918년 9월 1일 ~ 1918년 12월 1일
.편집 겸 발행인: 한용운 (韓龍雲)
.집필진: 한용운 (韓龍雲)· 최린 (崔麟)· 최남선 (崔南善)· 유근 (柳瑾)· 이광종 (李光鍾)· 이능우 (李能雨)· 김남천 (金南泉)· 강도봉 (康道峰)· 서광전 (徐光前)· 김문연 (金文演)· 임규 (林圭)· 박한영 (朴漢永)· 백용성 (白龍城)· 권상로 (權相老)· 현상윤 (玄相允)· 홍남표 (洪南杓) 등
만해 한용운은 1918년 9월 1일, 불교 교양잡지 ‘유심 (惟心)’을 창간했다. 서울 종로구 계동 43번지에 ‘유심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쇄는 최남선이 운영하는 신문관에서 했다. 1918년 10월에 2호, 12월에 3호까지 발간했다. 이미 ‘정선강의 채근담’과 ‘불교대전’ 등을 발간하면서 출판·언론 사업에 눈을 뜬 만해 한용운이 불교 교양잡지에 도전한 것이다. 한용운이 창간한 불교 교양잡지 ‘유심’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청년들의 교양 증진을 위한 잡지였다. ‘유심’은 국판 60여 페이지의 불교교양지를 표방했다. ‘유심’ 창간호는 1918년 9월에 발간하고, 제2호는 그해 10월, 제3호는 12월에 잇달아 발행된다. 하지만 ‘유심’은 일본총독부의 탄압과 3·1독립만세운동의 준비 등으로 인해 제3호로 중단됐다.

○ 만해, ‘유심’의 근간 ‘민족운동’이 화두
3·1독립운동의 가장 선봉에 섰던 최린은 ‘유심’ 창간호에 ‘시아수양관 (是我修養觀)’이라는 제하의 글을 썼다. 육당 최남선은 ‘동정 (同情)바늘 필요 (必要)잇는 자 되지 말라’ 등 청년의 수양과 나아갈 지표를 제시하는 글들을 발표했다.
만해 역시 △조선 청년 수양 △고통과 쾌락 △청년의 수양 문제 △가정 교육이 교육의근원이다 △과학의 연원 △자아를 해탈하라 △항공기 발달 소사 등의 글을 쓰기도 했다. 모두 시대정신이 적절히 나타난 글들이다. 또한 만해 한용운은 ‘유심’을 단순히 불교교양지가 아닌 종합잡지로 만들 생각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의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유심’에는 특이하게 ‘문예공모’ 코너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유심’ 제3호에는 ‘당선 문예란’을 통해 그동안 응모한 결과를 발표하고 시상했다. ‘유심’은 매호에 걸쳐 보통문, 단편소설, 신체시, 한시 등 4개 분야의 문예 작품을 현상 모집해왔다. 만해는 당시 학생소설 ‘고학생’을 쓴 종로 견지동 118번지의 방정환, 평양 창전리의 김순석을 수상자로 선발했다. 방정환에게는 1원 50전의 상금이, 김순석에게는 50전의 상금이 돌아갔다. 선외 가작 당선자로는 김형원, 박중빈, 철아, 소파생, 이형준, 이영재, 어효선, 김창진, 이중각 등이 선정됐다. 이들은 모두 훗날 한국 사회와 문단에서 높은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로 성장한다. 이들의 성장 계기를 만해 한용운이 발간한 ‘유심’이 만들었다는 것은 문단에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만해 한용운도 ‘유심’을 자유시를 실험하는 장으로도 활용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심 (心)’이라는 작품인데 ‘심 (心)은 심이다’로 시작해 ‘심은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니라’로 끝나는 이 시는 ‘님의 침묵’ 이전의 대표 작품으로 평가되며 만해 한용운의 작품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유심’은 3·1독립운동의 밑거름이기도 했다. 3·1운동 핵심 인사인 최린, 권동진, 오세창, 최남선, 현상윤 등을 필자와 동지로서 인연을 맺게 한 역할을 ‘유심’이 톡톡히 했다. 또한 당시 언론에 반드시 등장하던 총독부 관리의 글을 배제해 민족 주체성을 확고히 보여준 것만을 봐도 ‘유심’의 근간에는 ‘민족운동’이라는 화두가 자리하고 있었다.
전보삼 만해기념관장은 “만해 스님이 ‘유심’을 민족사상지이자 3·1운동 전위지로 발전시키려 했던 점을 주목해야 한다”면서 “‘유심’의 종간 배경이 3·1운동과 직결돼 있었다는 점을 직시할 때, 민족의 정신문화를 선도한 사상지로서의 위치를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만해 스님은 ‘유심’의 언론활동을 통해 세계정세의 흐름과 민족의 앞날을 예견하고 3·1독립 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 만해, 불교계의 ‘독립선언서’배포한 곳
1919년 2월 24일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작교섭을 마무리 지은 최린은 만해 한용운을 찾아가 불교계의 민족대표 참여를 내락 받았다. 천도교계와 기독교계, 불교계 지도자들로 이뤄진 민족대표의 골격이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불교계의 대표로서 한용운은 해인사 승려 백용성만 민족대표로 참여시킬 수 있었다. 유림에 대한 포섭도 한용운의 몫이었다. 거창으로 내려가 영남유림의 대표격인 면우 곽종석을 만나 승낙을 얻었다. 그러나 곽종석은 3월 1일 직전 급환이 생겨 아들 편에 인장을 주어 만해를 찾아가도록 했으나 3·1운동 전야의 민감했던 상황 속에서 만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곽종석은 민족대표로 서명하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이를 분통하게 여겨 뒷날 파리장서 (1919년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낸 사건)를 주도하게 된다. 그리고 불교계의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을 맡은 만해는 2월 28일, 선언서 3000매를 인수해 그날 밤 자신의 거처로 중앙학림 (현 동국대학교) 학생 10여 명을 불러 독립운동에 대한 소신을 알리고 학생들이 담당할 역할을 알려주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종로구 계동43번지 (새주소 계동길 92-3)는 ‘유심사’의 내력 알림판과 함께 ‘유심당’이라는 간판을 달고 게스트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계동 43번지 만해 한용운 옛집은 지금 아무런 문화재도 아니다. 실제 ‘유심사’는 불교계 3·1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2월 28일 밤 만해 스님은 거처 유심사로 학생들을 급히 불러모아 독립선언서의 작성경위와 3·1운동의 의미를 설명한 뒤 선언서의 배포를 부탁했다고 한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만해 한용운의 지도하에 ‘유심회’라는 모임을 운영하던 학생들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집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마땅히 정부나 서울시 등에서 매입해서 만해 한용운을 기념할 수 있는 장소로 활용해야할 것이라는 제언이다. 현재 3·1독립운동의 현장이 대부분 사라진 현실에서 이 조그마한 옛집이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이 관련자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불교와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모두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심사’이지만 제대로 된 표지판이 붙게 된 것도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실제 지난 2012년까지 ‘유심사’임을 알리는 표지석은 종로 계동 43번지가 아닌 58번지 우물터에 설치돼 있었다고 한다.
특히 만해 한용운이 계동 43번지에 거처할 때 쓴 에세이‘전가의 오동 (前家의 梧桐)’을 통해 1919년 당시에는 한용운 옛집 앞집에 오동나무가 있었다. “나의 우거 (寓居)는 계동 막바지의 여두소옥 (如斗小屋)이라, 지면이나 건물로 말하면 심히 협소하여 매우 갑갑할 듯하다. 그러나 그렇게 몹시 갑갑하지 아니한 이유는 지형이 초고 (稍高)하여 비교적 일광을 많이 받고, 공기가 청신하여 청풍이 시래 (時來)하며, 주위에 수목이 있어서 그 양음적취 (凉陰積翠)가 족히 고염 (苦炎)의 번민을 소각 (銷却)하는 까닭이라. 그러므로 협착 (狹窄)한 소옥에서 성하 (盛夏)를 지냈으되 그다지 염열 (炎熱)의 고를 감각치 못하였도다.”

○ 《유심》지에 나타난 시대정신
개화기 한국 잡지는 개화운동의 전위(前衛)로서 근대적인 사상 확립과 근대 문화 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잡지의 탄생은 근대화운동과 더불어 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조국을 수호하려는 구국운동의 일종으로 나타났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무단 정치를 통하여 한국인의 입과 눈을 완전히 봉하는 언론 암흑 정책 시기를 만들었다. 이 기간 동안 《조선불교월보 朝鮮佛敎月報》 , 《해동불보 海東佛報》 , 《조선불교계》 등 몇몇의 종교지가 겨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단 정치의 강압은 오히려 민족 투쟁의 불씨를 일으켰고, 자주 독립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게 하였다.
1919년 기미년 3 1운동의 전위지로서 만해 한용운이 창간 (1918.9.1.)한 이 《유심》 잡지가 갖는 의미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웅변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유심》지는 스님이 발행인이라는 특색 때문에 종교지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사실은 민족의 입과 귀가 되고 눈이 되고자 하는 언론지요, 사상지의 역할을 실천하였다. 이 《유심》지는 단순한 종교지를 탈피하여 민족의 전통 문화지, 사상지, 언론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나아가 3 1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선봉에 섰던 만해 한용운의 세계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형안(炯眼)이 잘 나타나 있다.
만해 한용운은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491번지에서 한응준 (韓應俊)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근대사의 붕괴기인 1879년 8월 29일에 태어나 현대사의 이른 새벽인 1944년 6월 29일까지의 한평생을 통하여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우리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그 중에서도 기미년 3 1운동은 이 민족의 자주 독립을 외친 쾌거이자, 민족의 저력을 다시 한번 세계 만방에 유감없이 표현한 대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만해는 세계사의 흐름을 어떻에 파악하고 있으며, 그 시대 만해는 무엇을 하였는가를 살피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문제점이다. 그것이 바로 《유심》지의 발행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열려고 애썼던 만해의 역력한 모습에 답하는 길일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이미 그 이전에 《조선불교유신론 朝鮮佛敎維新論》(1913.5.25.), 《불교대전 佛敎大典》(1914.4.30.), 《정선강의채근담 精選講義菜根譚》(1917.4.6.)을 순차로 발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으로 꺼져가는 민족의 혼을 부르는 영혼의 노래를 우리 역사에 남겼다. 1917년 12월 3일 설악산 오세암의 깊은 밤, 좌선중에 홀연히 깨달음의 문을 여니 그때의 벅찬 감회를 이렇게 읊고 있다.
男兒到處是故鄕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幾人長在客愁中 그 몇 사람 객수 속에 길이 갇혔나
一聲喝破三千界 한 마디 큰 소리 질러 삼천대천 세계 뒤흔드니
雪裡桃花片片飛 눈 속에 복사꽃 붉게붉게 피네
이 깨달음의 오도송 (悟道頌)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말하는 ‘고향’이란 어떤 의미일까. 만해 자신의 육신의 고향이라고 보기보다는 나라 잃은 민족의 고향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대장부 갈 길을 뚜렷히 확인하였고, 펄펄 날리는 흰 눈은 일제 무단 정치의 표현이요, 붉은 복숭아꽃은 나라 사랑의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일편단심 (一片丹心)이다. 만족 중생과 더불어 고뇌하는 이웃과 함께 살아가자는 만해의 서원이자, 민족의 대서원이었다. 그러기에 그해 겨울 오세암에서 정진하고 이듬해 봄 (1918.4.) 서울에 왔다. 승려의 한 몸으로 일제 무단 정치의 박해 속에서 민족의 눈과 귀를 열어야 하는 비원을 품었다. 그리하여 민족의 언론지로서, 사상지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이 나라 전통 문화의 창조적인 발전 계승을 목표로 경성부 계동 43번지에 ‘유심사’를 차리고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유심》지를 1918년 9월 1일 창간하였다. 인쇄소는 당시 을지로 2가 21번지의 신문관이었다.

《유심》지의 출현은 암울한 시대의 새로운 서광(瑞光)으로 한 줄기 빛이었다. 그러므로 《유심》지에는 첫째로, 민족 전통 문화의 계승 발전운동이었다.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식어가는 현장에서 민족의 전통 문화를 일으켜 세움은 새역사 창조의 원동력이었다. 한용운은 《유심》지 창간 한 해 전 설악산 깊은 골짜기 오세암에서 오도송을 남기실 때 객수 속에 갇힐 수 없는 이 몸, 한 마디 버럭 소리 질러 삼천대천 세계 뒤흔들고야 말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만해의 처소는 민중의 삶의 현장인 시정의 한가운데일 수밖에 없다. 민족 문화의 창조적 계승 발전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확인시켜주고 있다.
둘째는 3 1운동의 전위지의 수단이었다. 기미 독립운동 후 총독부 법정에서 “서울은 무엇 때문에 왔는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유심》지 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만해는 이 잡지의 언론 활동을 통하여 세계 정세의 흐름을 파악하였으며, 이 민족의 나아갈 바 지표를 확인하고 있다. 이미 이 《유심》지의 필자가 되었던 최린, 권동진, 오세창, 최남선, 임규, 현상윤 등과 세계 사정에 대한 상당한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만해는 여기서 나라 사랑하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적인 글 뿐만 아니라, ‘청년의 수양 문제’, ‘동정받을 자 되지 말라’, ‘가정 교육이 교육의 근본이다’, ‘자기의 생활력’, ‘수양총화’, ‘항공기 발달소사’, ‘과학의 연원’ 등의 글들을 과감히 채택하였던 것이다. 승려가 만든 잡지 중에서 일반 종합 잡지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도 희귀한 예이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이 만해정신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여 준다.
셋째로는, 이 잡지의 창간에서부터 독자와의 호흡을 같이하는 잡지로 현상 문예란을 만들어 계속 홍보하고 있는 일변의 특성을 간과할 수 없다. 《유심》지 제3호 (1918.12.1. 발행)에는 그 첫번째 현상 당선 문예란을 통하여 그동안 응모한 결과를 발표하고 시상을 하였다. 여기에서 학생 소설로, 당시 견지동 118번지의 ㅈㅎ생 (실명: 방정환)의 작품 ‘고학생’과 ‘마음’을 각각 1원과 50전의 상금으로, 평양 창전리의 김순석의 작품을 50전의 상금으로 당선작으로 뽑았다. 그때 《유심》지 3호에 발표된 선외 가작 당선자의 명단을 보면, 김형원, 박중빈, 철아, 소파생, 이형준, 이영재, 어효선, 김창진, 이중각 등이 있다. 이들이 훗날 한국 문단사에 끼친 공적을 우리는 과소 평가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현실에 뛰어들어 그 현실 속에서 그들과 같이 살아가려는 대중 불교의 이상이, 그 마음이 소리없이 표현된 좋은 귀감이었다.
그리고 매호마다 마지막 장에 그 현상 문예의 내용을 소개하였는데, 여기에서 1918년대의 한국 문단사의 문학 장르별 구별을 살필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①보통문 1행 24자, 40행 내외 (선한문체), ②단편소설 1행 24자, 100행 내외(한자 약간 섞은 시문체), ③신체시가, ④한시 (卽景卽事)로 나누어서 입선 상금이 50전에서 3원까지로 되어 있으니, 《유심》지 한 권 값이 18전이라면 과히 많은 상금은 아닌 듯하나 현상 문예란 말조차 익숙치 않았던 시절이고 보면 동참의 의미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또 문학 분류 방법 자체가 보통문, 단편소설, 신체시가, 한시로 구분한 일, 그리고 글의 형식과 기교에 있어서 신사조의 영향을 배제하고 내용 중심의, 즉 사상을 갖는 문학정신을 강조하였다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그 정신이 바로 전통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그 바탕에서 우리의 정신 문화를 꽃피워야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유심》지는 매호 권두에 시의 율과 격을 갖춘 권두시 7)를 실었다. 이것이 아마도 훗날 《님의 침묵》에 표현되어지는 만해 시의 흐름과도 상당한 관련이 있으리라 보여진다. 이것은 주요한의 〈불놀이〉보다 일년 앞선 시기에 이러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우리 문학사에 커다란 수확임이 틀림없다. 더욱이 《유심》 창간호에 〈심 心〉이란 작품을 통하여 문학과 전통의 문제, 더 나아가 문학의 사상성에 대하여 만해는 놀라운 지적을 하여 놓고 있다.
끝으로 《유심》지의 필자를 살피면, 먼저 불교계 인사로는 강도봉 스님, 김남천 스님, 박한영 스님, 백용성 스님, 권상로 스님, 이능화 등이고, 사회 인사로는 최린, 최남선, 유근, 이광종, 서광전, 김문인, 임규, 현상윤 등이다. 사회 인사의 대거 참여로 필진은 스님과 한학자, 민족운동가로 구분되어지고 이 중에 상당수는 직접 3 1운동에 뛰어든 결과를 보아도 이 잡지가 가졌던 비중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3 1운동의 가장 선봉에 섰던 최린은 《유심》 제1호에 〈시아수양관 是我修養觀〉이라는 제목으로, 선언서 서명에 직접 참여는 안 하였지만 독립 선언서를 쓴 육당 최남선은 〈同情바늘 必要잇는 자 되지 말라〉 등의 글을 쓴다. 여기에서 청년의 수양과 나아갈 지표를 제시하는 글들을 발표한다. 이는 시대정신이 적절히 나타난 글들이다.
만해가 이 잡지를 민족사상지, 언론지, 3 1운동의 전위지로 발전시키려 하였다는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것이 실천적 전개의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3 1운동이었다. 그러기에 1918년 10월 20일에 제2호를, 12월 1일에 제3호를 우여곡절 끝에 펴내고 8), 1919년 기미년을 맞으면서 3 1운동의 거사 준비 관계로 《유심》지 발행은 중단되었던 것이다.
만해 한용운은 《유심》지의 언론 활동을 통하여 세계 정세의 흐름과 민족의 앞날을 예견하여 3 1 민족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유심》이 암울했던 역사 현실에서 민족의 정신문화를 선도하며 사상지로서, 언론지로서의 국민정신을 선도하였음은 주목할 사실이다. 이 잡지가 3호로 종간을 맞았지만 그 종간의 배경이 3 1운동과 직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직시할 때, 민족의 정신문화를 선도한 사상지로서의 위치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만해 한용운의 3 1정신을 살피는 데 이 《유심》지는 3 1운동의 전위지의 역할과 비중을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침이 없다고 하겠다.


참고 = 위키백과, 한민족대백과사전
크리스천라이프 편집부